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70>]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2023. 8. 2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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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서울 중구 정동 옛 덕수궁 선원전 터에는 사망 선고를 받은 적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 200~25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가 그것이다. 사망 선고를 받은 적 있다고 말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이후 그 선고는 정정되었다. 2004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심각하게 훼손돼 2008년 공식적으로 고사 판정을 받은 회화나무가 십수 년 만에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죽어 있었을 때 그 나무에는 말라비틀어진 열매만이 달려 있었다 한다. 나무껍질을 벗겼을 때도 녹색 수액이 나오지 않았다 하고. 그러나 지금은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냐는 듯 푸릇푸릇한 잎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이 불사의 나무를 사진으로만 보았을 뿐이지만, 사진만으로도 대단한 나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식물의 우월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혹은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식물의 시간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1000년을 사는 나무가 있는 세계에서 인간의 경험이란 고작해야 녹색 수액이 나오지 않고 말라비틀어진 열매를 매달고 있는 것을 근거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비롯한 세상의 많은 문제에 대해 우리는 착각과 오해의 소지를 무릅쓰고 판단한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다시피,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않는가, 그 죽은 나무가. 사람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며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만, 고작해야 100년 남짓을 체험하고 사라질 뿐인 동물로서의 우리는 스스로 보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다. 판단하는 것만큼이나 판단하지 않는 것, 적어도 ‘아직은’ 판단하지 않는 태도랄까. 인간은 거인을 꿈꿀 수 있어야 하지만 마음에는 항상 소인을 소중한 추억처럼 품고 있어야 한다.

얼마 전 회사 일의 일환으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정독할 일이 있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책에서 ‘어린 왕자’의 일부분이 인용되는데, 인용문의 정확한 페이지를 찾으려면 책을 읽어 볼 방법밖에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예정에 없던 독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심통이 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잔뜩 불만스러운 상태가 되어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웬걸, 첫 줄을 읽기 시작하자 다음 줄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바빴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의 위용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었다. 그러고는 이내 소름 끼치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어린 시절에 알게 된 것은 절대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은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면서 우선 판단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무엇을 읽어야 하고 무엇은 읽으면 안 되는지 스스럼없이 판단한다. 내가 읽었던 ‘어린 왕자’는 아이들이 읽기 좋게 해석된 판본이었다. 어른의 눈으로 해석되지 않은 그 자체로서의 ‘어린 왕자’는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기 조종사인 ‘나’의 앞에 나타난 어린 왕자는 작디작은 소행성 B612에서 지구라는 별로 여행 온 이방인이다. 그는 지구에서의 여행 경험과 함께 시간과 관계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들려준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데,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어린 왕자가 보이지 않는 존재로 변하는 과정이다. 돌담 위에 걸터앉은 어린 왕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노란 독사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의 독은 좋은 거니? 날 오랫동안 아프게 하지는 않을 거지?” 이후 어린 왕자는 자신과 함께 웃고 싶을 때 수많은 별을 보면 웃음이 나올 거라는 말을 남긴다. 그런 뒤 자신이 별로 돌아가는 날 밤에는 오지 말 것을 부탁하는데, 본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뱀이 재미로 ‘나’를 물 수도 있어서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것처럼 이렇게 말하며 안도한다. “맞아. 뱀이 두 번째 물 때는 독이 없지.” 그러곤 그의 발목에서 노란빛이 번쩍한다. 어린 왕자는 조용히 쓰러진다.

이 장면은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뱀이 첫 번째로 문 사람이 어린 왕자라는 것, 뱀으로 하여금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 둔 것이 어린 왕자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 요컨대 어린 왕자는 1년 동안의 지구 여행을 마치고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소멸했다. 그는 자살한 것이다. 어린 왕자는 등장부터 소멸까지 내내 한 가지를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나’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중요해진다. 반대로 말해도 틀리지 않겠다. 중요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덕수궁 선원전 나무에 대해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죽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가 인간의 관점이라면, 후자는 나무의 관점일 것이다. 전자가 보이는 것이라면 후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무의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하다.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할 진실이다. 당신은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지 않는가.

Plus Point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1900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비행사이자 작가다. 민간 항공 회사에 근무하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남방 우편기’ ‘야간 비행’을 쓰며 조명받았고, 1943년에는 자신의 대표작이 된 ‘어린 왕자’를 발표했다. 비행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공군 장교로서 연합군 반격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정찰 임무를 수행하다가 행방불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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