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조인성은 어떻게 류승완의 '新 페르소나'가 됐나

김지혜 2023. 8. 2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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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배우 조인성과의 대화는 흡사 DVD 코멘터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영화의 뒷이야기를 포장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하는 그 입담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조인성은 원래 달변가지만 영화에 대한 자신감과 애정이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는 수다쟁이가 되었다.

"영화계가 어렵다지만 생각해 보면 매번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했던 거 같아요. 뭐 또 영진위의 노예가 돼야겠죠. 하면 되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영화 '밀수'로 또 한 번 여름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조인성은 기꺼이 '영진위의 노예'가 되겠다고 웃어 보였다. 2년 전 영화 '모가디슈'(2021)로 그 해 여름 왕좌에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매일매일 영진위 일일 관객 수를 체크하는 여름을 감당하겠다는 의미였다.

개봉 전부터 '영진위 노예'를 자처했던 조인성은 또 한 번 여름 흥행의 달콤한 맛을 보게 됐다. '밀수'는 개봉 3주 만에 손익분기점(400만 명)을 넘고 500만 돌파를 향해 순항 중이다.

'밀수'는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휘말리는 해양범죄활극. 조인성은 1970년대 대한민국을 주름잡았던 밀수왕 '권상사'로 분했다. '권상사'는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하다는 명성과 달리 여유와 낭만을 가진 인물이다.

엄연히 말해 영화의 주인공은 아니다. '그리고 조인성'이라는 엔딩 크레딧에서 알 수 있듯 우정 출연에 가까운 조연이다. 과거 영화판에서 '우정 출연'의 의미는 배우의 유명세에 비해 역할의 크기가 작아 비중을 미리 축소한 표현이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역할의 크기와 무게를 타이틀이 정하지 않는다. 조인성은 조연이지만 주연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줬고, 류승완 감독은 '그리고 조인성'이라는 표기에 아낌없는 애정과 신뢰를 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류승완 감독님에게 전화가 와서는 "자기야, 스케줄 돼?"하시는 거예요. 그때 전 이미 '무빙'을 차기작으로 선택해 놓은 상태였거든요. 그게 생각나셨는지 "아, 아니다..."라고 말을 접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해보라고 했더니 "자기를 두고 쓴 게 하나 있는데..."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니, 절 두고 썼는데 왜 이제 얘기해요?"라고 물었죠. 그러면서 "제가 얼마나 나오는데요?"라고 다시 물었더니 "얼마 안 돼. 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류승완의 전화 한 통으로 조인성은 '밀수'에 승선하게 됐다. 두 사람은 영화 '모가디슈'를 함께 작업하며 급속도로 친분과 신뢰를 쌓았다. 작품으로 쌓은 신뢰와 더불어 '강동구'라는 거주지 공통분모도 친분의 밀도를 높였다. 조인성이 차기작으로 정한 '무빙'의 원작자 강풀 역시 이 일원으로 류승완 감독과 절친이다. 조인성이 먼저 정한 작품을 두고도 '밀수'에 합류할 수 있었던 건 스케줄 조율을 받아들인 '무빙'팀의 배려 덕분이기도 했다.

"'무빙'은 출연자들이 많으니까 제 촬영 분량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밀수' 촬영을 먼저 시작했어요.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야 대본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만들어 갈지가 중요하지. 영화를 하기로 하고는 대본을 빠르게 두 어번 정도 다시 봤어요. 혹시 제가 물에 들어갈까 바요. 물에 들어가는 건 수중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러면 준비를 더 해야 하는 거니까요"

조인성의 '밀수' 촬영은 총 18회 차였다. 우정 출연이라기엔 과한 분량이었다. 조인성은 촬영 기간 내내 지인들에게 "'밀수' 잠깐 도와주러 왔어"라고 말했다지만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섰다.

"감독님이 미안하셨는지 완성된 영화를 보니까 스페셜하게 챙겨주신 거 같더라고요. 제 목표는 (정)만식이 형보다 류승완 감독의 작품에 많이 나오는 겁니다. VIP 시사 때 보니 만식이 형님도 저를 좀 경계하는 눈빛이더라고요(웃음)"

'권상사'는 바버렛츠의 노랫말처럼 월남에서 돌아온 인물이다. 조인성은 '품위 있는 밀수왕'을 디자인했다고 했다. 그는 "이 영화에는 이미 완벽하고 강력한 빌런이 존재하고 있어요. 제가 그 캐릭터와 겹치면 안 되죠. 그래서 권상사에게는 좀 허술한 면도 부여된 거요. 등장할 때부터 춘자(김혜수)에게 못된 짓을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빈 구석을 만들어 주는 식으로요. 전쟁 참전 경험이 있지만, 품위 있으면서 매너 있는 인물을 상상했어요. 그래야 관객들이 이 캐릭터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장면이 많았다고 했다. '현장성'과 '즉흥성'이 권상사라는 인물의 품격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권상사가 배에 올라갔는데 배가 흔들려서 넘어져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제 표정이 일그러졌는데 감독님께서 그 표정을 보시더니 "이거야! 이게 또 권상사의 모습이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걸 놓치지 않으세요. 군천에 가서 춘자와 만나는 장면에서도, 위스키를 주고 한 바퀴 돌 때 현장에서 노래를 틀어주시며 "돌아봐" 하시더라고요. 그러자 바로 "아니 이게 웬 신선한 표현이야!" 하고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지포 라이터를 켜는 장면도 젊었을 때 습관처럼 하던 걸 그냥 해본 거요. 그걸 보신 감독님이 '저런 건 어떻게 준비한 거야?'라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거창하게 생각한 건 아녜요. 어쨌든 배우를 오래 하다 보면 PD의 마음이 되는 면이 있는데 '이 영화에는 강력한 브릿지가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걸 어떤 배우가 하면 좋을까 생각했어요. 그런 마음으로 현장에 갔고, 우연과 상상을 더해 캐릭터가 좀 더 풍성해진 거죠."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쿠키 영상의 뒷이야기도 밝혔다. 대본에 없던 장면이었다.

"찍어놓은 영상들의 편집점을 보고 감독님이 좀 아까우셨던 것 같아요. 스태프도 권상사를 살려야 한다는 분위기를 암묵적으로 형성하신 것 같고요. 회의를 하다가 '어떻게 권상사를 저렇게 죽이냐"고 했다더라고요. 어느 날 감독님께 전화가 와서는 "자기야, 나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어. 하루만 비워놔"라고 하시더라고요. 찍고 있던 작품의 제작진에게 부탁을 해서 스케줄을 하루를 뺐고, 지방에 내려갔어요. 허름한 병원을 빌려서 쿠키 영상을 찍은 거요. 원래 다이아몬드를 흰밥 위에 올려놓는 거였는데 보석이 투명해서인지 잘 안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스태프들에게 "김 좀 달라"고 해서 김 위에 다이아를 올렸어요"

쿠키 영상을 통해 권상사와 조춘자의 묘한 핑크빛 무드가 완성됐다. 조인성은 그 무드에 대해 "두 배우가 만나 일으킨 화학작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 그걸 '러브라인이다 아니다'라고 저희가 규정해 버리면 관객의 상상을 막는 게 아닐까요? 멜로가 가능한 배우들이 만났으니 서로를 쳐다보는 것도 어느 순간엔 남녀의 느낌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자체가 배우가 작품에 주는 선물 같은 거죠. 그럼 그 눈빛과 웃음의 의미는 뭐냐?라고 묻는다면 전 사실 제가 그렇게 웃은 줄도 몰랐어요"라고 말했다.

류승완은 누구보다 조인성의 사용법을 잘 알고 있다. 밀수왕의 카리스마와 품위와 낭만까지 갖춘 매력남의 향기를 동시에 풍기며 그 어떤 작품보다 멋지게 그려냈다. '액션 키드'인 류승완 감독은 후반부 액션신을 '밀수'의 하이라이트 신으로 설정해 놓고 그 장면을 근사하게 채워줄 자신의 기사(騎士)로 조인성을 낙점한 것이다.

"배우는 어쨌든 쓰임을 당하는 직업이잖아요. 류 감독께서 '모가디슈'때 저를 못생기게 찍은 것에 대한 어떤 채무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멋지게 찍어주셨나.(웃음) 자꾸 촬영하면서도 자기 소싯적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하시고. 도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웃음). '모가디슈'가 사건 위주의 영화라면 '밀수'는 캐릭터 위주의 영화다 보니 제 캐릭터도 잘 보였던 게 아닐까 싶어요"

반대로 조인성 역시 류승완의 사용법을 잘 알고 있다. 감독은 현장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좋은 배우는 감독이 원하는 바를 재빨리 캐치해 수행해 줄 수 있는 단순하고도 확실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류승완에게 조인성은 그런 배우였다.

"'모가디슈'를 촬영할 때 류승완 감독님을 비롯한 '밀수'의 스태프 대부분이 모로코에서 5개월을 동동락 했어요. 5개월 붙어있다 보면 서로 좋은 모습만 보일 수 없잖아요. 서로의 민낯도 보게 되면서 이 사람이 나와 결이 맞는지를 보게 될 거 아녜요. 저는 그저 감독님이 힘들어하실 때 순댓국에 소주 한 잔 나눠먹으며 대화를 많이 나눴던 거 같아요. 현장에서도 그런 게 이어지는 거 같아요. 저는 감독님을 잘 아니까 주문이 들어오면 원하는 걸 캐치해서 빨리 해주려고 해요. 감독이 원하는걸 배우가 못 찾고, 그걸 찾아내는데 시간을 할애해 버리면 정작 배우가 지쳐서 연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제가 베테랑이 돼서 좋은 건 감독이 원하는 걸 해주고, 내가 원하는 걸 트라이해 볼 수 있다는 거요.

다만 '밀수'의 경우 분량이 적고, 인물에 대한 전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니까 한 장면 한 장 좀 부담스럽긴 했어요. 촬영은 이미 시작됐고, 저는 '모가디슈' 홍보를 하다가 뒤늦게 합류한 거라, 이미 합이 다 맞는 상황에서 나만 손님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그들이 저를 객처럼 대한게 아니라 저의 염려였. '조인성 절고 갔어'라는 소리는 들으면 안 되니 잘 해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고요. 그런데 (김)혜수 선배랑 첫 합을 맞췄는데 "자기야, 잘한다. 너무 잘해"라고 하시더라고요. 얼마나 안도되던지..."

조인성은 '밀수'를 하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작품에 제가 어떻게 나왔느냐가 아니라 '밀수' 아니었으면 김혜수, 염정아를 못 만났을 거 아녜요? 오래 활동했다고 이 배우들을 만날 기회가 오는 건 아니니까요"라고 선배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도 드러냈다.

어느덧 조인성도 데뷔 23년 차다. 20대의 청춘스타에서 40대의 중견배우로 자연스럽게 넘어오면서 나이에 맞는 성장을 이뤄냈다. '밀수'를 통해선 어떤 것을 얻었을까.

"거창하게는 생각 안 해봤지만 매 순간 '제로값이구나. 0에서 시작하는구나. 산 넘어 산이구나' 이런 생각을 해요. 다음 작품은 '호프'(감독 나홍진)인데 또 제로값이에요. 내가 해놓은 거에 대한 버프를 안고 가는 게 아니거든요. 이건 끝난거고, 또 새로 시작해야죠. 물론 전작이 잘되면 효과를 가져갈 수는 있겠지만 그 효과가 반드시 좋은 걸로 발휘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물론 투자를 받을 때 좀 더 좋은 조건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배우 자체는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요. 그건 늘 어렵고 두려워요"

조인성은 확실히 유연해졌다. 그리고 노련해졌다. 시간과 경험의 축적이 낳은 결과다. 스스로도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다고 했다.

"자유로워진 건 있어요. 역할이 좀 작아도 여건이 된다면 출연할 수 있죠. 항상 주인공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그 행간을 잘 채워나가면 재밌는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호프' 같은 작품을 만나면 또 긴장감을 가지고 가야죠. 관객으로 하여금 필모그래피를 기대하게 하는 배우가 돼야 하는 건 제 몫이지만 결과의 순간이 너무 짧아서 허탈할 때도 있어요. 짧게는 2~3주, 길어봐야 한 달 안에 영화의 성패가 결정되잖아요. 영화 공정은 예전보다 길어져서 제작에 1년, 영화 개봉까지는 2년도 걸리는데...이것만 생각하면 허탈해지기 때문에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돼요. 그런 면에서 '밀수'는 함께한 시간을 통해 이미 행복이 완성된 영화예요. 하지만 결과에 또 일희일비하겠죠. 영진위의 노예도 돼야 하고요.(웃음)"

그래서일까. 40대가 된 조인성의 필모그래피는 과거보다 더 흥미롭다. 지금 그를 자극하는 도전의식이 있을까.

"특별한 목표는 없어요.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걸 잘해보자 주의죠. 생각해 보면 '모가디슈', '밀수', '무빙' 모두 우연한 기회에 작품이 들어왔어요. 뉴가 투자배급한 '밀수'를 할 때 '무빙'도 들어왔고요. 두식이라는 역할도 분량이 많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원작 웹툰을 봤는데 너무 재밌는거예요. 그래서 시나리오도 안 보고 한다고 했죠. 우연이 겹치고, 작은 기회들이 모여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예전에는 주인공이 아닌 시나리오는 잘 안 보려 했는데 요즘은 세세하게 봐요. 나를 위해 세팅된 작품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을 수 있으니 꼼꼼히 보게 되죠.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더 다양하게 작품을 할 수 있게 된 같아요. 저도 궁금해요. 앞으로 제가 또 어떤 식으로 또 변해갈지."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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