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게', 망가짐을 불사한 한지민의 '힙한' 코미디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토요일 늦은 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JTBC 드라마 '힙(Hip)하게'를 '발견'했다. 마침 첫 회. 그런데 'Hip이라니? 영어로 엉덩이라는 뜻 아닌가? 아니면 요즘 말로 새롭고 개성적이라는 그런 의미인가?' 조금은 미심쩍은 마음으로 채널을 잠시 멈췄다. 재미없으면 바로 돌려버리겠다는 의지에 손에서 리모콘을 놓지 않은 채 감시의 눈초리로 지켜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 드라마 뭔가 유치해 보이면서도 은근히 웃기다.
첫 회, 첫 장면부터 황당한 웃음을 자아낸다. 1982년생 41세 한지민이 교복을 입고 나온다. '이건 좀 억지지'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야기의 속도가 빨라진다.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주인공 봉예분(한지민)의 전사(前史)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곧바로 15년의 세월을 점프한다. 그렇게 어느덧 시골 마을 무진의 수의사가 된 봉예분. 이제는 제 나이와 비슷해 보이고, 이야기도 정상적인 흐름을 밟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다시 좌충우돌의 연속. 딱 봐도 열정이 넘치는 형사 문장열(이민기)이 소란스럽게 등장하고 봉예분은 소등에 업힌 채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이 드라마의 정체를 슬쩍 노출한다.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상처를 지닌 봉예분은 외할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시골 수의사가 됐지만 정작 소나 돼지보다는 개와 고양이를 진찰하고 싶다. 소는 덩치도 크고 혹시 발길질이라도 당할까봐 두려워 근처에 가는 것도 싫다. 그러나 농촌에서 필요한 사람은 '펫'이 아닌 '가축' 수의사다. 봉예분은 병원 일을 도와주는 이모 정현옥(박성연)의 성화에 못 이겨 동네 아픈 소를 진찰하러 갔다가 우연히 떨어진 유성우를 맞고 신비한 초능력을 얻는다.
그런데 이 초능력이란 게 좀 이상하다. 하늘을 날거나 괴력을 발휘하는 영화 속의 슈퍼 파워가 아니다. 동물이나 사람의 엉덩이를 만지면 그 동물(사람)이 보고 경험했던 것을 투시할 수 있는 사이코메트리 능력이다. 조금 낯선 단어이지만 그래도 사이코메트리까지는 그럭저럭 OK. 하지만 '엉덩이를 만지면'이라는 조건이 께름칙하다.
'엉덩이 터치=성추행'이라는 인식 때문에 이 드라마는 방영되기 전부터 가벼운 논란에 휩싸였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성추행 시비의 여지가 있는 소재로 버젓이 드라마를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성추행 시비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금세 알 게 된다. 엉덩이 터치의 주체가 남성이 아닌, 여성인 점도 간과할 수는 없으나 그보다는 이런 신비한 능력을 쓰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봉예분이 엉덩이를 만지며 부정한 사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기에 싸잡아 비난할 수는 없다. 물론 봉예분이 실수로 문장열의 엉덩이를 터치하면서 '변태'로 몰려 수갑까지 차는 해프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웃음을 위한 장치. 좀더 들어가 보면 그 뒤에는 반드시 피치 못할 사연이 도사리고 있다.
19일 방영된 3회에서는 드디어 봉예분의 억울한 누명이 한 꺼풀 벗겨졌다. 대학 후배 염종혁(이휘종)을 의심하다가 변태로 몰렸는데 결국 그가 납치범임이 드러나면서 문장열과의 오해가 풀렸다. 앞으로도 봉예분이 왜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됐는지, 이를 통해 또 어떤 미스터리를 풀어가는지 등이 더욱 위트 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쯤에서 한지민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봉예분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인 이야기 속에서 그의 웃음기를 쏙 뺀 코믹 연기는 반짝반짝 빛난다. 아무리 최강 동안(童顔) 여배우라고 해도 불편했을 고교 시절 장면은 교복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씨익' 미소가 지어진다. 전문 수의사가 됐지만 어딘가 엉뚱하고 여전히 서툰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더욱 공감이 간다.
한지민은 코미디 연기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 결코 예뻐 보이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문장열이 봉예분을 변태로 오인해 지나칠 정도로 크게 업어치기를 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그때마다 깜짝 놀라 넘어가는 한지민의 표정은 절로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슬랩스틱의 전형으로 싱거울 법도 한데 희한하게 재미있다. 아마도 '오버 연기'의 수준이 도를 넘지 않을 만큼 잘 조절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매우 평이해 보이는 스토리이지만 그렇다고 상투적이지는 않다. 대개 이런 로맨틱 코미디류는 처음엔 남녀 주인공이 티격태격하다가도 이내 서로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 마련. 그러나 이 드라마에선 좀처럼 봉예분과 문장열의 로맨스를 찾아볼 수가 없다. 비록 3회에 서로의 오해가 풀리면서 호감을 가지게 됐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여전히 봉예분의 기이한 초능력에서 유발되는 웃음, 그리고 이를 이용한 미스터리의 해결에 있다.
오히려 로맨스는 봉예분의 이모와 무진 경찰서 강력반장 원종묵(김희원)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동네에서 어려서부터 아는 오빠-동생으로서 '썸'을 탔던 둘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헤어지게 됐는데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이모는 여전히 강력반장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강력반장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당장 유치장에 쳐넣으라"고 외치며 클리셰를 거부한다. 2회 이모의 빨간색 형광 입술 장면 등은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2회에서 초능력을 쓰면 탈모가 일어난다는 암시는 특히 배꼽을 잡게 하는 대목이다. 봉예분은 유성우에 맞던 날 소 옆에 같이 있던 소 주인 전광식(박노식)도 초능력이 생겼다는 말에 자신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 광식이 모자를 벗자 휑한 정수리가 드러나고, 초능력의 부작용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봉예분은 패닉에 빠진다. 이 장면에선 너무 웃겨서 거의 실신할 뻔했다. 미혼여성으로서 탈모보다 더 두려운 게 어디 있겠는가. 매우 원초적이며 몇 번이나 우려먹은 유머 코드인데도 탈모는 웃음 생산에 상당히 효과적이다. 이것 역시 외모에 대한 차별적 묘사라면 할 말이 없지만, 초능력을 쓰면 탈모가 된다는 것은 설정은 아주 그럴듯하게 다가온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4회에서 엉덩이를 얼마나 어떻게 터치하느냐에 따라 초능력의 한계가 달라진다는 설정은 그 디테일함 때문에 또 한 번 웃음을 자아낸다.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을 것 같은 김선우(엑소 수호)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신통력을 잃어버린 박수무당 박종배(박혁권)와 무진의 국회의원 차주만(이승준)의 이야기에도 웃음과 긴장의 잠재력이 배어 있다.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수의사를 소재로 과연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처음엔 의구심이 들었다. 스릴 있는 범죄 액션, 비주얼 가득한 판타지 로맨스 등 강력한 장르와 소재에 길들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맹물' 같은 배경 속 시골 마을 수의사의 요상한 초능력이 갈수록 궁금해지고 있다.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또 언제 웃음을 줄지 기대를 갖게 한다.
도대체 누가 이런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찾아보니 '역시나'다. 4년 전 '눈이 부시게'로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했던 김석윤 PD가 연출하고 이남규 작가가 대본을 썼다. '눈이 부시게'는 평범함 속에서도 빛나는 감동과 반전의 스토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물론 그 중심에 있던 주인공 역시 한지민이었다. 세 사람이 다시 뭉쳤으니 뭐라도 이뤄지지 않을까. 21일 4회까지 진행된 가운데 시청률은 최고 7%까지 치솟았다. 앞으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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