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투자 위축에 정책 고장…한국 경제 12년째 실력 발휘 못해
◆ 매경 포커스 ◆
실력을 평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절대 점수를 보고 평가하는 절대평가 방식이다. 100m 달리기를 할 때는 무조건 기록이 가장 좋아야 한다. 절대 점수보다 상대적인 순위가 중요한 상대평가도 있다. 월드컵 경기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력을 유지해 1등만 하면 된다. 그런데 국가경제의 성적은 이런 방식으로 평가하기가 어렵다. 각국이 처한 경제적 위치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22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가장 높았던 나라는 남미 서안에 있는 가이아나다. 이 나라의 성장률은 62.3%를 기록했다. 같은 해 미국 성장률(2.1%)의 30배에 달한다. 절대평가를 한다면 가이아나가 미국보다 경제 성적이 30배 이상 우수하고 상대평가 방식을 적용해도 미국보다 순위가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런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선진국으로 갈수록 성장률이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해 각국의 경제 잠재력을 정하고 이를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기준으로 성적표를 매기는 방식이 활용된다. 스포츠나 게임에 비유하자면 골프나 당구를 칠 때 각자 실력에 맞는 수준을 정하고 이 수준을 얼마나 달성했는지에 따라 평가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국가의 경제 성적 평가에 활용되는 지표 중 하나가 잠재GDP다. 이는 한 나라의 인구와 자본 기술 등 가용 자원을 동원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상의 생산 가치를 말한다. 한마디로 경제의 기본 실력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활용해 계산하면 2022년 미국의 잠재GDP는 22조2300억달러, 한국은 1조5357억달러 정도다. 미국이 한국보다 14배 이상 많다. 다음 실제 GDP가 잠재GDP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놓고 경제 성적을 매긴다. 실제 GDP가 잠재GDP를 능가하면 실력보다 더 많이 생산한 것이고 미달하면 실력 발휘를 못한 것이다. 그런데 10년이 넘게 실제 GDP가 잠재GDP에 미달한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평소 실력이 80점 정도 맞을 수 있는 학생이 매번 50~60점을 받는다면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기준을 적용한다면 한국 경제는 2010년대 이후 단단히 고장 났고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
IMF가 발표하는 'GDP 갭률'을 통해 각국 경제를 평가해 보면 2012년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성적이 유독 안 좋게 나온다. GDP갭 비율은 잠재GDP에서 실질GDP를 뺀 수치를 잠재GDP로 나눈 값이다. 실물경제가 경제의 기본 실력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성과를 냈는지를 평가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GDP 갭률을 통해 잠재GDP를 추정하고 이를 실질GDP와 비교해 본 결과 우리나라는 2012년부터 2022년까지 11년간 실질GDP가 잠재GDP에 상당폭 미달했다.
예를 들어 2011년 우리나라 실질GDP는 1479조원, 잠재GDP는 1471조원으로 계산됐다. 그해 우리나라는 기본 실력보다 8조원 이상 더 많이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 내고 소비했다. 2012년에는 실질GDP는 1515조원, 잠재GDP는 1521조원으로 관계가 역전됐다. 실력보다 6조원가량 생산을 못했다. 이때부터 우리 경제는 만성적인 부진의 늪에 빠졌다. 2013년에 실질GDP는 1563조원, 잠재GDP는 1570조원으로 실질GDP가 잠재GDP에 7조원 이상 못 미쳤다. 이런 현상이 12년간 계속돼 2022년에는 실질GDP가 1969조원, 잠재GDP는 1971조원이었다. 올해는 이 차이가 더 커질 전망이다. IMF에 따르면 2023년 우리나라 실질GDP는 1996조원, 잠재GDP는 2012조원으로 실질GDP가 16조원가량 모자랄 것으로 추정됐다.
우리 경제가 늘 이랬던 것은 아니다. 1980년 이후 2011년까지의 추세를 살펴보면 우리 경제는 한두 해는 실력보다 더 많이 생산했고 그다음 한두 해는 실력보다 더 적게 생산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경제의 기본 실력을 중심으로 위아래로 출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12년간 연속으로 실질GDP가 잠재GDP에 못 미쳤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우리 경제의 문제가 도드라진다. 경제에 충격이 오거나 불황이 닥치면 실질GDP가 잠재GDP에 못 미치는 기간이 길어진다. 많은 나라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가 닥친 2020년을 전후해서 실질GDP가 잠재GDP에 상당폭 못 미치는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은 충격으로부터 회복해 실질GDP가 잠재GDP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나름대로 경제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준 셈이다. 1990년 이후 '30년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은 2016~2019년 실질GDP가 잠재GDP를 넘어섰다. 2008년 금융위기의 발원지 미국도 한동안 장기 불황을 겪었지만 2021~2023년에는 복원력을 발휘해 실질GDP가 잠재GDP를 능가했다.
경제 규모가 한국과 비슷한 호주 스웨덴 캐나다 등도 비슷한 회복력을 발휘했다. 2011년 이후 12년 넘게 잠재GDP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한국의 경제 회복력이 상실된 이유는 뭘까. 경제 전문가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컸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소비와 투자의 심각한 위축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0년대 9%가 넘었던 민간소비 증가율은 2020년대에는 1%대로 급락했다. 2010년대 들어 가계부채가 소득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난 점이 이유로 꼽힌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13년간 가계대출과 판매신용을 합한 우리나라 가계신용의 평균 증가율은 6.9%로 계산됐다.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총소득 증가율 3.9%를 훨씬 뛰어넘는다. 부동산 가격 불안으로 일단 빚내서 집을 사고 소득으로 대출 원리금 갚기에 바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소비는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기업 투자도 사정은 비슷하다. 1990년대 15%가 넘었던 민간투자 증가율은 2020년대에는 3% 밑으로 뚝 떨어졌다. 미래 성장동력과 직결되는 설비투자도 비슷한 비율로 떨어졌고 연구개발(R&D)과 관련한 지식재산 투자 증가율은 같은 기간 20%대에서 4% 선으로 급락했다. 하락 속도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빠르다. 위험을 감수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기업가정신이 퇴색되고 각종 규제와 노사 분쟁 등으로 갈수록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투자 감소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소비와 투자 부진이 이어지면 이는 미래 성장동력을 갉아먹고 이는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나타난다. IMF 자료로 계산한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1980년대 9.3%에서 1990년대에는 7.2%, 2000년대에는 4.7%, 2010년대에는 2.9%, 2020년대에는 2.1% 등이다. 2% 정도의 잠재성장률은 우리나라보다 경제 규모가 10배 이상 큰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경제 규모에 비해 잠재성장률이 낮다는 의미다. 실물경제가 위축되면서 경제의 잠재능력을 깎아 먹고 이는 다시 실물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 고리가 2012년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경제의 실력은 점점 떨어지지만 그 실력만큼도 성과를 못 내는 것이 우리 경제의 현주소다.
경제가 실력 발휘를 못할 때 정부가 경제정책을 펴서 일시적으로 경제를 부양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은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실패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경제정책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정책의 연속성은 떨어졌다. 국가의 미래보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 경제정책이 동원되는 포퓰리즘적인 행태도 강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보신주의에 빠지고 시장의 기대를 뛰어넘는 정책의 과감성은 실종됐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에 이어 2020년 코로나19로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무제한 양적 완화'라는 정책을 내놔 시장을 뒤흔들었다.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과 대규모 규제 완화는 후임 기시다 후미오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뒤늦게 성과를 발휘하고 있다. '과감성과 뚝심'이라는 경제정책의 핵심 원칙이 2010년 이후 우리 정부 정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보수와 진보 정권이 번갈아가며 들어섰지만 어느 정권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도 이 같은 추세는 이어진다. IMF는 2024년에도 우리나라 GDP갭 비율을 -0.548%로 추정했다. 내년에도 여전히 실질GDP가 잠재GDP에 한참 못 미친다는 예상이다. 거시경제 환경도 녹록지 않다. 한국과 미국 간 기준금리 차이가 2%포인트나 나는 상황에서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낮추기는 어렵다. 국가채무가 늘어나면서 재정도 위태롭다. 정부가 재정에서 돈을 풀면 국가 신인도 하락과 국채금리 상승으로 자금시장이 요동칠 위험이 크다. 거시정책보다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부동산 가격 안정과 가계부채를 줄이기 위한 구조적·제도적 접근과 기업들의 생산적인 투자를 유도할 수 있는 규제 완화와 노사관계 개혁 등도 필요하다.
구조 개혁의 필요성은 2010년대 이후 10년 넘게 요구된 문제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한 정부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국민과 정치권을 설득하고 전략을 실천하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은 없었다. 그 결과 구조 개혁은 번번이 실패했다. 과거 정권의 우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영우 국제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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