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니 고도가 찾아오더라”…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임석규 2023. 8. 21.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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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파 주진모, 셰익스피어학회장 이현우 주연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역을 맡은 배우 주진모(왼쪽)와 한국셰익스피어학회 회장인 연출 겸업 배우 이현우. 로맨틱용광로 제공

지난해 5월 어느 상갓집에서였다. 어느덧 60대 중반에 접어든 친구들은 “맨정신일 때 우리끼리 연극 한 편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개성파 배우 주진모, 영화·드라마 제작자 김기하는 “더 나이 들면 어려울 테니 당장 시작하자”고 서둘렀다. 대학 졸업 이후 무대를 떠난 유대준은 은퇴 자금 5천만원을 제작비로 냈다. 셋은 고려대 연극동아리 극예술연구회 76학번 동기생. 연극을 향한 ‘노병들의 갈망’이 불타오르며 제작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엔 사연도 많다.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개막해 오는 27일까지 이어진다.

앙상한 나무 아래 두 부랑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오지 않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고도가 누군지도, 왜 기다리는지도, 언제 올지도 모른 채 알듯 모를듯한 대화를 나누며 끝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구나”란 대사로 시작되는 연극은 “고도씨는 오늘 밤엔 못 오지만 내일 올 것”이란 종잡을 수 없는 대사로 마무리된다.

고도가 누군지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일 터, 누구에겐 신일 테고, 어떤 사람에겐 미래의 희망이나 행복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기다림 자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불리는 실험적 작품이지만 지난 18일 첫 공연의 객석에선 자주 웃음이 번졌다.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됐다. 베케트는 1969년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됐지만 시상식에 불참했고, 인터뷰도 거절했다.

이번 공연은 배우들의 면면이 특이한 조합이다. 영화 ‘타짜’의 ‘짝귀’로 널리 알려진 연기파 배우 주진모는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감초 조연’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그는 일찍이 20대에 국립극단 최연소 단원으로 활약했다. 연극 ‘렛미인’ 이후 7년 만의 연극 무대다. 블라디미르 역은 현재 한국셰익스피어학회 회장인 이현우 순천향대 교수. 원로배우 이순재가 주연한 연극 ‘리어왕’의 연출을 그가 맡았다. ‘겨울나그네’ 등 연극과 뮤지컬 ‘하모니’ 등에 배우로도 출연했다. 포조 역은 ‘탈주자’, ‘XXL 레오타드안나수이손거울’ 등 많은 작품에 출연한 연극배우 안병식과 연극 ‘쁘띠삼촌’, 뮤지컬 ‘모비딕’ 등에 출연한 배우 황건이 더블 캐스팅으로 출연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목에 밧줄을 맨 럭키 역의 유대준(왼쪽 두번째)은 은퇴자금 5천만원을 제작비로 댔다. 출연진은 모두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출신. 로맨틱용광로 제공

수많은 희곡 작품 중에 하필 이 작품을 골랐을까. “연극을 하는 사람들에겐 필생의 작품 아닐까요. 젊은 시절엔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인데 나이가 들다 보니 한번 해볼까 생각한 거죠. “(김기하 연출) “어렵지만 워낙 대작이고 대단한 작품이라 도전하고 싶었고, 욕심도 났어요.” (이현우) “이 작품을 해본다는 것, 관객에게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주진모) “20대 때는 고도를 잘 몰랐는데 30대 어느 순간 ‘목이나 맬까’란 대사가 제 마음을 때렸어요. 언젠가 고도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저한테도 고도가 찾아온 거지요.” 배우 안병식은 “이 작품은 그렇게 자주 하는 공연이 아니고 젊은 배우들은 하기도 어렵다”며 “고도를 한다는 건 배우들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했다.

럭키 역을 맡은 유대준에겐 특별한 사연이 있다. 대학 2학년 시절인 1977년 이 작품에서 에스트라공 역을 연기한 것. “그때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역을 연기한 게 평생의 부끄러움으로 남았어요. 죽기 전에 꼭 이 작품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지요.” 그가 은퇴 자금까지 쏟아부으며 이 연극에 매달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는 “당시 럭키 역할을 했던 친구가 연극 끝나고 얼마 뒤 사고로 사망했다”며 “무대에 오를 때마다 그 친구 이름을 불러본다”고 했다. 목에 목줄을 매고, 노예처럼 온몸으로 연기해야 하는 이 배역을 위해 그는 링거주사를 맞으며 연습에 매진했다. 그에겐 대학 졸업 이후 45년 만의 연극 무대다.

소년을 제외한 출연진은 모두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출신이다. 그렇다고 ‘대학 동아리 연극’쯤으로 낮춰보면 큰 오산이다. 어느 공연보다 원작을 깊이 고 충실하게 파고든다. “한글 번역본은 물론, 사무엘 베케트의 불어 원본과 그가 몇 년 뒤 영어로 다시 쓴 대본까지 일일이 대조했어요. 베케트의 의도를 꼼꼼하게 분석해 무대에 반영하려 한 거지요.” 국내에서 손꼽히는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이현우 배우는 “베케트의 희곡을 보면 햄릿과 맥베스 등 셰익스피어 희곡에 나오는 대사들이 많이 등장한다”고 소개했다. 김기하 연출은 “워낙 어려운 작품이라 과거엔 그냥 코미디로 가면서 일부러 웃기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특이한 설정의 해석은 많았지만 이렇게 영어본까지 대조해 반영한 정통적 공연은 처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 출연한 배우 주진모(왼쪽부터), 안병식, 이현우. 각각 에스트라공, 포조, 블라디미르 역을 연기한다. 로맨틱용광로 제공

국내 연극판에서 ‘고도’하면 연출가 임영웅과 극단 ‘산울림’을 떠올린다. 초연(1969년) 이후 1500회 넘게 공연한 이 조합은 2019년 50주년 기념공연으로 그 정점을 찍었다. 당시 임영웅 연출은 “새로운 ‘고도’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 새로운 시각의 ‘고도’가 속속 선보이고 있다.

“코로나가 휩쓴 단절의 시대, 격리의 시대를 거치면서 기다림에 대해 더욱 절실하게 생각하게 됐고, 이 작품의 진가도 새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이현우 배우는 “시대가 ‘고도’를 부르는 것 같다”며 웃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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