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사랑하지 않고 노동할 수 있기를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저마다의 출판 노동을 거쳐 이곳에 도착한 동료들과 함께 회사를 꾸린다. 지나친 호기심과 부족한 자제력 때문에 영 두서없는 일들을 하며 살아온 편이지만, 나 역시 책을 만들며 밥벌이를 해온 시간이 가장 길었다. 대부분 그렇듯 첫 직장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서른 살이 조금 넘어서 입사한 출판사는 두꺼운 학술서를 만드는 곳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는 내가 완전히 ‘초짜’였다는 것이고, 큰 문제는 어쩌다 편집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나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탁월한 이들도 많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햇병아리 팀장은 나이 많은 팀원들의 교정지를 흘끗거리며 책 만드는 일을 배웠다.
그때의 동료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론 멍청하고 서투른 팀장에게 종종 짜증도 냈지만,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책 만드는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번은 초대형 사고를 치고 멍하게 앉아 있던 내게 당시의 나이 든 팀원 한 명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건넸다. “사전 만들 때는 열 번 넘게 교정을 봐도 오탈자가 나더라고요.” 그가 툭 던진 말은 내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윤색할 생각은 없다. 첫 직장에서 나는 꽤 착하게 굴려고 노력했지만, 어떤 ‘구조적인 미안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몇년 후 회사를 떠나는 내게 다른 팀원은 위스키를 한 병 선물하며 좀 변죽 좋게 살아도 괜찮다는 충고를 건넸다. 겨울이었고, 마지막 출근길 아침에는 눈이 펑펑 내렸다. 지하철을 타러 갔던 합정역 2번 출구 앞에는 파주출판단지로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자신이 견뎌 온 출판 노동을 즐겁고 충만한 시간으로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몇년 전, 단단하고 아름다운 책을 만들던 선배가 신문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을 사랑해서 일하기도 하지만 책을 사랑하지 않으면 일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기도 한다”는 구절이 무겁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맞는 말이다. 책 만드는 노동은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한다. 노동자들은 사랑의 이름을 등에 업고 돌격한다. 기이한 풍경이다.
사랑 없이 노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이란 분명 착란의 한 상태다. 그것에서 깨어나지 않기 위해 나이 든 노동자는 함께 일할 젊은 노동자를 선택할 때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을 검증하려 노력한다. 이것은 계통적인 독서와 책에 대한 탐구심으로 입증된다. 실로 이곳에서는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순간 많은 명민한 동료들이 이 헐거운 노동에서 떠나가곤 하니까. 버텨내기를 위한 사랑은 사실 기이하게 굴절되어 있는 거니까.
요즘 나는 자신의 사랑을 거듭 의심하는 중이다. 출판 자영업자가 출판 노동자처럼 자신이 만드는 책을 사랑해도 되는 걸까. 그 사랑으로부터 동료들을 보호할 역량도 의지도 없으면서. 하지만 출판 자영업 역시 사랑 없이 지속하기는 참 어렵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래전 어느 시의 제목처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다못해 볼륨 다이얼이라도 붙어 있으면 좋을 텐데.
답도 실마리도 모르지만 나는 열심히 떠들어대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출판 창업 멘토링’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자영업을 준비하는 나이 든 출판 노동자를 만날 때도 있다. 원고를 들여다보는 이들의 말투는 어째 좀 비슷해서 가끔은 예전의 동료와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일단 노무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생각하시는 것보다 자신의 첫 책을 더 사랑하게 되실 거라서요. 그렇게 두서없이 말해도 눈앞의 동료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푸핫,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우리의 대화는 길게 이어진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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