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흔든 판결] 교사의 학생 체벌은 유죄?…학교 발칵 뒤집어놓은 법원
교총 “교단 황폐화할 것” 반발
진보 교육감들의 ‘학생인권조례’…2011년 법 개정으로 학생 인권 강화
1990년 어느 날, 형사 사건 판결을 앞두고 있던 안우만 당시 대법관(제44대 법무부장관)에게 서한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국민학생(현 초등학생)에게 체벌을 가해 기소된 20대 여교사 김모씨를 선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교총은 교권옹호기금을 털어 교사의 소송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대법원이 김씨의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벌금 30만원형을 선고한 것이다. 교사들은 “체벌 교사에 대한 유죄 선고는 학생과 교사 간 인화(人和)를 해치고 교단을 황폐화할 것”, “교육적 차원에서 체벌하는 교사를 처벌하면 교단의 활력이 약해질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초등학생이 교사를 때려 부상 입히는 2023년 현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해당 판결은 교단을 그야말로 뒤집어 놓았다. 이전까지 줄곧 교사의 체벌은 합법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971년에는 경남 함안의 한 중학교 교장이 통행금지를 위반한 학생 7명을 사흘 간 꿇어 앉히고 구타했음에도 무죄를 선고 받았다. 1974년에는 서울의 한 고등학교 체육교사가 민방위 훈련에 불참한 학생의 뺨을 때려 뇌진탕으로 숨지게 했음에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 기조가 1980년대까지도 쭉 유지됐기에, 체벌 교사의 유죄를 확정한 1990년의 판결은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안길 수밖에 없었다.
◇2심 재판부 “매질한다고 해서 좋은 점수 얻는 것 아냐” 교사에게 벌금형 선고
문제의 사건은 1988년 11월 대구 비산동에서 일어났다. 모 국민학교 교사로 일하던 김씨가 자연 과목 시험 문제 9문항 중 오답의 개수만큼 엉덩이를 때리는 체벌을 가하면서 사고가 터졌다. 김씨는 국민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양손으로 교탁을 잡게 한 다음 길이 50cm, 직경 3cm의 나무 지휘봉으로 때렸다고 한다.
학생들 중 A군은 9문항을 모두 틀려 엉덩이를 맞던 중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허리를 빗맞았는데, 이 때문에 양측 요추부 수핵탈출증을 입게 됐다. 전치 6주의 부상이었다. A군의 부모는 김씨를 경찰에 고소했고, 김씨는 벌금 30만원에 폭행치상 혐의로 약식 기소됐다. 김씨가 이 같은 처분에 불복하면서 결국 정식 재판이 시작됐다.
1심 재판부는 기존 판례들을 따라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학생들의 성적 향상을 위해 처벌을 가하다 학생이 갑자기 무릎을 굽히는 바람에 다치게 됐을 뿐이라며, 교사의 행위가 사회통념상 비난 받을 만한 게 아니라고 판시했다. 즉, 교사의 체벌은 ‘정당한 징계권’의 행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법 체계에는 교사의 체벌과 관련된 명문 규정이 없었다. 교육법 제76조에 “각 학교의 장은 교육상 필요할 때 학생에게 징계 또는 처벌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었는데, 이 조항의 ‘처벌’ 개념에 체벌까지 포함되므로 교육 목적을 위한 적절한 체벌은 합법하다고 보는 게 그 당시 우리 사법부의 태도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정반대 판단을 내놨다. 교사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벌금형을 내린 것이다. 당시 재판부는 “징계 행위가 사회상규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정당한 목적을 위한 상당한 수단이 필요하다”며 “능력이 모자라는 아이들을 매질한다고 해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는 게 아니며, 아파서 몸을 뒤틀고 구부리는 피해자를 계속 때린 건 목적과 수단에 있어 징계권의 범위를 일탈한 것이므로 사회상규에서 벗어난다”고 판시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체벌이 만연하던 교육 풍토를 지적하기도 했다. 교육의 궁극 목표는 아이들을 참되게 가꿔서 정서와 창조적 재능이 피어나도록 하는데 있지만, 오늘날 우리 교육계는 그런 목표를 잃어버리고 ‘온갖 잡동사니’ 지식만을 아이들의 머릿 속에 ‘쑤셔 넣어’ 아이들의 ‘생명을 짓밟아 시들어버리게 했다’며 거침 없는 일침을 가해 눈길을 끌었다.
결국 대법원까지 “징계의 방법 및 정도가 교사의 징계권 행사의 허용 한도를 넘어섰다”며 교사의 상고를 기각했고, 그렇게 역사적 판결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진보 교육감들, 체벌 금지 명문화…2011년엔 입법까지
이 판결은 교사의 체벌에 대한 사법부의 시각 전환을 나타내는 중요한 신호탄이 됐다. 이듬해인 1991년 대법원은 고등학생을 몽둥이와 당구 큐대로 때린 교사에게 “징계의 범위를 넘었다”며 유죄를 선고했는데, 그 과정에서 1990년의 판례를 참조했다.
1999년에는 여자중학교 체육교사가 슬리퍼로 학생의 손을 때리고 “싸가지 없는 X”라며 욕설을 해 2000년 1심과 2001년 2심, 2004년 상고심에서 모두 벌금 100만원형을 선고 받았다.
2009년에는 체벌을 한 교사가 징역형을 선고 받은 사례까지 나왔다. 교사가 초등학교 2학년생의 엉덩이를 나무 막대기로 수십회 때려 상해를 입힌 사건이었는데, 재판부는 “교사의 징계권 행사 허용 한도를 넘었다”며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이때도 1990년의 판례가 참조됐다.
체벌을 바라보는 입법부의 시각도 변화해나갔다. 1998년 3월, 교육법이 폐지되고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이 새로 제정됐는데, 이 법 제31조 7항에는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않는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명시됐다.
2010년에는 이마저도 하지 못하도록 제도가 또 다시 개정됐다. 김상곤 당시 경기도교육감이 체벌 금지를 명문화한 학생인권조례를 발표한 데 이어,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과 장휘국 전 광주시교육감 등도 잇달아 교내 체벌을 금지하고 나섰다. 그 해 8월 서울시교육청에서 곽 전 교육감이 체벌의 전면 금지를 발표하자 학교장 30여명이 반발하며 집단 퇴장하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결국 2011년 3월에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체벌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됐다. 학생의 징계 방식은 교내봉사·사회봉사·특별교육·출석정지·퇴학으로 국한됐다. 부작용은 즉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경기 지역 교사 66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4명은 “학생 지도 시 욕설을 듣거나 교권을 침해 받은 적이 있다”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한다. 학생 인권의 신장은 역으로 교권 추락의 서막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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