발더스게이트3 "80시간의 즐거움이 빙산의 일각인 명작"
라리안 스튜디오 신작 CRPG 발더스 게이트3에 이전부터 흥미가 있었다. 전작을 플레이했던 것은 아니지만, 던전 앤 드래곤과 크툴루의 부름 등 TRPG 장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플레이하기에는 쑥쓰럽기도 하고, 같이 플레이할 친구도 없어 마음 한 구석에서 꿈만 꾸던 차였다.
발더스 게이트3의 정식 출시와 메타크리틱 성적을 듣고 플레이할 게임이 늘어 기뻤다. 다만 한국어 지원을 하지 않기에 유저 번역이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AI의 발전과 유저들의 노고로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저 한글 패치가 업로드됐다.
왜 이렇게 리뷰가 늦었냐면, 유저 번역이 나오고 나서 80시간 넘게 플레이하고 엔딩을 보고 와서 그렇다. 아무래도 분량이 방대하다보니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리뷰를 위해서는 제대로 즐겨봐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엔딩도 보지 않고 리뷰하는 건 이 게임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감은 어땠냐고? 너무 재밌어서 3일 밤을 새도 피곤한 줄 몰랐다. 과몰입한 나머지 꿈에서도 주사위를 굴렸다. 엔딩 보고 나서도 2회차를 바로 달리게 되는 게임은 처음이었다.
장르: 턴 방식 CRPG
출시일: 8월 3일
개발사: 라리안 스튜디오
플랫폼: 스팀
■ 여보세요, 치료사 양반 내가 문어라니
발더스 게이트3의 이야기는 전작과 배경은 동일하나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발더스 게이트에서 살던 주인공은 어느 날 외계 종족 마인드 플레이어에게 납치당해 올챙이를 주입당한다. 올챙이를 주입당한 사람은 또 다른 마인드 플레이어로 변이한다.
어느 세력의 습격을 받은 마인드 플레이어 우주선이 추락하고 주인공과 피해자 동료들은 미지의 땅에 불시착한다. 이 문제의 올챙이를 제거하고 수상한 컬트 교단 '절대자'와 관련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이 발더스 게이트3 스토리의 큰 줄기다.
발더스 게이트3는 TRPG를 컴퓨터로 옮긴 CRPG 장르답게 주사위 결과가 모험과 상호 작용, 전투 등 게임 내 모든 행동과 그 결과를 판정한다. 1D20, 20면체 주사위 하나를 던져 요구치보다 높으면 성공하고 그 이하라면 실패하는 것이다.
그럼 주사위에 모든 걸 맡기면 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스탯, 스킬, 전문 기술 등 주사위 결과값을 보정하는 시스템이 있다. 지능이 높으면 비전, 역사, 자연, 종교 활동에 보정을 받으며 매력이 높을 시 기만과 위협, 설득 활동에 유리한 식이다.
다만 주사위눈 1과 20은 요구치와 상관 없이 무조건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대실패, 대성공 시스템이 존재한다. 문어로 변신할 위기 등 중요한 국면에서 대실패나 대성공이 뜰 때는 흡사 주사위 신에게 점지받은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 은신과 기습, 지형지물 활용한 전략적 턴제 전투
전투는 이전 시리즈와 달리 턴제 기반이다. 행동, 추가 행동, 이동력 등 제한된 자원으로 수행해야 한다. 턴제라 조작 방식이 어렵진 않지만, 지대 차이, 지형지물, 함정부터 시작해 각 클래스나 스킬로 추가되는 자원 등 전략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가령 기름통 근처에 적이 있다면 불화살을 날려 적을 직화구이로 만들 수 있고, 비를 부르거나 미리 물을 부어놓고 전기 통닭을 만들 수도 있다. 귀찮은 함정을 피해 상대를 밖으로 유인하거나 투명화를 활용해 잠입한 뒤 보스만 공략하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함정으로 까다로운 고르타쉬 전은 턴마다 투척하는 폭탄과 집무실에 설치된 각종 트랩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투명화를 사용해 잠입한 뒤 기습으로 턴을 시작하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 수 있다. 전투가 일어날 것 같다 싶으면 캐릭터를 전환한 후 고지대를 선점해 진형을 갖추는 꼼수도 있다.
전투 시 가장 쏠쏠하게 사용한 것은 낙하 대미지다. 높은 곳에서 무방비로 떨어지면 종족 불문 즉사하는데, 이를 이용해 밀치기나 충격파, 섬뜩한 작렬 등으로 적의 낙사를 노릴 수 있다. 근엄하게 등장한 보스가 섬뜩한 작렬 한 방에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을 보면 세상 짜릿할 수 없다.
강제로 전투에 진입할 경우 살상을 원하지 않는 적이면 패시브 비살상 모드를 켜는 것을 잊지 말자. 패시브는 언제든 켜고 끌 수 있어 필요할 때 켜는 식으로 사용하면 된다. 이 비살상 모드는 나를 적대하는 상인에게서 아이템을 뺏고 싶거나 스틸워치 주조소 노움과 같이 같이 죽이면 안 되지만 일시적 적대 상태에 빠진 NPC를 상대할 때 유용하다.
■ 선택이 실시간 영향을 미치는 판타지 속 모험
자유도나 오픈월드 등의 단어가 요새 게임업계 트렌드라지만 진정한 의미로 '자유로운' 게임은 얼마 없다. 더럽게 넓기만 한 맵을 헤매고 메인 스토리 흐름에 별 영향도 못 미치는 자질구레한 퀘스트에 치이다 보면 "정말 이게 오픈월드가 맞나"라는 의구심이 든다.
발더스 게이트3에 더욱 몰입하게 하는 점은 우리의 모험이 시시각각 세계와 메인 스토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내가 구하러 가지 않은 인물은 시체로 등장하고 다른 곳에서 만난 NPC와의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내가 선택한 루트에 따라 호의와 적대 관계가 뒤바뀌고, 퀘스트 궤적이 완전히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1막에서 마주치는 민타라를 동료로 영입하기 위해서는 고블린들의 드루이드 숲 습격을 도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드루이드 숲의 티플링과 드루이드들이 몰살당하기에 이후 2막과 3막에서 티플링과 드루이드 관련 퀘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선 성향 동료인 윌과 최고 드루이드 출신 할신 역시 떠나게 된다.
플레이어와의 상호작용에 따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월드 속 이야기는 그야말로 다른 세상에서 직접 모험을 하는 듯 하다. 티플링 소매치기 꼬마와 같이 아무 뜻 없이 베푼 선의가 손쉬운 퀘스트 클리어로 돌아오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죽인 혼령으로 인해 영영 언더 다크 지역의 그림자 저주가 해결되지 않기도 한다.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에 맞춰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다. 후반부 주요 세력 중 어느 쪽을 고르느냐, 이전 동료들 스토리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엔딩 또한 세세하게 갈린다. 든든한 쌍수쇠뇌가 아니라 동료인 아스타리온의 경우 특정 분기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성격 및 엔딩이 격변하기도 한다.
남들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마을의 물품을 함부로 만지거나 훔칠 수 없고, 평판이 하락할수록 상인도 바가지를 씌우는 등 디테일도 섬세하게 구현했다. 특히 퀘스트 중 내가 죽인 인물이 중요 정보를 품고 있어 죽은 자와 대화를 걸었는데, "나를 죽인 사람과는 나눌 대화가 없다"라며 거절당했을 때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감탄했다.
■ 게임 속 세계에 현실감 부여하는 입체적 인물들
이 게임을 80시간 넘도록 달리게 만든 주요 동력은 입체적인 인물들과 서사다. 턴제 게임 자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순수하게 이 세계관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선하고 책임감 넘치는 인물로 생각했던 인물이 배신하거나, 누가 봐도 악역이라고 생각한 인물이 의외의 면모를 보여준다. 현실에서도 내게 좋은 사람이 남에겐 개자식일 수도 있고, 그 반대도 제법 흔하지 않는가.
꿈 속 방문자 또한 2막 클라이막스에서 본인의 정체와 속셈을 드러낸다. 충격적이지만 게임 상 복선으로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다. 그런데 3막에서 특정 퀘스트를 진행하면 그 상황에서도 끝까지 숨겼던 과거가 드러난다. 관련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할 쇼킹한 비사다.
케더릭은 죽은 딸을 살리기 위해 신에게 자신을 바치고 언더 다크를 그림자 저주로 망쳐놨지만, 죽은 딸이 목숨보다 사랑한 연인을 사용해 불멸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치광이 살인마 오린은 재능있는 손녀라고 어릴 적부터 아껴줬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자 역지사지 안 되는 분노를 퍼붓는다.
NPC 뿐만 아니라 동료도 마찬가지다. 평면적인 본 투 비 선역, 악역보다는 모든 인물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고, 일견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결정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서사가 있다. 1막에서 등장했던 마녀의 피해자가 3막에서 깜짝 등장하거나 하는 식으로 플레이어의 개입 이후 변화한 이야기도 충실히 챙긴다.
이렇듯 게임을 진행할 수록 게임 속 세계에 더욱 깊게 몰입해 플레이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기자 또한 별 거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엔딩 보고 나니 무지막지한 플레이 타임이 찍혀 있을 정도였다.
■ 뭐든 가능한 가능 그 자체, 발더스 게이트3
80시간 넘는 시간동안 정신 없이 발더스 게이트3 세상에 푹 빠져 지냈다. 카메라 시점이나 다소 불편한 조작감, 퀘스트가 꼬이는 버그 등 문제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소하게 느껴졌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엔딩 전에는 유저 커뮤니티 방문을 자제했다. 엔딩을 보고 뿌듯한 마음에 감상을 공유하러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자, 내가 플레이한 긴 시간이 빙산의 일각임을 발견했다.
동료 중 게일과 칼라크는 만난 적도 없고, 메인 스토리 위주로 진행하다보니 아다만틴 대장간과 버섯 친구들 이야기는 넘어가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참된 영혼은 살리려고 하다 깜빡해 돌에 깔려 시체가 됐다. 불타는 집은 퀘스트 저널에 기록됐는데 어디서 됐는지도 모르겠다. 죄 없는 여자를 오해로 죽여버리기도 했다.
나는 맛있는 스테이크를 배터지게 먹고 나오는데 옆 자리 손님이 "갈비 맛있었지"라는 말을 듣는 기분이다. 구경도 못한 이야기와 놓친 퀘스트가 정말 많았다. 또한 '내가 직접 주인공으로서 만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 선택에 따라 다채로운 스토리를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발더스 게이트3는 6만 6000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게임이다. 자유도 높은 게임, 턴제 게임에 거부감이 없다면 즉시 구매하기를 추천한다. 시스템이 낯설고 게임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적응하면 정말 재밌다. 한국어는 지원하지 않아도 요새 AI의 대단함 덕분에 큰 허들은 아니다.
1. 다채롭고 풍부한 메인 및 서브 퀘스트 양
2. 지형, 투척물 등 전략적 전투 요소
3. 높은 자유도, 이를 반영하는 매끄러운 세계관 연계
1. 카메라 시점, 가방 정리 등 부족한 편의성과 조작감
2. 게임 내용 대비 미흡한 정보량의 튜토리얼
3. 스토리 진행이 막히는 특정 버그
suminh@gameto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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