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책임회피’라는 유토피아
대학 다닐 때 큰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상대는 고소·고발을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아버지와 함께 그를 찾았다. 전후 사정을 잘 알지 못한 아버지였지만, 당신은 상대에게 “자식을 잘못 기른 제 탓”이라며 무조건 고개를 숙였다. 민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마 아버지와 나란히 걷지 못하고 몇 발짝 떨어졌다. 뒤에서 본 아버지의 어깨는 왜소해 보였다.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말을 붙였다. “아버지….” 흘깃 뒤돌아본 아버지의 말은 간결했다. “됐다. 공부나 해라.” 꾸벅 인사드리고는 학교로 가는데 다시 돌아본 아버지의 등판은 참 넓어 보였다.
나로 인해 아버지가 남에게 고개 숙여야 했던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아리다. 아들은 그날 이후 더 이상의 일탈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과는 부모로서의 ‘도의적 책임’이었다. 도의적 책임이란 ‘개인의 양심이나 사회적 통념에 의한 윤리적인 책임’이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설명한다. 행정학에서는 공무원이 국민의 수임자(법률행위를 위임받은 사람)라는 관점에서 지는 행정 책임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면서 ‘그 행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조직 내의 상하 구성원으로 확산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인다.
오송 지하차도에서 14명이 숨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오송 지하차도를 한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파행으로 얼룩진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에 대해 “수고했다”는 윤 대통령의 격려는 있었지만 ‘준비가 부족했다’는 사과는 없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공동조직위원장), 김관영 전북지사(집행위원장)등은 한창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다. 159명이 사망한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다. “비통하고 죄송한 마음”이라는 대통령의 말이 전부였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도 “내 탓”이라고 하지 않았다. 용산구청장과 용산경찰서장 등 6명이 구속기소됐지만 모두 풀려났다.
“군자는 자신에게 책임을 묻고, 소인은 남에게 책임을 묻는다(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는 공자의 말을 꺼내는 것은 비루해 보인다. ‘도의적인 책임’이 사라진 시대다. 리더는 사사건건 시비를 가려 책임자를 응징하겠다고 한다. 책임소재는 아래로 아래로 힘없는 직위로 내려간다. 대어들은 다 빠져나가고 송사리만 덤터기 쓴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비단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리더의 책임회피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은행 횡령사건이 터져도 은행장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사가 악성 민원에 시달려도 교장과 교감은 모르쇠다. 해병대 채모 상병 사망사고 진상조사 논란도 맥락이 같다. 국방부의 높으신 분까지 책임론이 제기되지 못하도록 사건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는 “또 경찰이냐. 권한은 없는데 책임은 ‘슈퍼맨’”이라는 불만의 글들이 올라온다고 한다. 물난리가 나도, 건물이 무너져도, ‘부실’ 국가 행사가 되어도, 학교폭력이 발생해도, 길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져도 결국은 경찰 책임론으로 귀결되는 데 따른 분노다. 분노의 끝은 공백이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으로 순경은 정원 중 절반이 결원 상태라고 한다. 책임을 미루다보면, 일할 사람이 없어지는 모순적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윗사람이 진 도의적 책임이 아랫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크다. 대통령이 “내 잘못”이라고 하는데,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할 국무총리나 장관은 없다. 장관이 “내 책임”이라고 하는데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할 차관과 국장은 없다. 이들 자리에 각각 ‘사장’과 ‘상무’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책임의 선순환은 이렇게 이뤄진다.
미국의 심리전문가 베벌리 엥겔은 저서 <사과의 힘>에서 사과의 요건으로 ‘유감(regret)’ ‘책임(responsibility)’ ‘치유·보상(remedy)’ 등 ‘3R’을 꼽았다. 강력한 유감 표명이 없다면 책임과 치유·보상으로 넘어가기 힘들다는 얘기다.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다 내 책임인 것 같았다.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으면 어느 것 하나 대통령 책임 아닌 것이 없었다. 대통령은 그런 자리였다.” ‘대통령의 책임’이 거론될 때마다 회자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윤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2시간을 울었다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이 말도 기억하고 있을까.
박병률 경제부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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