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美 ABA베어스 슬론 대표 “아이 자폐 극복 후 센터기록 삭제 요청은 한국 부모밖에 없어”
韓선 ‘자폐=불치병’ 부정적 시각 많아
응용 행동 치료 통해서 사회 활동 가능
‘희망이 없다’ 이메일에 韓 후원 결심
사비 들여 국내 9개 가정 무료 치료
부모 경제력, 아이 치료 기준 돼선 안돼
‘치료 신뢰→사회적 지원’ 선순환 중요
“미국에서 자폐스펙트럼장애(Autism Spectrum Disorder·ASD) 아이는 응용 행동 분석(Applied Behavioral Analysis·ABA) 치료를 통해 사회적 활동이 가능하고, 자폐 진단이 사라지면 센터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그동안 수고하셨고, 기록은 전부 지워주세요. 길에서 만나도 모른 척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딱 한 가족만 빼고 모두 한국인 가족이었습니다. 한국이 ASD를 ‘가문의 수치’나 ‘주홍글씨’처럼 여기고 유난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많다는 걸 보여 주는 대목이죠. 그래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이 드라마를 통해서 자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인식이 조금씩 변화할 수 있으니까요.”
최근 한국을 방문한 슬론 대표는 지난 10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 아동 후원은 상상조차 못 했다”며 “한국 부모들의 요청에 화상회의로 시작했던 것이 이렇게까지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 못 했는데, 모든 게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웃었다.
슬론 대표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14년, 미국 센터에 다니는 한국 부모가 개인적으로 인터넷에 치료 과정 동영상을 올리면서부터다. 한국인 부모들은 영상을 보고 아이의 ‘호전 가능성’을 확인한 후 그에게 ‘이메일 폭탄’을 보냈다. 심지어 일부는 한국말 메일이었다. 확인한 숫자만 4000여통. 전화도 쉴 새 없이 울렸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여긴 희망이 없다(Hopeless)”는 이메일이었다.
슬론 대표가 운영하는 ABA베어스는 미국 캘리포니아를 기반으로 한 ASD ‘치료 클리닉’이다. ASD는 아동기부터 △사회적 의사소통의 어려움 △제한적 관심사 △반복적 행동 등이 나타나는 신경발달장애의 하나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유병률이 늘어나고 있는 질병이다. 치료는 언어치료, 음악치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지만 치료 가이드라인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그중 ABA는 미국과 유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접근법이다. ABA는 칭찬과 보상으로 올바른 행동을 강화하고, 문제 행동은 제어하면서 적절한 행동을 ‘학습’하도록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다. 딸기를 못 먹거나, 양치질을 못 하거나, 병원 치료를 못 받거나 하는 행동을 시뮬레이션과 오랜 기간 반복 노출을 통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단순하게는 일반적인 자녀 훈육의 원칙과 결을 같이한다고도 볼 수 있다.
메일에서 ‘절박함’을 본 그는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화상회의 방식으로 교육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3년, 아이들이 호전을 보이긴 했지만 화상회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에 이미 문을 연 다양한 센터와 ‘협업’이 도움이 될까 했지만, 오히려 실망감만 들었다.
“ABA클리닉을 내세운 많은 센터와 교육법을 전수하는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협업하면 좋은 비즈니스가 될 것’이라는 얘기만 할 뿐, 치료사 교육·훈련과 치료 결과에 대한 목표와 비전은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절박한 부모’들을 이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거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의 후원을 받은 아동 중 한 명이 병원에서 자폐 판정을 ‘뗀’ 것이다. 지난해 출간된 책 ‘평범한 아이에서 특별한 아이로’에 나온 자폐아 유원이 얘기다.
그러나 ABA의 방식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훈련 과정이 ‘억압적’ 혹은 ‘비인간적’이라는 지적이다.
“동물을 교육하는 방식을 사람에게 적용하고, 문제 행동을 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과정이 ‘억압적’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방법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인내심 있게 가르치는데 그 와중에 아이가 익숙하지 않으니 울기도 합니다. 훈육도 마찬가지지만 아이의 떼를 무조건 받아 주는 게 답이 아니죠. 행동을 수정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찾는 것이 비인간적인가요? 아니요. 저는 자폐 아동의 학습 기회를 박탈해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고, 평생을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을 살도록 하는 게 더 잔인한 것 같습니다.”
그가 전혀 인연이 없던 한국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그는 미국이 ASD 지원 과정에서 범했던 실수를 한국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자폐스펙트럼 지원에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나이 제한 등 지원 요건이 강화되고 보험 적용에도 혼란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돈이 없어서, 직장을 잃어서, 아이 나이가 많아서 등 다양한 이유로 치료가 중단됐습니다. 이는 아이들의 미래를 완전히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경제력은 아이들의 치료에 기준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결국 ‘시스템’이다. 한국에서 “고액의 레슨비를 지불할 테니 자녀를 전담 치료해 달라” “기부할 테니 직원 가정만 봐 달라”는 다양한 요청과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이유다. 기부나 지원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부모의 재력과 직업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하고, 돈이 없는 집의 아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치료의 질을 높이면 자폐가 졸업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지역사회·기업·정부 등 사회적 지원이 이뤄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바라봤다. “자폐스펙트럼 아동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어마어마합니다. 무엇보다 한 가정이 파괴될 수 있을 만큼 영향이 큽니다. 아이를 돌보느라 부모는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 여행은 꿈도 못 꿉니다. 자폐 아동만 바라보느라 형제자매도 소외되죠. 어린 시절 가족들과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저 역시도 어린 시절 아팠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런 아쉬움을 잘 압니다. 제가 그 선순환의 초석을 만들고 싶은 겁니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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