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의 사적 요새, 아파트를 ‘삐딱하게’ 살펴보다[한국 사회를 읽다/박해천]
아파트의 실내 공간이 사적인 요새로 기능하는 셈인데, 이 공간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일까? 그 연혁(沿革)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하던 1970년대 중후반의 서울 강남으로 향해 보자.
이 시기에 아파트 거주를 시작한 중산층 주부들은 부엌과 식당을 주방으로 통합해 가사노동의 공간을 현대화하는 일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에게 지원군 역할을 한 것은 조리대, 개수대, 수납장을 일체화한 시스템 키친이었다. 한편 거실은 텔레비전과 소파의 도움을 받으며 극장의 형태로 제 모습을 갖춰 나갔다. 한쪽 벽면에는 텔레비전이 자리 잡고, 반대편에는 소파가 놓였다. 한옥의 대청마루나 양옥의 응접실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이처럼 거실과 주방이 만들어 내는 ‘현대적 문화생활’의 경관은 중산층 가족의 정체성이 투사되는 스크린의 역할을 담당했다. 중산층이 된다는 것은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바탕으로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가족의 정체성을 바로 이 실내 경관을 통해 표현할 줄 아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시기에 “남부럽지 않은 삶”에 대한 욕망은 아파트 실내 공간에 무엇을 어떻게 채워 넣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는 ‘3저 호황’을 근간으로 본격 소비사회로 진입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아파트는 이제 중산층 문화의 표준적인 주거 모델로 자리 잡았다. “주택 200만 호 건설”의 구호 아래 등장한 수도권 신도시와 지방 신시가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수많은 베이비붐 세대의 젊은 부부들이 그리 어렵지 않게 “내 집 마련”의 욕구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보통 사람들”이 아파트 보유를 통해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렇게 사반세기에 걸쳐 전국 각지로 확산되던 아파트의 실내 공간은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이전과는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20세기가 황궁아파트의 전성기였다면, 21세기는 드림팰리스가 우세종으로 급부상하는 시대였다. 수출 대기업 중심 경제 체제 본격화와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 폭등세로 중산층의 양극화가 가시화되자 아파트 역시 양극화 흐름에 올라탔다. 먼저 래미안, 자이, 캐슬, 힐스테이트 등 대기업의 아파트 브랜드들이 “당신의 이름이 되겠다”며 강남을 비롯해 전국 주요 지역에 고급 대형 아파트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지펠, 디오스, 하우젠, 트롬, 휘센 등 고급 가전들이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하겠다며 속속 출시되었다. 바야흐로 상위 중산층을 고객으로 상정한 ‘자칭 명품’의 시대였다. 거실은 브라운관 대신 액정표시장치(LCD) 디스플레이를 장착한 납작한 대형 텔레비전과 함께 몸집을 불려 나갔고, 주방은 양문형 냉장고, 김치냉장고, 드럼 세탁기로 중무장을 하고 아일랜드 작업대를 배치했다. 상위 중산층의 주부들 역시 자기 계발, 자녀 교육, 재테크에 능숙한 가정 경영의 전문가로 변신을 시도했다. 공간이 바뀌니 그 안의 사람도 바뀌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결말부, 카메라는 대뜸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장면을 보여준다. 대리석 벽면과 대형 텔레비전, 그리고 소파로 치장한 멀쩡한 아파트 거실의 모습이다. 부부와 그들의 자녀가 현관문을 열고 등장해 웃는 얼굴로 각자의 배역을 연기한다면, 곧바로 중산층 가족의 행복한 일상을 펼쳐 보일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영화는 화면을 90도 회전시키며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실제는 대지진으로 땅 위에 드러누운 아파트의 실내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직으로 기울어진 공간으로 생존자들이 걸어 들어온다.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베란다 창은 그들에게 출입구가 되어준다. 앞서 살펴본 아파트 실내 공간의 변천 과정을 떠올려 본다면, 혹시 영화는 대재난 장르가 지닌 파국의 상상력을 빌려서 정작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바로 이 실내 공간의 해체와 재구성이야말로 중산층의 확대 재생산이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에 새로운 형식의 삶을 모색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말이다.
박해천 동양대 디자인학부 교수·‘콘크리트 유토피아’ 저자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빚내서 주식 투자 20조… G2發 금융불안 속 과열
- [정용관 칼럼]이승만도 김구도 獨立과 建國의 아버지들이다
- 韓, 내년 상반기 한미일 2차 정상회의 개최 추진
- [단독]권익위 ‘지급 금지’ 권고에도… LH, 징계 퇴직자에 ‘명퇴 수당’
- “한미일, 나토식 집단안보 진화 가능성… 한일 입장 차이는 변수”
- 기시다, 오염수 배출구 등 첫 시찰… 방류시점 내일 결정
- 한미, 전면남침 대응 UFS 오늘 시작… 北허위정보 차단책 반영
- 대법원장 후보 이균용-조희대-이종석 압축… 尹, 이르면 주초 지명
- [파워인터뷰]“진짜 영재 부모들, 학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해”
- “등산로 사람 보면 흉기없나 살펴”… 잇단 흉악범죄에 시민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