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규의 저널리즘책무실] 공산당 언론? MB 시절 공영방송을 돌아보라
[저널리즘책무실][이동관 논란]
이명박 정부 집권 첫해인 2008년 7월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케이비에스(KBS) 사장의 경우, 정부 산하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최적임자인지를 한번쯤 검증하고 재신임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임명된 정연주 한국방송(KBS) 사장을 겨냥해 한 말이다.
정부의 국정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방송, 우리는 그것을 ‘어용 방송’이라고 부른다. ‘땡전 뉴스’가 횡행하던 전두환 시절처럼 ‘정권의 나팔수’를 하라는 얘기다. 방송법에 따라 응당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할 ‘공영’방송을 ‘국영’(관영)방송처럼 부리겠다는 구시대적 인식이다. 박 수석의 ‘재신임’ 운운은 이제 ‘주인’이 바뀌었으니 새 주인에게 충성하든가, 아니면 나가라는 겁박이나 다름없다. 당시 집권당이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안경률 사무총장은 더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놨다. “많은 시간을 계속 촛불만 방영하는 행태, 또 대통령에 대한 직·간접적인 폄하, 이런 일들이 과연 국영방송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사실 ‘정부 산하기관장’이란 말도 틀렸다. ‘정부산하기관 관리기본법’과 ‘정부투자기관 관리기본법’을 통폐합해 2007년 제정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은 한국방송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방송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단서 조항을 둔 것이다. 하물며 국영방송이라니.
공영방송의 주인은 정권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정부의 잘잘못을 따지고 의혹을 검증하는 것은 언론으로서 당연한 책무다. 대통령의 국정철학 구현은 행정조직이 해야 할 일이지, 결코 공영방송의 몫이 아니다. 이런 상식이 부정되는 시절이 다시 도래했다. 15년 전 시대착오적인 언론관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여당 정치인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공영방송을 겨냥해 “민주당·민노총의 프로파간다 매체”, “민노총에 의해 운영되는 노영방송” 등의 악담을 퍼붓더니, 급기야 방송정책을 총괄할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의 입에서 “정파적 보도를 쏟아내는 시스템을 교정”(18일, 국회 인사청문회)하겠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정권에 불리한 보도가 나올 때면 죄다 ‘가짜뉴스’ ‘괴담’ 딱지를 붙여온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행태에 비춰보면, ‘정파적 보도’가 뭘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교정’이라는 말에서는 엠비(MB·이명박) 시절 ‘방송 정상화’란 미명 아래 공영방송을 철저하게 망가뜨린 ‘언론 장악 기술’을 다시 한번 펼쳐 보이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엠비 시절의 ‘언론 장악 기술’에 대해서는 검찰이 수사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에서 국정원을 통해 엠비시(MBC)에 청와대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경영진을 구축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방송을 제작하는 기자, 피디, 간부진을 모두 퇴출시키고, 엠비시의 프로그램 제작환경을 경영진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방송사 장악의 계획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2017년,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불법 사찰 수사팀 수사보고서)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공영방송 교정’ 운운한 이동관 방통위원장 후보자다. 과연 ‘이명박 시즌2’를 ‘자임’하는 정부답다. ‘땡전 뉴스’ 시절의 민주정의당부터 국민의힘까지 현 집권세력의 디엔에이(DNA)에는 ‘공영방송은 국정홍보방송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새겨져 있는 듯하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6월 나온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발언이 언론 시계를 엠비 시대로 되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 같다. 레퍼토리도 고장난 레코드처럼 엠비 시절과 판박이였다. ‘대통령의 통치철학’. 권 의원은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지목하며 “대통령의 통치철학이나 국정과제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은 물러나는 게 맞다”고 했다. 방통위는 공영방송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기구다. 방통위가 방송 장악의 첫 관문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엠비 시절 공영방송 경영진 물갈이의 총대를 멘 이도 ‘방통대군’으로 불린 최시중 방통위원장이었다. 최시중의 활약상을 기억하는 ‘엠비의 후예’들이 한상혁 위원장을 ‘축출’ 대상 1호로 여겼으리라는 건 불문가지다. 한 위원장을 우격다짐으로 끌어내린 이후 벌어진 일들은 새삼 재론하지 않겠다.
이철규 국민의힘 사무총장이 최근 ‘공영방송 개혁’ 세미나에서 말했듯이, 이제 ‘고지’가 눈앞에 다가왔다. 김효재 방통위원장 직무대행이 온갖 무리수를 두며 깔아 놓은 ‘방송 장악 꽃길’을 따라 이동관 후보자가 방통위에 입성하면 곧바로 정권의 주구 노릇을 할 인물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앉힐 것이다.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를 해온 기자와 피디들에게는 ‘좌편향’ 딱지를 붙여 탄압할 것이다. 정부 비판 보도는 금기가 되고,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구현하라는 압박에 가위눌릴 것이다. 옛 소련 등 전체주의국가의 관제 언론이 그랬다.
이동관 후보자는 지난 1일 “공산당의 신문·방송을 언론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언론노조의 성명으로 반박을 대신하겠다. “방송 장악으로 만들어낸 엠비 시절 친정부 관제 방송이 바로 이동관이 말한 ‘공산당 방송’이 아니고 뭔가.”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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