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 한번도 가지 않았던 ‘미증유의 미로’ 진입

박은경 기자 2023. 8. 2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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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은 과거사 문제 품은 채 준군사동맹의 길
대중 외교 기조도 수교 이후 가장 큰 급변침
전인미답의 외교하면서 합의와 논의는 제로
국익에 도움될 지도 시계 제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로렐 로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캠프 데이비드’ 3개 문건으로 한국 외교는 미증유의 ‘미로’에 진입했다. 침략과 피지배의 과거사로 군사적 협력이 불가능했던 한·일이 준군사동맹 수준으로 밀착하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동성명에 중국을 실명으로 ‘국제질서를 어기는 국가’로 적시하면서 1992년 수교 이후 우호 협력을 기반으로 해온 대중 전략 기조는 급변침했다. 이 같은 중대한 외교 패러다임의 전환에 국내의 정치적 합의와 국민의 여론 수렴 과정은 거의 없었다. 한국이 얻게 될 경제적, 안보적 이익도 분명치 않다. 한국 외교가 윤 대통령의 결단에 의존한 전인미답의 길로 들어섰다는 의견이 나온다.

3국 정상은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서 인도·태평양 지역 및 글로벌 현안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3국 협력을 확대하기로 선언했다. 협력 제도화를 위해 한·미·일 정상회담을 연례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외교·국방장관, 국가안보보좌관, 상무·산업장관 협의도 연례적으로 열고, 첫 재무장관 회의도 열기로 했다. 한·미·일 군사훈련을 연 단위로 실시하고, 올해 연말까지 북한 미사일 경보 정보를 실시간 공유키로 했다. 동맹이라는 이름만 없을 뿐 사실상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가기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3국의 전방위적인 협의체가 한·미·일 동맹이나 준동맹이라는 성격 규정에 선을 그었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20일 연합뉴스TV에 출연해 “동맹은 법적 구속력이나 법적 의무를 수반하는데 (이번 정상회담은) 한·미·일 동맹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면서 “굳이 표현하자면 정치적 약속이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날 “동맹은 법적 구속력을 가져야 하고 조약을 맺어서 해야 한다”며 “(이번 협의체는) 법적인 게 아니라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준동맹이라는 표현은 과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이날 “정상회담, 외교·국방장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각급 고위급 회의를 정례화하고, 여기에 한·미·일 군사훈련 정례화까지 더해진 것”이라며 “미국·인도·일본·호주의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나 미국·영국·호주의 동맹인 오커스(AUKUS)보다 콘텐츠가 훨씬 더 많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동맹이라는 명칭만 안 썼을뿐 현재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쿼드보다 한·미·일 협력이 훨씬 더 강하게 나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상회담 핵심 내용은 “한·미·일이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도전·도발·위협에 신속히 협의하도록 한다”는 부분이다. 이는 ‘회원국의 영토 보전, 정치적 독립 또는 안보가 위협받을 경우 상호 협의한다’는 미국과 유럽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헌장 제4조를 연상케 하는 준군사동맹 수준의 문구이다. 기존의 한·미, 미·일 군사동맹에 더해 느슨한 고리였던 한·일 간에도 군사동맹 수준의 협력이 가능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대만해협이나 남중국해에서 발생하는 분쟁은 물론 일본이 중국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나 러시아와 쿠릴열도 남단 4개 섬(일본에선 북방영토라 부름)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을 경우 한·미·일 협의 틀 내에서 공동 대응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일본과 중·러 간 영토 문제에 대해 미국은 노골적으로 일본의 손을 들어왔다. 또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일본이 한·미·일 협력체 틀을 통해 군사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앞으로 한국이 독도나 동해의 일본해 표기 문제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한국은 이번 정상회담으로 미국의 대중 견제 노선에는 더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번 공동성명에는 “남중국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불법적 해상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위험하고 공격적 행동과 관련해 인도·태평양 수역에서 어떤 일방적 현상변경 시도도 강하게 반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한·미 정상회담이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중국을 국제질서를 어기는 행동을 하는 국가로 공개적으로 적시한 것은 이전까지는 없던 일이다.

주재우 경희대 중국학과 교수는 “이전까지는 한·미·일 협력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있었다”면서 “미·일은 공개적으로 대중 적대시 입장을 밝혔지만 한국이 합류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를 수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 교수는 “미·일이 주도하는 상황에서는 한국이 스스로 의제를 발굴하지 않는 한 (대중 기조에서) 끌려가는 구도로 될 수밖에 없는데 공동성명에 중국은 직접 적시한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한·미·일 협의체가 ‘위계적 동맹’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까지 일각에서 나온다. 동북아 군비 경쟁을 가속화할 일본의 재무장을 한국이 간접적으로 용인한 격이 될 수도 있다. 한·미·일이 군사적으로 묶이면서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바라는 재무장에 한국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는 시각이다. 김 교수는 주한미군은 육군 위주의 병력이지만 주일미군은 해·공군 위주의 전략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 같은 위계질서 속에서는 미국은 두목, 일본은 중간보스, 한국은 행동대원이라는 구조가 짜이고, 일본에 유리하지만 한국은 불리한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한·미·일은 불가역적인 인도·태평양 지역 협력체로 진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점도 눈에 띈다. 약한 고리인 한·일 관계와 내년 미국 대선 등을 염두해 3국 협의체를 강하게 결속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한국이 주도적으로 한·미·일 공약을 깨기는 어려워 한국 외교에 낙인처럼 작용할 여지도 있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 외교의 근본틀을 바꾸는 이번 결정을 정치권과의 협의나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진행했다. 국내적 혼란, 외교·경제적 부담 역시 고스란히 윤 대통령과 정부의 몫이 됐다.

중국은 20일 서해 북부지역에서 군사훈련을 개시했다. 중국 해사국이 발표한 군사훈련 지역은 랴오둥반도 다롄시와 산둥반도 옌타이시 사이 해역인데 랴오둥반도와 산둥반도는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앞서 중국은 한·미·일 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6시간 만인 19일 오전 9시(현지시각) 군용기 42대를 대만 해협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했다. 지난 17일에는 중·러 함정이 동중국해를 항행했고, 지난 18일에는 러시아 초계기 2대가 동해와 동중국해 사이를 비행했다.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18일 미군의 대북 정찰활동을 비난하며 “그 어떤 물리적 대응도 불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 구도가 더욱 선명해지며 동북아에 군사적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다. 윤 대통령은 3국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3국 연대의 이유로 “오늘날 미증유의 복합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밝혔지만 한국 외교가 시계제로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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