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전관업체와 맺은 648억 규모 계약 전면 백지화
대규모 철근 누락 사태 이후 전관 특혜 논란에 휩싸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철근 누락 발표 이후에도 전관 업체와 체결한 648억원 규모의 용역 계약을 전격 해지하기로 했다. 또 전관 업체가 설계나 감리 용역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정부는 건설 분야 이권 카르텔 혁파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10월 발표할 계획이다.
국토교통부와 LH는 20일 서울지역본부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의 ‘LH 전관 카르텔 철폐 방향’을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LH 비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전관 업체의 용역 참여 배제는 물론,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다른 곳으로 이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관 개입한 용역 648억원 계약 취소
LH가 철근 누락 단지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한 지난달 31일 이후 현재까지 전관 업체와 체결한 설계·감리 용역 계약은 총 11건, 648억원 규모로 파악됐다. 설계 공모가 10건(561억원), 감리 용역이 1건(87억원)이다. LH는 계약 시점에 제출된 임원 확인서와 용역 업체와의 통화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한준 LH 사장은 “법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으나, 국민의 전관 배제 여론을 고려해 해당 계약을 전면 취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난달 31일 이후 입찰을 공고했거나 심사를 진행 중이나, 아직 낙찰자를 선정하지 않은 설계·감리 용역 23건(892억원)은 공고를 취소해 후속 절차를 중단하기로 했다. LH는 전관 업체 입찰 배제를 위해 내규를 개정한 이후 취소된 용역을 재추진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토부는 퇴직자를 보유하지 않은 업체에 심사 과정에서 가점을 부여하고, 입찰 시 퇴직자 명단 제출을 의무화하는 방안은 즉시 시행하기로 했다. 또 기획재정부 특례 승인을 거쳐 전관 업체가 설계나 감리 용역에 참여하는 것을 원천 배제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최근 5년 내 LH와 설계·감리 계약을 맺은 업체를 전수조사해 퇴직자 및 전관 업체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고, LH 퇴직자가 취업 시 심사받아야 하는 기업의 범위도 기존 ‘자본금 10억원 이상, 매출 100억원 이상’에서 넓히기로 했다.
◇”막대한 권한 외부에 이양해야”
LH는 2009년 출범 직후부터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후에도 비리 사고가 터질 때마다 근절 대책을 냈다. 하지만 14년이 지나도록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조직 자체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며 “LH는 핵심 사업인 주거 복지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업무는 과감하게 정부, 지자체나 민간으로 넘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비대한 조직과 광범위한 업무 범위 탓에 직원들에 대한 통제가 어렵고, 토지 수용과 용역 발주 등 막강한 사업 권한을 쥐고 있어 전관 로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LH 혁신안을 마련 중인 정부도 LH 조직의 구조적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H 조직의 가장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지나치게 넓은 사업 영역이 꼽힌다. 공공 기관 경영정보공개시스템 ‘알리오’에 LH가 등록한 사업 항목은 14개로, 직원이 LH의 거의 4배인 한국철도공사(6개)의 두 배가 넘는다. 실·본부급 부서도 LH는 14개로 한전(10개)·철도공사(11개)·한수원(12개) 등 직원 수 기준으로 ‘톱 3′ 공기업보다 많다.
조직 구조도 비효율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2009년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 통합 당시 정부는 구조 조정을 추진했지만, 노조 반대로 흐지부지됐다. 문재인 정부 때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2016년 6638명이던 직원은 2020년 9643명으로 급증했다. 경쟁 관계였던 두 공기업을 통합하다 보니 토지공사 출신인 ‘L’과 주택공사 출신 ‘H’ 간 갈등도 많았다. 전직 LH 직원 A씨는 “통합 직후에는 직원들끼리 말도 안 하고 노조도 따로 있었다”며 “지금도 승진 과정에서 같은 공사 출신을 챙겨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여전하다”고 말했다.
LH의 권한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간 소유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토지를 강제 수용해 택지로 용도를 바꾼 뒤 아파트를 지어 분양까지 한다. 또, LH에서 연간 발주한 사업 규모는 작년 기준 9조9000억원으로 1위 건설사인 삼성물산의 국내 수주액(9조3737억원)보다 많다. 이렇게 막강한 이권을 휘두르다 보니 기업들이 전관을 동원해 LH 직원이나 심사위원들에게 로비하는 카르텔이 형성됐다는 평가다. 이창무 한양대 교수는 “LH 비리의 근본 해결책은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는 것”이라며 “토지 개발은 국토부에 넘기거나 주택청을 신설해 공무원들이 맡도록 하고, 각종 발주 업무는 민간 협회 등 전문가 집단에 이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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