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죽였다…“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이야기
“당신의 테베는 무엇인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넌 걸레야. 우유 한 병도 못 가져오는 쓸모없는 놈.”
매일같이 지독한 폭언이 쏟아졌다. 아버지는 말 끝마다 ‘걸레’라고 불렀다. 아들이 성매매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다. 폭언은 언제나 폭행은 함께였다. 폭행의 종류는 가지가지였다.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할 수도 있다.
“제일 최악은 허리띠예요. 허리띠가 최악인 건 버클 때문에 자국이 남아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엌에서 아버지를 포크로 찔러 죽였다. 21번을 찌르고 나니, 아버지는 숨이 끊어졌다. 냉장고에 꾸덕하게 달라붙은 붉은 핏줄기를 닦아냈다. 그런 다음 냉장고를 열어 주스 한 잔을 마신 뒤, 경찰에 신고했다.
“나는… 아버지를 죽였어요.”
연극 ‘테베랜드’는 우루과이 출신 극작가 세르히오 블랑코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작품이다. 전 세계 16개국에서 공연됐고, 한국에선 신유청 감독의 연출로 다음 달 24일까지(충무아트센터) 관객과 만난다.
고대 그리스 도시인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받고 태어난 비극의 주인공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왕에게 입양, 장성해 테베로 향한다. 신탁은 현실이 됐다.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른 채 그를 죽이고, 어머니라는 것을 모른 채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아이를 낳는다. 오이디푸스가 짊어진 죄와 업보는 무엇일까. 이 신화를 모티브로 한 연극은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들어가 있다.
등장인물은 세 명. 아버지를 죽여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청년 마르틴, 존속 살해를 주제로 연극을 쓰는 극작가 S, 마르틴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배우 페데리코. 하지만, 마르틴과 페데리코를 한 사람(이주승 손우현 정택운)이 연기하는 만큼 극은 내내 2인극의 형태를 띈다.
2인극이라는 점이 연극 ‘테베랜드’의 많은 특징을 만든다. 교도소의 철창 안 농구 코트를 재현한 무대. 이 작은 공간에서 극작가 S는 두 명의 다른 인물과 대화를 나눈다. 마르틴과 페데리코다. ‘존속 살해’를 주제로 연극을 쓰기 위해 매주 한 번씩 마르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마르틴과의 대화를 페데리코에게 들려준다.
연극은 끌고 가는 것은 대화다. S는 마르틴과의 대화를 통해 ‘존속살해’ 이면에 드러나지 않은 마르틴의 삶 안으로 들어간다. 대화의 폭이 넓다. 마르틴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두 사람의 대화는 전방위로 확산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로 대표하는 문학,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성 마르틴’의 종교, 모차르트와 U2의 음악으로 이어진다. 그 중심엔 언제나 어긋난 부자(父子) 관계를 담고 있다. 지적이고 우아하다. 팽팽히 맞서며 치고받는 논쟁이 아니라 휙휙 내달리는 이야기 안에서 다수가 믿었던 정의 혹은 정답을 비틀며 질문을 던진다.
끔찍한 폭력 안에서 피어난 ‘존속 살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는 모두 조금씩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대사, 오이디푸스를 존속 살해범이 아니라고 확신한 해설을 통해 작가의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연극은 질문에 대한 고민을 관객에게 던진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S는 마르틴에게 연민을 느끼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아 S를 기다리는 마르틴을 통해 단절된 관계의 외로움을 절감한다. 그런 S를 보며 페데리코는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돼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보는 것 같다며, 다시 정답과 오답이 정해진 세계로 S를 끌고 온다.
같은 공간에서 1인 2역을 연기하는 마르틴과 페데리코 덕에 연극은 쉽지 않다. 인물 전환이 모호하고, 의도된 헷갈림을 가져온다. 철창 안은 마르틴이 갇힌 교도소이자, 페데리코가 마르틴을 연기하는 세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물 전환에 대한 힌트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철창의 무대 위로 설치된 5대의 스크린, 철창의 열고 닫는 문이 마르틴과 페데리코를 구분하는 신호다. 철창 위 스크린은 CCTV처럼 마르틴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1인 2역을 맡은 이주승의 연기가 훌륭하다. 늘 물음표를 던지는 마르틴과 그 물음표에 답을 하는 것 같은 페데리코의 특징을 구분하고, 방대한 양의 대사를 흔들림 없이 전달한다. 이주승이 1인 2역을 연기하는 무게를 안고 있다면, S 역의 이석준은 마르코와 페데리코를 대하는 과정에서 2명의 인격이 된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마르틴을 마주하며 그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 이야기에 대한 모든 감정은 페데리코에게 토로하는 모습을 통해 한 인물이 가진 온도차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각각의 상황과 사람을 대할 때마다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처럼 다가와 흥미롭다.
이 연극이 보다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실화를 기반한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흔하다. 인류가 존재해온 모든 곳에서 존속 살해가 이어졌다.
연극은 범죄의 결과 못지 않게 원인에 주목한다. 마르틴은 지독한 폭력에 시달리며 간질을 앓았고, 밤이면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제목은 ‘테베랜드’다.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의 땅 테베는 신을 분노케 해 많은 인물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곳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스스로 두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가 대표적이다. 연극에서 테베는 상처와 결핍으로 얼룩져 드러내기 힘든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말한다.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꺼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철창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든다. S는 테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본질적으로, 오이디푸스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에게 약간은 막연하게 느껴지는 테베를 지니고 있어요. 조금 혼란스럽고 어두컴컴한 곳. 저도 모르죠. 일종의 불가해한 영역 같은 거랄까.”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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