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잠'의 세계에 빠져들 시간(종합)

조연경 기자 2023. 8. 2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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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충무로를 이끌 감독들이 속속 등장하는 모양새다. 꼼꼼하고 디테일한 영화적 완성도와 작품에 대한 애정. 한국 영화의 질적 향상이 일부 매너리즘에 실망한 관객들의 마음을 다시금 달래주지 않을까. 칸이 먼저 알아 본 '잠' 역시 가을 스크린 복병이 될 자질을 충분 이상으로 갖췄다.

제76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초청작으로 현지에서 최초 공개됐던 영화 '잠(유재선 감독)'이 내달 6일 국내 개봉을 확정 짓고 지난 18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국내에서도 베일을 벗었다. '잠'은 행복한 신혼부부 현수와 수진을 악몽처럼 덮친 남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과 함께 잠드는 순간 시작되는 끔찍한 공포의 비밀을 풀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유재선 감독의 첫 상업 장편 영화 데뷔작으로, 네 번째 호흡을 맞춘 정유미 이선균의 열연이 빛난다.

영화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인 잠이라는 소재에 수면 중 이상행동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더해 섬뜩한 공포를 선사한다. 잠드는 순간 마치 낯선 사람처럼 돌변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예측불가 행동을 벌이는 남편 현수(이선균). 그로 인해 잠들지 못하고 불안에 떠는 아내 수진(정유미)은 한 공간에 살면서 가장 신뢰하는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하는 과정 속 피할 수 없는 공포를 마주하게 된다. 현실적인 소재와 유니크한 콘셉트가 한국 영화의 장르적 신선함에 대한 새 기준점을 전한다.

21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칸 에스파스 미라마 극장에서 '제 76회 칸 국제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비평가주간 '잠' 시사회가 열렸다. 유재선 감독과 배우 정유미, 이선균, 전혜진이 참석했다. 칸(프랑스) 박세완 엔터뉴스팀 기자 park.sewan@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유재선 감독은 "몽유병에 대한 피상적인 관심이 있었다. 증상이 심해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자극적인 소재가 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몽유병 환자의 일상을 그리면 어떨까' 궁금증이 생겼다. 더 나아가 몽유병 환자보다 그 가족의 일상에 시선이 갔다"며 "보통 장르 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주된 이야기의 구조인데 저희 영화는 공포나 위협의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지켜주려 한다는 점이 차별점이자 흥미로운 지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유재선 감독의 첫 번째 철칙은 다름 아닌 '재미'였다. "'잠'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준비를 하고, 촬영을 하고, 후반 작업을 하면서 제1의 철칙은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들자'였다"고 강조한 유재선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당시 실제로 오랜 여자친구와 결혼이 임박했던 시기였는데, 제가 결혼에 대해 가졌던 화두들이 시나리오에 그대로 담겼다. 올바른 결혼 생활이란 무엇이고, 결혼한 부부는 문제가 닥쳤을 어떻게 해결 하는지 많이 녹여내려 했다. 관객 분들은 제 결혼관에 동의해주실 필요도, 알아차려 주실 필요도 없지만 그런 화두에 대한 대답을 얻어내고자 무의식적으로 쓴 시나리오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영화를 세 개의 장으로 나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각 장 사이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그 사이 큼직한 일들이 발생한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추측하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싶다. 집이 한정된 공간이라 시각적으로 일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각 장마다 상황에 맞게, 인물들의 심리에 따라 변화를 줘 보는 재미를 높이려 했다"며 "영화가 끝나도 이야기가 지속된다는 전제 하에 수진과 현수 역시 이 사건을 돌아볼 것 같다. 자신이 맞는지, 상대방이 맞았는지에 대해. 롤러코스터 같은 이 영화를 보고 관객 분들도 서로 어떻게 해석했는지, 누가 맞는 것인지 대화가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다"고 어필했다.

21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칸 에스파스 미라마 극장에서 '제 76회 칸 국제영화제'(Cannes Film Festival) 비평가주간 '잠' 시사회가 열렸다. 유재선 감독과 배우 정유미, 이선균, 전혜진이 참석했다. 칸(프랑스) 박세완 엔터뉴스팀 기자 park.sewan@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유재선 감독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옥자' 연출부, '버닝'의 영문 자막 번역 등 영화계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아 왔다. 이에 일명 '봉준호 키드'로 주목 받으며 첫 작품에 대한 영화계의 관심 어린 시선을 받았던 바, 앞서 봉준호 감독은 '잠'에 대해 "최근 10년 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 영화이자 스마트한 데뷔 영화다. 가장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서 예측 불가능한 커플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나는 관객들이 아무런 정보 없이 스크린 앞에서 이 영화와 마주하기를 바란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 영화'라는 칭찬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는 유재선 감독은 "다만 봉준호 감독님은 닮고 싶은 롤모델이기 때문에 제 영화를 보기만 하셨어도 뛸 듯이 기뻤을 것 같은데 호평까지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며 "감독님께서 '끝까지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아 좋았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두 배우의 열연에도 감탄하시더라. '소름 돋는다' 아니면 '미쳤다'고 하셨던 것 같다. 또 감독님께서도 '엔딩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감독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누설하지 말라'는 팁을 주셨다. '관객의 재미를 박탈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귀띔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번 작품에서 정유미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남편 현수의 수면 중 이상 행동을 마주하면서 가장 신뢰하던 존재가 매일 밤 끔찍한 위협을 가하는 대상으로 변하게 된 공포스러운 상황에 처한 아내 수진 역을 맡아 극과 극 감정선을 통한 연기의 개연성을 증명해내며 놀라움을 선사한다. 정유미는 "감독님께서 그날 찍어야 할 것들을 알려주셨다. 감독님 머릿속에 있는 생각대로 연기하고 싶었다"며 "난 개인적으로 감독님이 '어떻게 연기해줬으면 좋겠다'고 할 때가 좋다. 유재선 감독님은 명확하게 이야기 해주는 분이었다"고 단언했다.

정유미와 이선균과 홍상수 감독 영화 '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우리 선희'(2013)에 이어 무려 네 번째로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정유미는 "세 번 함께 했지만 촬영 회 차가 많지 않아 '오래 만나는 장편 작품에서 꼭 호흡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선균 배우가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런 배우와 같이 연기한다는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영광이었다.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는 진심을 표했다.

이선균은 "홍상수 감독님 작품에서는 일상적인 상황을 연기하다 보니 정말 편하게 호흡을 맞췄다. 10년 전부터 '기회가 주어지면 장르 영화에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그 기회가 저희에게 주어져 즐겁게 촬영했다. 감독님도 우리의 일상 연기를 보시고는 '현실에 붙어있는 연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신 것 같다"고 거들었다.

이선균은 연극 배우 출신으로 방송에서 막 눈도장을 찍기 시작한 현수로 분해 반수면 상태에서 기이한 행동을 펼친다. 날고기, 생선, 날달걀 등 눈에 보이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입 속에 욱여 넣는 이른바 냉장고 폭식 장면은 가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높인다. "소품이 아닌 진짜 음식이었다"고 말한 이선균은 '고래사냥'에서 안성기 선배가 생닭을 먹는 장면을 참고했는데 내가 그런 장면을 찍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기괴하게 보이고 싶었는데 결과를 보니 만족스럽다. 감독님이 더럽지 않게 찍어줘서 다행이다"라며 웃더니 "위생 상태가 좋은, 아침에 장을 봐 온 재료들을 먹었다. 생선도 무척 신선했다. 혹시 질길까 스태프 분들이 절인 생선을 준비해 주셔서 문제 없었다"고 회상했다.


또 "나도 단역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무명 배우로 설정 된 현수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사실 저는 지금도 제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잘 못 본다. 영화에 제 작품을 모니터링 하는 신이 있는데, 촬영하면서 대본에는 없었던 반응이 나왔다. 신인 시절 제가 했던 것들이 떠올랐던 것 같다. 숨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메소드 연기의 비화를 전하기도 했다.

'잠'은 칸영화제 뿐만 아니라 최근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판타스틱페스트 등 전 세계 유수 영화제들의 러브콜을 쉴 새 없이 받고 있다. 스릴러와 공포의 경계에서 작품성 높은 결과물이 국내 관객들에게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주목된다.

조연경 엔터뉴스팀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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