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고객은 왕이 아니다, 동행이다
‘아동학대’ 규정 적합한가, 원인·구조 더 깊이 파악을
고객은 왕이 아니다. 동행이다. ‘고객은 왕’이라는 표현은 지배층 위치의 자본가가 돈을 더 많이 벌려고 발명한 거짓말이다. 실제로 고객은 한 번도 왕인 적이 없다. 줄곧, 고객이 왕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 좋아져 돈을 더 많이 쓰는 소비자일 뿐이었다. 때로는 ‘호구’이거나 ‘봉’이 됐다. 그럼, 고객은 어떤 존재인가. 함께 걷는 동행이다. 고객이나, 매장에서 일하는 점주 또는 점원이나 모두 소중한 사람이고 인격체다. 고객은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소비자로서 권리를 가진다. 어쨌든 서로 예의를 지켜야 한다.
예의의 본질은 관계성에 있다. 예의는 형식이면서 관계다. 서로서로 지키는 형식을 통해 상호 존중을 표현하는 게 예의다.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 사이에서 예의는 누가 먼저 차리고 지켜야 할까. 당연히 윗사람이다. 예의는 형식이기에, 아직 경험이 적거나 연륜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그 형식을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니 윗사람 또는 경험·연륜이 있는 사람이 먼저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상대는 따라오고 함께 지킨다. 이것이 예의의 본질이 관계성인 이유다.
이런 관계성을 무시하고 형식에만 매달리면, 예의는 순식간에 허식을 넘어 일종의 ‘폭력’까지 될 수 있다. 대중교통에서 난동 부리는 빌런(악당) 영상을 보면 “이 어린 ○○ ○○!” “너 몇 살이야!” “예의 없이 감히!” 같은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게 다 예의의 본질이 형식과 관계성에 동시에 있음을 무시하고 형식에만 매달려 생긴 일이다.
최근 한국 교육계는 시끄럽고 아프고 절실하다. 추락해 버린 교권,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극단적 선택에까지 이르는 교사들의 절박한 처지와 호소 …. 이 사태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문제의 구조나 중대한 원인으로 직진해서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사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힘이 뒤따라 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일상생활에서 갈등이나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 원인·구조를 파악·개선하는 쪽으로 가지 않고 이해가 잘 안 가는 데로 불똥이 튀어 감정만 소모하거나 엉뚱한 싸움이 붙는 모습을 종종 본다. 층간소음이 온 사회에 너무 심해 많은 사람이 고통스럽다면 건물이 그렇게 지어진 구조·원인을 파악하고 건설사가 건물을 더 잘 짓는 방향을 모색하는 쪽으로 논의가 이뤄지면 좋겠는데, 이웃에 사는 개인끼리 싸웠다는 소식만 들린다. 그러다 살인까지 나곤 했다.
‘고객은 왕’이니까 매장에서 문제나 갈등이 터지면 해당 손님은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화가 난 채 담당 직원이나 최일선의 서비스 제공자부터 두들겨 잡아야 한다고 우선 생각한다. 상대방에게도 사정이 있을 수 있고 그 사람 또한 주권을 가진 인격체라는 사실은 잊힌다. 갑질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심각해진 교권 추락과 과도해진 학부모 민원 현상을 보며, ‘고객은 왕’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학교 현장에 너무 심하게 퍼져버린 게 아닌지 거듭 생각했다. 현재까지 나의 결론은 ‘그렇다’이다.
이 과정에서 더 센 방아쇠(trigger)가 등장했다. ‘아동학대’라는 낱말에 대한 개념 규정이 이상하리만치 폭넓게 이뤄진 점이다. ‘아동학대’ 개념이 대체 어떻게 규정돼 있기에 학교에서 교사가 학생을 칭찬하면 그게 ‘다른 어린이에게 박탈감을 주는 아동학대가 될 수 있다’는 주장·민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오십대 나이의 기성세대인 나는 잘 모르겠다. 좀 어리둥절하다.
어떤 학생에 대한 칭찬이 다른 학생에 대한 박탈감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좀 더 신중히 행할 필요가 있다는 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는 그에 걸맞은 규정이 이뤄져야지, 그것을 ‘학대’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한가? 나는 동의가 잘 안된다. 다른 용어나 더 알맞은 낱말이 필요하다고 본다. ‘학대’를 더 적극적인, 의도된 행위로 이해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최근 교사단체와 교사 개인이 활발하게 교권 침해 사례를 알린 터라,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이 들 수 있다. 교사들은 “개입하면 아동학대, 놔두면 직무유기”라며 힘겨워한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정명(正名)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알맞은 이름을 찾는 노력을 멈추면 더 큰 혼란이 올 수 있음을 ‘논어’는 강조한다. 자칫하면 손해 볼 수 있는 세상이니 고객이든 학부모든 더 민감해지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 말고는 없다.
거듭 생각해도, 고객은 왕이 아니라 동행이며 예의의 본질은 형식에만 있는 게 아니라 관계성에 있다. 학부모-교사의 관계는 단지 물건과 서비스를 사고파는 고객-상인의 관계와는 물론 다르지만, 이와 같은 원리는 충분히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조봉권 부국장 겸 문화라이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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