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콘크리트 유토피아'속 연기에 대한 해석의 모든 것 [인터뷰M]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 아파트 입주민 대표 '영탁'으로 지금껏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며 '역시 이병헌!'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이병헌을 만났다.
황궁 아파트 902호 주민 '영탁'으로 망설임 없이 화염에 휩싸인 집에 들어가 단숨에 불길을 잡는 인상적인 모습으로 입주민 대표로 추대, 투철한 희생정신을 인정받으며 주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외부인을 방출하고 모든 게 폐허가 된 세상에서 유일한 유토피아인 황궁 아파트를 지키려는 인물을 연기한 이병헌이었다.
엄청난 재난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는데 아파트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만화 같은 설정이 너무 재미있었다는 이병헌은 "그 안에 뭔가 많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시나리오 받기 전부터 들었다. 재미있겠다는 기대감에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는데 제 기대만큼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더라.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는 인간, 상식선 안에서 공조하는 일반적인 사람의 이야기가 보이는데 극단적인 상황이다 보니 갈등도 빚어지고, 그 갈등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다"라며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개봉 이후 연기력에 대한 칭찬과 작품에 대한 호평이 이어지는 것에 대해 그는 "직접 이야기 들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안도하며 "작품을 할 때마다 부담을 가지게 된다. 15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작품을 할 때 부담은 안고한다. 언제쯤 그 부담이 없어질까, 언제쯤 부담이 덜해질까 궁금해하며 연기해 왔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연기를 하고, 내 감정에 솔직하고 그게 맞는다는 생각으로 자신감 있게 연기했으나 늘 대중에게 보여주기 직전에는 긴장되고 떨림이 있다. 내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게 상식적이지 않다고 느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에 늘 긴장하게 된다."라며 연기의 신(神)이지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고백했다.
웹툰의 원작에서나 감독의 시나리오에서나 이 작품 속 캐릭터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야초부터 탁월했다. 그런데 이병헌은 엄태화 감독과 함께 좀 더 살아 있는 인물로 보여주기 위해 많은 상의를 했다고 한다. "대본에 어떤 캐릭터인지가 나와있었지만 다만 더 사람의 냄새가 나게 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대화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며 상황이 재미있을 수 있는 지점을 향해 상의했다."라며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캐릭터 빌드업의 과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온 인물 '영탁'은 분노, 우울, 무기력을 동시에 짊어진 소시민 가장이었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영화 중반에 공개되는 영탁의 서사를 보면 뒤늦게 공감이 되겠지만 영탁은 의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격해진 감정과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 인물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진으로 가족을 다 잃고 삶이 송두리째 없어진 사람이었다. 영화 초반 '영탁'이 어눌해 보이거나 평범해 보이거나 멍해 보이는 게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주민 회의에서 '영탁'을 추앙하고 선임해 주는 자체도 '이게 무슨 상황일까?' 싶어 얼떨떨한 기분을 표현하려 했다는 그는 "극 중 김선영이 중요한 대사를 한다. '세상은 리셋된 거야. 살인자나 목사나 다를 게 뭐 있냐'라는 말을 할 때 비로소 '영탁'의 심경에 약간의 변화가 오게 된다."라며 영화의 흐름과 달리 캐릭터의 시간을 쫓아 가면 캐릭터의 심리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야기했다.
모든 걸 다 잃고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도 못 느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세상이 리셋되었다'라는 이야기에 뭔가 깨달음과 느낌으로 바뀌게 되는 '영탁'은 얼결에 주민대표가 되고 완장을 차게 된다. 처음에는 그게 완장이라는 것도 못 느끼고 책임감만 가지고 있었던 '영탁'이었다. 그래서 뭔가 해보기 위해 민주적인 판단을 하고 역할분담을 하며 주민대표로의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몇몇 상황을 겪으며 자신도 모르게 권력을 맛을 느끼고 주민들 모두가 기형적인 분위기로 번져가는데 그 당시에는 모두가 그걸 깨닫지 못한다. 지울 수 없는 아픔이 있는 인물이 리더로서 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두 번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며 이병헌은 '영탁'의 성장 과정을 설명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물론이고 연출한 엄태화 감독, 연기한 이병헌까지 입을 모아 가장 마음에 드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은 '아파트'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 대해 이병헌은 "현장에서 효과나 음악이 없는 가편집만 봤을 때도 좋았는데 완성된 장면을 보니 굉장한 임팩트가 있는 시퀀스더니라. 감독의 의도와 장면의 의도를 아니까 굉장히 좋은 시퀀스가 되겠다 상상하며 촬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좋은 장면으로 나왔다."라며 완성본에 대한 생각을 드러냈다.
이 장면은 윤수일이 부른 '아파트'라는 노래의 경쾌한 리듬과 가사와 어우러져 재난 상황에서 오래간만에 얻은 풍족한 음식으로 주민 모두가 잔치를 벌이 응 장면으로 이병헌의 노래, 등장인물들이 흥에 겨워 추는 춤, 장작 불빛에 어른거리는 이들의 거대한 그림자, '영탁'의 비밀로부터 '영탁'의 현재 얼굴로의 극단적인 클로즈업이 연결되며 엄청난 충격을 안기는 시퀀스였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서서히 변해가는데 특히 '영탁'은 이 장면에서 완전히 권력의 단물을 빨며 신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인물의 변화를 잘 그려내는 게 이번 작품 연기의 포인트라 생각했다는 이병헌은 "이 영화 전반적으로 좋았던 건 피식피식 웃게 되는 블랙코미디가 있지만 웃는 사이에 긴장감도 점점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했고 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서라 생각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었고 '아파트' 노래 장면이 그걸 가장 잘 드러낸 것 같다."라며 이 장면을 평가했다.
'영탁'은 과연 악역일까? 그는 "악역에 가깝긴 한데,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고 사연이 있지 않나. 나는 악역보다는 사람을 그리려고 했다. 어떤 인물을 연기할 때 이병헌이라면 안 그러겠지만 그 인물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고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영탁'은 이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했던 행동들, 그래서 진짜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왔다."라며 캐릭터의 선악을 나누기 전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 같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는 영화의 후반부, '영탁'은 영화 속 사람들이나 관객까지 모두가 경악할 정도로 충격적인 행동을 한다. 시나리오 읽을 때 자신도 의외였다며 너무 갑자기 너무 심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는 이병헌은 "꼭 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면 내 감정이 극단으로 빌드업 된 상황이어야 한다 생각했다. 리더였던 나를, 내 돈이 들어간 내 집이고 나를 그렇게 추앙하며 따르던 주민이 나는 내몰려는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말도 못 할 정도로 분노가 쌓여 그 상황에서 불물 가리지 않는 감정으로 저지르는 생동이라 생각했다."라며 장면 속 인물의 심리를 설명했다.
만약 그렇게까지 감정으로 치닫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상황에서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는 게 상식이었을 것. "도망이 아니라 '너 때문에 이렇게 됐다'라는 감정으로 억울하고 분해야 했다."라며 모두가 놀랄지언정 개연성에는 납득이 가게끔 연기로 빌드 업 시킨 영탁의 감정서사를 알렸다.
해당 시퀀스에서 김선영과의 에피소드가 있었다며 그는 "아침부터 김선영이 만나자마자 '어떡해요 오늘~ 때려야 하는데...'라며 걱정을 하더라. '연긴데요 뭐. 한두 번 하세요? 그냥 편하게 하세요' 했는데도 좀 이따 와서 또 이야기하고, 점심 먹고 와서 또 이야기하고 여러 차례 걱정을 했다. 하도 그래서 '고만 좀 하세요. 그냥 맘껏 하세요.'라고 했는데도 촬영 직전까지도 계속 몇 번을 이야기하더라. 촬영 직전에 "한 번에 끝냅시다'라고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촬영했는데 태어나서 맞아본 것 중 최고로 아팠다. 몇 초 동안 순간 기절을 했었다. 더 황당했던 건 감독님이 '카메라가 뒤에 있어서 실제로 안 때려도 되는 신인데 왜 때렸나'라고 하셔서다. 정말 제대로 맞았다."라며 순간 기절을 할 정도로 파워 따귀를 위해 아침부터 김선영이 빌드 업 시켰던 상황을 설명하며 열을 내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웃음을 안겼다.
영화 초반 자신의 집이 아닌데도 몸을 사리지 않고 불을 껐던 상황에 대해서는 "식구들이 다 재난으로 죽고 아무것도 없는 '영탁'은 우울하고 절망의 한 가운데 빠진 상황이었다. 아파트, 내 집, 불이 난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목숨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조건반사처럼 뛰쳐나간 거라 생각한다."라며 캐릭터의 심정을 설명했다.
첫 등장에서부터 지금껏 알던 이병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선 비주얼을 선보인 그는 "제 아이디어라기 보다 모두의 아이디어였다. M자 헤어를 만들자고 하고 분장을 하고 보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왠지 영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분야별 전문가들과 함께 캐릭터의 외형적인 모습을 만들었음을 알렸다.
또한 '아파트' 열창의 장면에서 이병헌의 건치 미소가 살짝 보이는 것에 대해 그는 "'건치 미소'라는 짤 자체가 처음 나올 때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이왕 나온 거 어떻게 하겠나. 그럼 나도 즐기자고 생각하려 한다. 이 장면에서도 의도한 건 아니었다. 난 아직도 영화배우로서 신비롭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라며 '밈'으로 대중 가까이할 수 있는 건 좋지만 '영화배우'로서는 매 작품 낯설고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에게 인식되길 바란다는 바램을 드러냈다.
이번 영화를 통해 함께 연기한 배우들로부터 수차례 언급된 '안구 교체설(순간적으로 눈빛이 변해 '안구를 갈아 낀 것 아닌가 싶다'라는 발언으로 만들어진 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작품이 끝나기 전까지 배우라면 인물의 상황과 인물의 신분, 감정에 젖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촬영 기간 중 3일의 쉬는 시간이 생겨 그동안 가족들과 맛있는 걸 먹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더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작품이 있다. 감정의 끈을 놓지 말고 있어야 하니 작품 하는 동안 긴 시간 공백이 있으면 되게 힘들다."라며 평소 연기를 할 때 어떻게 감정을 컨트롤하는지를 알렸다.
그러며 "그러다 보니 촬영을 하는 동안은 내내 캐릭터의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간혹 현장에서 웃거나 농담하는 순간에도 캐릭터의 감정을 잊는 건 아니다. 조건반사처럼 슛이 들어가면 다시 튀어나오게 된다. 감정을 계속 유지한 채로 농담을 하는 것. 연기를 하고 살아오면서 계속 그렇게 해 왔다."라며 한두해 사이에 완성된 캐릭터 몰입이 아닌 수 십 년간의 훈련으로 만들어 낸 자신의 능력임을 밝혔다.
이번에 함께 작업한 엄태화 감독에 대해 이병헌은 "신인배우나 처음 호흡 맞추는 배우는 힘들 수 있는데, 현장에서 디렉션을 거의 안 준다. 어떤 배우들은 막막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저는 감독에게 굉장히 많이 물어보는 편이다. 뭘 보여주려는 건지 계속 물어보니 대화를 통해 더 좋은 아이디어도 나오고 미처 감독이 생각지 못한 새로운 감정도 나오더라. 대화하면서 많이 고쳐간 게 많았다. 처음 주민 대장에 '영탁'이 이름을 쓸 때 ㅁ을 먼저 쓰는 것도 제안을 하면서 이 인물의 비밀에 대한 레이어를 쌓아갔다. 그런 게 하나씩 모이면 영화가 좋아지게 된다."라며 시나리오에 미처 담지 못하거나 생각지도 못했던 설정도 현장에서 디테일하게 쪼개고 쌓으며 단 한 장면도 허투루 보지 못할 영화를 만들어갔음을 이야기했다.
이병헌은 엄태화 감독의 비하인드 에피소드도 밝혀 큰 웃음을 안겼다. "박찬욱 감독의 막내 연출부로 엄태화 감독과 '쓰리, 몬스터' 영화를 함께 했었다. 저예산 영화여서 제가 거기서 감독으로 출연했고 엄태화 감독은 실제 스태프이면서 영화 속 스태프로도 출연했다. 굉장히 긴 롱테이크 신을 찍는데 거기서 엄태화 감독이 붐 마이크를 들고 있었고, 거의 30번이 넘는 테이크 끝에 겨우 오케이가 떨어져서 막 박수 치고 모두가 환호를 했었는데 엄태화 감독이 붐 마이크를 반대로 쥐고 있어서 또다시 찍어야 했다. 그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하더라. 너무 착한 사람인데 상처가 너무 컸다는 이야기를 현장에서 몇 번 했었다."라며 20년 전 엄태화 감독과의 인연을 밝혔다.
iMBC 김경희 | 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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