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오만의 대가를 치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MD칼럼]
3시간동안 펼쳐지는 지적인 스펙터클
[곽명동의 씨네톡]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점령한 것도 ‘이야기하는 능력’ 덕분이다. 신화(myth)라는 말의 기원이 된 그리스어 뮈토스(muthos)는 ‘이야기’를 뜻한다. 신화는 상상적 이야기 방식으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신화는 ‘황당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과학’에 밀려났다. 과연 과학의 세계에서는 신화의 작동원리가 통용되지 않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신화가 현대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중력으로 인간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원작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자, 헤파이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훔쳐 속이 빈 풀 속에 불씨를 넣은 후 인간에게 전해준다.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강력한 쇠사슬로 묶고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벌을 받도록 만든다. 평전의 저자들은 인간에게 ‘핵폭탄’을 전해준 오펜하이머의 삶을 프로메테우스에 빗댄다. 단순히 불을 건넨 것만으로 신화를 호출한 것은 아니다. 거기엔 ‘오만과 징벌’의 서사가 녹아있다.
그리스 신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오만한 인간이 벌을 받는 것이다. 신들은 오만한 인간을 용서하지 않았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는 루이스 스트로스 제독(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으로 은연중에 오만을 드러낸다. “당신은 미천한 구두쟁이 출신이군요”라는 말을 들은 스트로스의 심기가 편할리 없다. 대중 앞에선 스트로스의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점을 무례하게 꼬집어 그의 분노를 자극한다. 오펜하이머는 똑똑한 과학자들에게는 우호적이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플롯의 마술사’ 놀란 감독은 이 둘의 삶을 맞세워 3시간 동안 지적이면서도 공포스러운 스펙터클을 펼쳐낸다. ‘핵분열’ 오펜하이머의 삶은 컬러로, ‘핵융합’ 스트로스의 삶은 흑백으로 대비시켜 치열한 대화와 논쟁을 발판삼아 가공할만한 폭발력을 담아냈다. 오펜하이머가 자주 하는 말 중의 하나는 ‘연쇄반응’(Chain reaction)인데, 이는 핵폭발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이 둘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오펜하이머의 모욕을 받은 스트로스는 시기와 질투심에 휩싸여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졸렬한 대응으로 일관하다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
오펜하이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데 앞장선 지휘자였다. 나치보다 먼저 핵폭탄을 만들어야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천재 과학자들을 끌어모아 단 3년만에 제조했다. 더 강력한 효과를 내기 위해서 더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야한다고 주장한 것도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뒤늦게 반성하고 더 위력적인 수소폭탄 개발은 막아야한다고 역설하다 미국 정치권의 미움을 받아 나락으로 떨어진다.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을 만들었던 그는 핵 확산을 반대하는 ‘좌파 지식인’으로 몰려 바닥으로 추락한다.
프로메테우스처럼 그도 오만을 부리다 징벌을 받았다. 둘은 독수리(매카시즘)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에 시달린다. 놀란 감독은 “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관객을 그의 감정적 여정 속으로 안내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오펜하이머 내면에서 끝없이 핵분열하는 고민과 갈등의 연쇄반응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청문회에서 그를 잔인하게 쪼아대는 미국 정치인들의 공격적인 질문 역시 핵폭탄급이다. 오펜하이머는 그 모든 공격을 다 받아내고 참아낸다. 그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오만의 대가를 치렀다.
신화는 인간이 현실세계와 맺는 상상적 관계의 방식 중 하나다. 대개는 비극적이다. 현실의 오펜하이머와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겹친다. 천재 과학자도 신화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화는 놀랄만큼 현실적이다. 과학이 신화를 밀어냈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럴수록 신화는 과학을 나포하고 집어삼킨다. 신화적 경험은 과학보다 앞서있다. ‘불의 정신분석’으로 유명한 가스통 바슐라르의 혜안은 얼마나 탁월한가.
“인간은 현실로부터 은유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유로부터 현실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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