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푸르는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창]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이탈리아어를 조금 아는 유럽인이라면 ‘마니푸르’라는 단어에서 1990년대 초 이탈리아의 부정부패 척결 작업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를 떠올릴 것이다. 이 캠페인은 이탈리아 정치판을 변화시키는 데 공헌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집권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인도 마니푸르주에서는 메이테이족과 쿠키족 간의 폭력이 준내전 상태로 치닫고 있다. 메이테이족은 집권당인 인도인민당과 연결된 힌두교도들이고, 쿠키족은 산간지역에 사는 기독교도들이다.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양쪽 모두이지만, 주원인 제공자는 메이테이족이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침묵을 지키다 쿠키족 여성 두명이 나체로 끌려다니고 성폭행당하는 동영상이 확산하면서 공분이 일자 그제야 마지못해 ‘인도 사회의 수치’라고 언급했다.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내세우지만 은밀하게 메이테이족을 비호한다. 이런 편파성의 배경에는 인도인민당이 힌두극단주의 세력이라는 점도 있지만, 쿠키족을 몰아내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개발하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인도 정부는 쿠키족에 대한 압력을 ‘발전’과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인도 정부의 손은 그들 주장과 달리 ‘깨끗한 손’과 거리가 멀다. ‘법과 질서’를 통해 강자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의 폭력에 합법의 외피를 씌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술 더 떠 불법적인 침략자를 법의 이름으로 공개 지지함으로써 중립성을 지닌 국가권력이라는 외피조차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인도 마니푸르만이 아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보다 유대인 시민에게 은밀하게 특권을 부여하면서도 최소한 겉으로나마 중립성을 지닌 법치주의의 모습을 갖추려 노력했다. 시온주의 극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면 이를 비판하고, 서안지구 불법 신규 정착촌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런 역할은 주로 대법원이 맡았다. 하지만 지난해 집권한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는 사법개혁이란 이름으로 대법원의 자율성을 박탈했다. 지금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을 형식적으로조차 비난하지 않는다.
인종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적을 부를 때 인종주의적인 메시지를 중립성을 지닌 언어로 포장한다. 그렇게 자신의 순수성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런 외설적 오염으로부터 순수한 보편적 개념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인종주의·성차별적 개념에서 수사를 벗겨내고 순수한 논리 구조로 공식화해 보면 그 부조리함이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한 국가가 스스로를 지키는 영웅적인 싸움에 참여하고 있을 때조차 그 투쟁의 순수성을 오염시킨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많은 좌파와 자유주의자가 자발적으로 최전선에 지원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들이 우크라이나 내부의 공격적이고 보수적인 내셔널리즘(이를테면 러시아 음악가의 공연을 금지하는 조치)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하고 러시아에 동조하는 세력 아닌지 의심한다. 이들에게 심각한 불이익을 주기도 한다. 많은 우크라이나 여성도 군에 입대해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지만, 이들 역시 우크라이나 남성 군인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의견을 묵살당한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두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러시아의 공격에 대항하는 싸움인 동시에 전후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만드는 싸움을 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폴란드나 헝가리 같은 근본주의적인 내셔널리즘 국가가 돼 러시아계 소수파를 인도 마니푸르의 쿠키족처럼 대할 것인가? 우크라이나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결정하는 것은 바로 지금이다. 우크라이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침략에 반대하는 이들의 자리를 모두 포용하는 광범위한 대중전선을 형성해야만 한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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