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통합’이었다는 L과 H…철근 누락 사태의 근본 원인일까

심윤지 기자 2023. 8. 20.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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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적 병폐’ 드러난 통합 14년 LH, 건강한 조직 거듭나려면…
경기 오산시에 위치한 한 LH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지난 3일 철근 누락 보강공사를 위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이한준 사장 “내부적 자정 능력 상실했다” 강력한 조직·인적 쇄신 예고
과거 임직원 땅투기 등 사건 때마다 약속했던 ‘조직 슬림화’ 실패만 반복
“충분한 소통으로 중장기적 해법 찾을 때” 충격 요법 부작용 우려 시선도

“LH가 왜 이렇게 되었나 제 나름대로 살펴보니, 2009년 ‘주공’과 ‘토공’이 통합됐지만 내부적으로는 그 존재가 그대로 살아있었습니다. 조직이 비대해졌고 자리 나눠먹기가 이어지다 보니 조직 간 소통이 부재해 정상적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은 지난 11일 LH 직원들이 철근 누락 단지 5곳을 임의로 누락한 사실을 발표하면서,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을 LH 내부에서 찾았다. 한국토지공사(토공)와 대한주택공사(주공)가 통합된 지 14년이 지났지만 화학적으로는 융합되지 않은 ‘무늬만 통합’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적에는 기시감이 크다. 2021년 ‘임직원 땅투기’ 사안이 불거진 후 발표된 LH 혁신안에도 “토공·주공 통합 후 조직비대화와 기능독점이 금번 LH 사태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라는 분석이 담겼다. ‘해체 수준의 혁신’을 위해 토공과 주공을 다시 기능별로 쪼개는 방안 등이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내걸었던 LH의 ‘조직 슬림화’ 약속은 왜 실패했을까. 전문가들은 조직 통합 이후 LH의 기능도 확대되어 왔다는 점, LH가 떼어내겠다는 기능들을 당장 지자체가 맡기 어려운 현실 등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이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LH 서울지역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와 관련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 애초에 왜 합쳤나

토공과 주공의 통합 논의는 1993년 처음 공식화된 이후 내부 반발로 6번이나 무산됐다. 2000년대 이후 택지개발 수요는 줄고 주택공급 수요는 늘면서는 사업권을 둘러싼 토공과 주공의 ‘몸집 불리기’ 경쟁이 본격화됐다. 두 기관의 업무·기능 중복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힘을 얻기 시작했다.

지지부진하던 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탄 건 2009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다. 당시 정부는 대대적인 공기업 혁신을 내걸었는데, 부채율이 400%를 넘는 토공과 주공을 통폐합해 구조조정과 경영효율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9년 10월 LH가 통합 출범했다.

LH는 출범 초기 악성 미분양 택지 등을 정리하는 등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섰다. 그 결과 2009년 525%였던 부채비율이 4년 만에 458%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LH의 업무 범위는 오히려 늘었다. 세종시 등 혁신도시, 보금자리주택, 3기 신도시 조성, 공공재개발, 국민임대주택 등 굵직한 국책 개발 사업을 추진할 기관이 LH 외에는 마땅치 않았던 탓이다.

조직 규모도 커졌다. 2009년 통합 당시 5799명이던 직원 수는 2021년엔 9643명으로 늘었다. LH는 2021년 혁신안에서 “전체 인력을 2단계에 걸쳐 20% 이상 감축하겠다”고 했지만, 올해 7월 기준 임직원 수는 8885명으로 감축 목표치에는 크게 못 미친다.

LH가 정권의 주거정책을 총괄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이상, 인력 감축이나 기능 조정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정부가 내놓은 전세사기 대책에도 LH의 피해주택 매입과 우선매수권 행사가 주요 대책으로 포함됐다.

■ 주거복지 위축 우려도

이 사장은 쇄신의 방향으로 ‘작지만 강한 조직’을 제시했다. LH가 담당하고 있는 수많은 업무 중 핵심 업무와 비핵심 업무를 구분해 전자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LH의 업무는 크게 ‘택지개발’ ‘주택공급’ ‘주거복지’ 등 세 가지로 나뉘는데, 택지개발은 아웃소싱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대신 공공분양과 공공임대로 나누어지는 ‘주택공급’에서는 LH가 택지를 공급하고 민간이 건설과 분양까지 맡는 ‘민간참여형 사업’을 늘리겠다고 했다. 전관 카르텔을 막기 위해 LH의 시공과 설계 권한을 감축하고, LH가 가진 감리선정 권한을 내려놓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이러한 민간 참여 확대는 결국 분양가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LH의 공공분양은 무주택·주거취약계층을 위해 공급되는 정책으로 수익성보다는 공공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최근 같은 원자재 가격 상승 국면에서 민간 주택공급이 감소할수록 공공분양 공급을 늘리라는 요구는 더 커지고 있다.

이 사장은 당장 인력을 줄일 수 있는 업무로 ‘주거급여’ 업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주거급여 담당 직원이 600여명 정도 되는데, 이는 지자체로부터 위탁받아야 하지 LH가 직접 책임질 업무가 아니다”라고 했다 “2021년에도 이 업무를 지자체로 이관해 인력을 감축하려 했으나 지자체 반발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문제는 LH가 이관하려는 업무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반면, 수익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집수리 지원 사업에서 수리업체에 증빙을 요구하거나, 전세임대 지원을 받는 집을 제대로 구했는지 알아보는 등의 노동집약적인 주거복지 업무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이들이 주로 담당하고 있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주거복지 업무는 원칙적으로 지자체에서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다”면서도 “LH는 택지개발 사업으로 난 수익으로 이들의 인건비를 감당할 수 있지만, 지자체가 이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해 업무를 이관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최 소장도 “귀찮고 일 많고 돈은 안 되는 일은 떼어버리겠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며 “조직 개편 논의가 진행될수록 주거복지 기능은 약화될 우려가 크다”고 했다.

■ 지금 필요한 것은 충격요법이 아니다

토공과 주공의 부처 칸막이 문제는 통합 이후 계속된 LH의 고질적 병폐다. 이 사장은 “LH 구조견적단 보직을 통합한 이후 14년간 건축 도면도 못 보는 토목직이 맡고 있었다”고 했다. 구조견적단은 LH 주택의 설계기준을 수립하고 총괄하는 부서인 만큼, 내부 갈등으로 인한 전문성 저하가 최근 LH 아파트의 철근 누락 사태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문제는 이를 해결해 가는 방법론이다. 취임 9개월차인 이 사장은 LH가 내부적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감사원·경찰청 등 3개 기관에 수사 또는 조사를 의뢰했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인적 쇄신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충격요법이 부작용을 더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지금은 지난번 세웠던 혁신안이 왜 안 됐는지를 따져보고 직원들 간 충분한 소통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문제를 풀어갈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비핵심 업무를 지자체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업무 역량을 키우는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한다”고도 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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