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준비된 작별
나는 아직도 아버지 기일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봄이었는데, 봄볕이 따뜻한 날이었는데 대관령을 넘는 길은 뼛속까지 아릴 정도로 추웠다. 그래서 몸은 그날을 겨울이라고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봄이 되면 언제나 몸이 아프다.
아버지는 암이었고, 이미 마지막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돌아가시던 날, 아침에 꿈을 꾸었다. 꿈에서 할아버지가 나타나 오늘 아버지가 죽는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울며 악을 쓰다 잠에서 깼다. 꿈 때문에 온종일 우울했다. 귀가 시간을 늦추려고 필요하지도 않은 운동화를 사며 친구들을 길에 잡아두었다. ‘이젠 집에 가야 해’라는 친구들 말에 새 운동화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병원으로 빨리 와’.
메모지를 손에 들고 깜깜한 현관에 오도카니 있다가 운동화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오래 아주 천천히 새 운동화에 끈을 꿰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얕은 숨을 겨우 쉬고 있었다.
“봐요. 막내가 왔어요.” 옆에 서 있던 이모가 아버지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아버지는 안간힘을 쓰며 사그라지는 시간을 늦추고 있었다. 어머니는 물끄러미 새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장례 기간 내내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우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는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친척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나를 보고 수군거렸고, 졸다 깨다 반복하는 나를 향해 오빠는 거칠게 소리쳤다. “야, 정신을 차리든가, 들어가서 자.” 친척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오빠의 날 선 말에도 졸음은 달아나지 않았다.
발인이 있던 날, 날은 화창했다. 날이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대관령은 지독하게 추웠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화창한 날씨,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 그리고 침묵.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장지에서 돌아온 가족은 방에 흩어져 잠들었다. 잠깐 잠에서 깨었던 것 같은데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언니는 대학 기숙사로 돌아갔고,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오빠는 과실에서 작업하느라 밤을 새웠다. 어머니는 빈집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오빠가 방에 있는 언니와 나를 부른 것은 장례식이 있고 난 뒤 몇 주일 후였다.
“안방에 좀 가봐. 엄마가 이상해.”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가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하고 있었다. 원피스를 꺼내 입고, 다홍색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있었다. 평소에 화장도 잘하지 않았고, 원피스도 즐겨 입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어머니 옆에 가서 앉았다.
“엄마, 뭐 해?” “어. 일하러 나가려고.” 직장을 다니던 사람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해가 진 저녁이었다. “엄마 지금은 저녁인데. 봐. 해가 졌잖아.” 어머니는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어깨가 스르륵 가라앉았다. 어머니를 다독여 잠자리에 들게 했다. 시간은 또 괜찮은 것처럼 지나갔다. 별일 없이.
무더운 여름 새벽이었다. 잠에서 깼다.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가슴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빠. 아빠.” 베개를 입에 물고 길고 긴 울음을 토해냈다. 그때 알았다. 슬픔이 모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건 아니라는 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통점을 무디게 만든다는 걸. 통점이 회복되면 슬픔은 말을 건다. 많이 힘들지.
우리 가족은 이미 아빠가 죽게 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짐작하고 있는 것과 실제 하는 것은 다르다.
세상에 준비된 작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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