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락치가 됐고, 그들은 부역자가 됐다 [본헌터⑰]

고경태 기자 2023. 8. 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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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픽션 : 본헌터⑰] 잊혀진 아산의 거물
고향의 대학살 비극을 닮은, 끝내 재기하지 못한 어느 정치인의 이야기
용길은 1967년에 총선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국회 프락치 사건에 걸려 구속과 재구속을 되풀이한 이후 재기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용길이다.

나는 아산 사람이다. 아산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충무공이다. 12살을 전후로 어머니의 고향인 아산에 내려와 터전을 삼고 살았다고 한다. 나는 1912년 충남 아산 탕정면에서 태어나 온양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로 가 배재고보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성균관대 교수를 역임했으니, 일제 강점기에 나름 괜찮은 스펙을 쌓은 셈이다. 충무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후대 사람들이 나를 ‘한국 근현대 아산의 인물’ 중 하나로 인정해주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은 1948년 5·10 선거에서 같은 아산 출신 대선배 보선(1897~1990)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일이다. 당시 아산의 군민들은 대지주 집안의 초엘리트 보선이 아닌, 젊고 패기 넘치는 나를 선택했다. 보선은 “이제 아산 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도 보선은 이승만 정부 아래서 서울시장과 상공부장관을 했고, 1960년 4.19 직후엔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을 지냈다. 총리가 실권을 지닌 내각책임제 아래서였고, 이듬해 5·16 쿠데타가 일어나며 금방 물러났지만 말이다.

나는 보선을 꺾고 서른 여섯에 제헌의회 국회의원이라는 영광을 얻었으나, 이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형극의 길을 걷고 무너졌다. 비운의 정치인이자 잊힌 거물이 되었다. 그것은 한국전쟁기에 아산을 휩쓴 대학살의 광풍을 닮았다. 나 용길과 아산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는 무소속 소장파 의원으로서 치열하게 정치 활동을 했다. 그 중 하나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특별검찰관으로 선출된 일이다. 반민특위의 뿌리는 ‘반민법’(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다.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과 함께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하게 했다.

또한 일제치하에서 고등관 3등급 이상 등을 지낸 관공리 또는 헌병을 공무원에 임용할 수 없게 한 이 법은 1948년 9월 국회를 통과했다. 때를 같이 하여 국가보안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반민특위는 1차로 적극적 친일 기업인 흥식을 검거했다. 이때 알았어야 했다. 승만과 친일세력은 이를 방해할 뿐 아니라 때려잡을 것임을. 1949년 6월6일 나는 을지로의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한 서울시경찰국 산하 중부경찰서 경찰관들에 의해 무장해제됐다. 6월26일엔 ‘외군(외국군) 철퇴 요청에 관한 긴급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그리고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엮인다. 연희전문 때부터 교회 유년부 주일학교 부장을 하며 기독교 신앙을 키워온 내가 남로당 프락치라니. 외국 군대 철수 주장은 북한의 지령이 아니라 민족독립의 원칙으로서 주장한 거였다.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들이 궤멸되고 반민특위는 와해된다.

1949년 6월16일 서울시경찰국 형사대 형사들은 개성역(당시 개성은 경기도 소속)에서 ‘남로당 중앙당부 월북문건 연락원’이라는 재한을 미행해 붙잡았다. 재한은 40대 여성으로 하얀 한복을 입은 광우리장사 행색이었다. 이 여성을 붙잡아 변소에 들어가 용변을 누게 했는데 자신의 음부를 주무르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길래 왼쪽 손목을 잡아당기자 조그만 아이스캔디 모양의 무엇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고 했다. 거기서 나왔다는 것이 ‘남로당 국회프락치부의 국회 내 투쟁보고서인 3월분 국회공작보고’라는 문건이다.

투쟁보고서와 함께 암호해독표까지 40~50면에 이르는 종이에 모래알보다 더 작은 글씨가 써 있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조선판 마타하리, 삼팔선상의 마돈나는 꽃같이 아리따운 요부가 아니고 나이조차 마흔두살 꼭두머리가 더러 빠지고 차림차림이 허수룩한 중년부인”이라 묘사했다. 6월21일부터 여기에 연루됐다는 국회의원이 줄줄이 잡혀들어간다. 나는 8월14일에 마지막으로 구속되어 다음해인 1950년 3월 1심에서 징역3년을 받는다. 그러나 항소심을 하기도 전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진다.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7월6일 평택을 거쳐 7월8일 천안으로 들어온다. 수원-평택-천안으로 이어지는 1번국도에서 국군제17연대와 주일미군 제24사단34연대는 맥을 추지 못하고 후퇴한다. 인민군은 아산 음봉면 삼거리와 동암리를 경유하여 천안으로 들어왔다. 국군과 경찰은 후퇴하면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한다. 아산에서도 300명이 넘는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이 황천길의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스터리다. 주변 시나 군에서 모두 경찰에 의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있었으나, 아산은 비껴갔다. 천안과 아산에서 경찰이 철수한 날은 7월7일이었다. 당진, 예산, 서산, 태안 등 이웃한 곳에서는 7월12일 철수했다. 공주는 7월13일, 홍성은 7월14일이었다. 천안과 아산은 5~6일이나 빨랐다. 천안에서는 군경이 보도연맹원으로 추정되는 22명을 평택으로 데려가 죽이려다 미군에게 무장해제돼 돌아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천안에서 민간인을 사살하면 민심의 동요가 우려돼 평택까지 가서 죽이려고 했다. 이들은 22명을 다시 천안으로 후송하여 처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산은 그런 기록조차 없다. 경찰이 너무 빨리 철수해서일까, 아니면 군경이 전술적으로 포기한 지역이어서였을까. 아산 사람들에게는 행운이었다.

나도 행운을 얻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전쟁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렸다. 다들 만세를 부르며 나갔지만, 나는 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잡아넣은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찌 나갈 수 있겠는가. 나는 꽉 막힌 사람이다. 동료들은 나를 억지로 끌고 나왔다. 그 뒤 경기도 고양군(현 고양시)의 한 시골에 은거했다.

고향 탕정 면사무소를 북한 노동당 간부들이 접수한 때는 7월20일이다. 각 부락마다 인민위원회가 구성됐다. 미군 폭격기가 천안 시내를 폭격했고, 아산에서 미군의 기총사격으로 30여명이 죽기도 했다. 좌익들의 인민재판으로 인한 희생자도 속출했다. 1950년 9월3일경 탕정면에서 면장을 하던 찬우가 밧줄로 목이 매어 죽임을 당한 일이 대표적이다. 아산에서 100명 이상 이렇게 죽었다. 300명이 죽었다는 말도 있다.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떠나고 기세등등하던 좌익들과 핵심 부역자들은 북한으로 올라갔다. 보도연맹 학살이라는 파도를 운좋게 피한 아산에 더 큰 쓰나미가 밀려왔다. 부역 혐의 딱지를 붙인 인간 사냥이 시작됐다. 두 손이 묶인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서 성재산으로, 설화산으로, 탕정지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 안에는 여성도, 젖먹이도 있었다.

나는 서울 수복이 된 9월, 일부러 검찰청을 찾아가 법에 따라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검찰청장은 재수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제서야 시민증을 발부받았다.

그런데 11월 초순경 군경합동수사본부가 나를 다시 체포했다. 12월 중순엔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의원은 나 하나 남았다. 문원, 태규, 구수, 일환, 욱중, 옥주, 병회, 윤원, 윤호, 약수, 중혁, 경모, 성균, 봉두. 동지들은 모두 월북하거나 납북되었다.

1.4후퇴가 한창이던 1951년 1월에는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다. 여기서 검찰은 25년형을 구형했다. 맙소사. 고향 아산에서는 대학살이, 나에게는 대형량이…. 다행히도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승만에게 한국전쟁은 거대한 청소의 시간이었다. 눈엣가시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모략해 이땅에 머물지 못하도록 했다.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1992년 눈을 감아 원통할 뿐이다. 구속의 칼날을 피한 국회의원들은 전시에 ‘사형금지법안’(私刑禁止法案)등을 제안하며 폭주하는 승만의 정부를 견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상처받고 외롭게 남은 나는 재기할 수 없었다. 1952년부터 1988년까지 선거에 출마했지만 떨어지기만 했다.

아산에서 꿈을 꾸던 고향 사람들도 한동안 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너무 많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였으니까.

<다음 회에 계속>

※ 이 글은 ‘한국 근현대 아산 사람들’(조형열 지음,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보고사, 2012)과 ‘법률가들’(김두식 지음, 창비, 2018), ‘동산리지’(류한영 편저),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규명보고서 ‘충남 국민보도연맹 사건(2)’ 등을 참고해 서용길 전 제헌의원의 시점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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