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 없이 누리는 정원 있는 삶

한겨레 2023. 8. 2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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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한의 토포필리아][배정한의 토포필리아]
공유정원 녹녹은 정원의 소유 대신 정원의 경험을 제공한다. 유청오 조경사진가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정원은 도시인의 영원한 로망이다. 실현하기 힘든 꿈의 뿌리는 인류의 첫 정원, 에덴을 향한 노스탤지어. 모든 것이 저절로 주어진 낙원에서 추방된 뒤, 그곳으로 돌아가고픈 갈망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쌓인 흔적이 곧 정원의 문화사일 테다. 볼테르는 “우리의 정원을 가꾸어야 한다”는 선언으로 ‘캉디드’를 끝맺는다. 가꿈, 즉 돌봄을 강조하는 이 문장을 이어받아 ‘정원을 말한다’의 저자 로버트 해리슨은 정원사로서 인간의 소명을 이야기한다. “정원은 인간의 조건, 즉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도록 하는 소양을 배양하는 장”이다.

하지만 현실의 도시 생활에서 정원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 도시의 생명줄인 밀도와 복합, 자본이 정원에 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원을 도려낸 도시에서 다시 정원을 애도한다. 쇠락한 동네의 좁은 골목 빈틈마다 놓인 작은 화분들, 그것은 정원의 상실에 대한 애절한 헌화에 다름 아니다. ‘플랜테리어’라는 괴명의 실내 장식이 유행하는 건 그러한 헌화의 상업적 버전이며, 여러 도시가 앞다퉈 정원박람회를 개최하고 ‘정원도시’를 선언하는 기현상은 정치적 변용이다.

정원에 대한 동경이 명멸해온 장소로 도시 곳곳의 옥상을 빼놓을 수 없다. 근대 건축의 발판이 된 철근콘크리트 구조는 수평 지붕을 가능하게 했고, 마침내 옥상이 도시 건축의 보편적 문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옥상 정원의 의의를 “잃어버린 지면의 회복”이라고 말했다. 옥상에 정원을 결합하기 위한 한세기 넘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옥상을 지면처럼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식물의 거주에 적합한 토심 확보, 하중 문제, 배수와 방수 처리, 관리를 위한 노동과 비용 등 난점이 만만치 않다. 더 큰 난맥은 평범한 도시인이 소유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옥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내 집 정원 없이 누리는 정원 있는 삶”을 표방하는 ‘공유정원’이 도심 한복판 옥상에서 실험되고 있다.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자리한 타임워크명동 7층 옥상의 300평 남짓한 정원 ‘녹녹’이다. 입주자들만 사용하는 옥상 정원이 아니다. 주중과 주말 모두 대중에게 개방되지만, 공원 형식의 공공서비스 공간은 아니다. 공유주거, 공유사무실, 공유주방처럼 정원 수요를 공유경제와 결합해 수익을 내는 비즈니스 모델. 조경가(최영준 서울대 교수)가 설계한 공간을 정원 플랫폼 스타트업(앤로지즈, 대표 조영민)이 건물주와 계약을 맺고 유지 관리 및 위탁 운영하는 방식이다.

‘내 집 정원 없이 누리는 정원 있는 삶’을 실험하는 공유정원, 녹녹. 유청오 조경사진가

녹녹의 가장 큰 특징은 정원의 소유 대신 정원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 다양한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산책과 휴식은 누구든 언제나 가능하지만,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는 비용을 지불한다. 고층 건물들에 파묻힌 초현실적 공중 정원에서 열리는 식물 장터, 가드닝 클래스, 요가 클래스, 선셋 훌라 클래스, 가든 디제잉, 책 소풍, 겨울새 밥상 차리기 같은 다채로운 행사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정원의 경험에는 노동이 빠져 있다. 가꾸고 돌보는 경작의 즐거움을 장소의 향유가 대신한다. 그럼에도 이 정원이 생명과 생동의 미감을 발산하는 건 면밀한 탐구에 기반한 조경 설계 덕분이다. 조경가 최영준에게 디자인의 핵심을 묻자 ‘염려’라는 의외의 단어가 돌아왔다.

“식물에 대한 책임감이 설계의 출발점이었다. 비유하자면 고시원 원룸 못지않게 열악한 환경에서 과연 식물이 행복하게 거주할 수 있을지” 걱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생태적 연결성이 취약하고 토심을 거의 확보할 수 없으며 배수 조건도 미비한 옥상 환경에서 생육할 수 있는 식재를 골라 조합했다. 미기후와 일조량에 따라 공간을 구분하고 수종을 그룹화했다. 이런 설계 원칙에 따라 정원에 거주하게 된 식물은 주로 여러해살이풀이다. 얕은 토심에서 자랄 풀들의 질감과 볼륨이 옹색하지 않도록 다양한 풀을 섞어 패턴을 디자인했다. 다채로운 숙근초가 계절마다 다른 경관을 생성하며 정원 프로그램들과 중첩된다.

내가 녹녹에 올라간 날은 폭염이 절정이었다. 소란한 도시의 공중에 감춰진 비밀의 풍경. 풀밭 경계에 존재감을 숨긴 작은 의자에 앉았다. 모든 생명을 정지시킬 듯 후끈한 한여름 바람에도 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랭 코르뱅의 아름다운 역사책 ‘풀의 향기’의 부제 ‘싱그러움에 대한 우아한 욕망의 역사’가 떠올랐다. 미완의 공유정원 실험실 녹녹이 도시인의 정원 로망에 대한 대안적 응답으로 진화해가길 기대한다.

녹녹의 아홉 계절. 여러해살이풀들이 계절마다 다른 경관을 생성한다. 사진 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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