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스 빙하가 만든 명작…가르다호수 시르미오네와 루가나 와인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최현태 2023. 8. 2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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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가 사랑한 시르미오네/알프스 빙하가 만든 가르다 호수 맑은 물 즐기는 완벽한 ‘쉼’ 기다려/와인산지 루가나 화이트 품종 투르비아나 미네랄·산도·과일향 매력 ‘뿜뿜’/카 데이 프라티 1400년대부터 와인빚은 루가나 터줏대감
시르미오네 가르다호수.
어찌 이리 맑고 투명할까. 갑자기 시력이 ‘2.0’으로 좋아진 듯, 호수 바닥 아주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 또렷하다. 참지 못하고 살포시 발을 담근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길처럼 부드럽게 발목을 어루만지는 찰랑거림. 귓불을 스치는 상쾌한 바람. 머리 위로 부서지는 따사로운 햇살. 고개를 들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알프스 자락 만년설까지. 빙하가 만든 바다처럼 거대한 가르다(Garda) 호수 위로 작은 새 꼬리처럼 날렵하게 뻗은 작고 예쁜 마을 시르미오네(Sirmione)로 들어서자 완벽한 ‘쉼’이 어서 오라고 반긴다.
시르미오네와 카 데이 프라티 위치.
가르다 호수 백조.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가 사랑한 시르미오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여인의 흐느끼는 목소리는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 등장하는 아리아 ‘정결한 여신’. 오랜만에 다시 들어 보니 마리아 칼라스가 왜 세기의 소프라노이자 오페라 최고의 디바로 불리는지 잘 알겠다. 그가 부르는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지금 들어도 전율이 온몸을 엄습할 정도다. 그런 마리아 칼라스도 시르미오네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됐나 보다.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첫 남편 조반니 바티스타 메네기니와 별장을 짓고 사랑을 나눈 곳이 바로 시르미오네이니 말이다. 칼라스뿐 아니라 괴테, 스탕달, 바이런, 릴케 등 수많은 대문호가 영감을 받았다니 시르미오네는 정말 특별한 곳인가 보다.
시르미오네 전경과 카툴루 유적. 이탈리아관광청 제공
북극점을 통과하고 한 차례 환승을 거친 비행기는 이탈리아 베네토주 베로나 공항을 코앞에 두자 놀라운 풍경을 선사한다. 발밑에 거대한 가르다 호수가 펼쳐지고 하얀 만년설 덮인 알프스 산맥이 둘러선 풍경에 잠이 갑자기 확 깬다. 아무 생각 없이 낮에 도착하는 비행 일정을 짰는데 예상치 못한 멋진 풍경을 만나니 로또를 맞은 기분이다. 베로나에서 차를 몰아 50분이면 닿는 가르다 호수는 마조레 호수, 코모 호수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 3대 호수로 불리는데 그중 가르다 호수의 규모가 가장 크다. 무려 면적 370㎢, 둘레 144㎞, 수심 300m를 넘어 바다와 별 차이가 없다. 수만년 전 알프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가르다 호수 최남단에 호수 중심부를 향해 가늘고 긴 독특한 모양으로 뻗어 나간 반도가 시르미오네다. 그리스어로 ‘꼬리’라는 뜻이니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섬은 아니지만 다리를 건너야 하기에 섬처럼 보인다.
시르미오네 입구 로카 스칼리제라.
시르미오네 노천카페.
시르미오네 로카 스칼리제라. 이탈리아관광청 제공
시르미오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도로가 막히기 시작한다. 다리 가까이 갈수록 주차하기 어려우니 빈 곳이 나타나면 주저하지 말고 차를 세워야 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타임머신을 탄 듯, 중세 시대로 빨려 들어간다. 다리 끝에 선 고색창연한 로카 스칼리제라 성 덕분이다. 호수를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도 중간쯤에 지은 요새로 1280년 시르미오네를 통치하던 베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인 스칼라 가문이 건설했다. 사각의 성벽 안으로 물이 들어오도록 만들었기에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독특한 풍경에 눈을 떼기 어렵다. 성안에는 딱히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입장료까지 받지만 여행객들이 몰려 줄이 아주 길다. 150개 계단을 올라 전망대에 서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 건물의 예쁜 지붕과 시르미오네 끝자락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산타 안나 델라 예배당.
로카 스칼리제라.
다리를 건너자마자 왼쪽에는 10여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산타 안나 델라 예배당이 있으니 놓치지 말기를. 로카 스칼리제라를 오른쪽에 두고 길을 따라 내려가면 가르다 호수의 맑은 물을 만난다. 반짝반짝 윤슬을 쏟아내는 호수를 배경으로 너도나도 인생샷을 찍느라 바빠지는 시간. 눈에 오래오래 담아 두고 싶은 환상적인 풍경이다. 이곳에서 시르미오네 북쪽 끝까지 다녀오는 데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볼 게 많아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된다. 산타 마리아 델라 네베 성당을 지나면 뮤즈 해수욕장이 등장하고 조금 더 걸으면 마리아 칼라스가 살던 별장이 그대로 있는 공원에 도착한다. 길은 비온데 해수욕장으로 이어져 빙하가 만든 깨끗한 물에서 쉬어 가기 좋다.
시르미오네 가르다 호수.
산책로 끝에는 카툴로 유적지가 기다린다. 시르미오네는 기원전 6∼5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면 카툴로 유적지는 2∼3세기 지은 직사각형 가옥 유적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로마 거주지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시대를 살던 고대 로마의 서정시인 발레리우스 카툴루스의 이름을 땄는데 그는 ‘모든 섬과 반도의 진주’라며 시르미오네를 극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카툴루스가 산 것은 아니고 그의 후손들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빼어난 풍경 덕분에 시르미오네는 이미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와 베로나 귀족들의 휴양지로 큰 인기를 누렸다.
시르미오네 페리 선착장.
시르미오네는 1800년대 중반까지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또 1278년 2월3일 발생한 ‘카타리파 학살’의 아픈 역사도 남아있다. 13세기 프랑스에 살던 카타리파 사람들은 신약성서를 고집하다 십자군의 박해를 받았는데 이를 피해 가르다 호수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하지만 13세기 말 카타리파 사람 200명이 체포돼 베로나의 원형경기장 아레나 디 베로나로 끌려가 모두 화형당하고 말았다.
작은 마을이지만 호텔도 꽤 있고 곳곳에 구경거리가 많아 하룻밤 머물면 더 여유로운 휴식을 즐길 수 있다. 길을 걷다 유황 냄새가 나면 섭씨 70도의 물이 솟아나는 천연 온천이다. 발을 담그고 여행의 피로를 풀기 좋다. 중세풍의 골목마다 노천 카페가 즐비하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거나 커피 한 잔의 작은 호사도 누려 보길.
루가나 와인산지.
카 데이 프라티 전경.
카 데이 프라티 전경.
◆칼라마리와 즐기는 루가나 투르비아나
가르다 호수는 농어 등 다양한 어종이 서식해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오징어튀김인 칼라마리 프리토가 인기 메뉴인데 아주 잘 어울리는 와인이 바로 가르다 호수 주변의 유명한 와인 산지 루가나 DOC(이탈리아 와인 원산지 통제 명칭)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이다. 트레비아노 품종으로 빚으며 이곳 사람들은 투르비아나라고 부른다. 트레비아노와는 좀 다른 루가나의 토착 품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카 데이 프라티 포도밭.
카 데이 프라티 테이스팅룸.
카 데이 프라티 와인들.
사실 에밀리아로마냐 등 주로 이탈리아 중부에서 생산되는 트레비아노는 그리 매력 있는 품종은 아니다. 별 개성이 없어 향이 밋밋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위니블랑’으로 불리며 코냑과 아르마냐크 지방에서 브랜디를 만드는 데 주로 쓴다. 하지만 루가나는 1969년에 DOC를 받았을 정도로 일찌감치 품질을 인정받았다. 3500만년전 알프스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가르다 호수 주변의 토양은 석회질이 풍부한 진흙 토양이라 투르비아나가 짭조름한 미네랄을 잔뜩 움켜쥐고, 와인의 최대 덕목인 복합미와 우아함까지 발산하는 덕분이다. 여기에 산도가 뛰어나 장기 숙성까지 가능하다.
카 데이 프라티 지하 셀러.
이런 루가나 와인의 터줏대감이 카 데이 프라티. 한눈에도 수백년 된 건물로 보이는 와이너리로 들어서자 방문객들이 차 트렁크에 와인 박스를 여러 개 옮겨 싣는다. 와이너리 관계자는 “가격이 착한 데다 맛도 좋으니 다들 한번 올 때 왕창 사 간다”고 귀띔한다. 프라티는 수도사란 뜻으로 와이너리 이름에 오랜 역사가 남었다. 카르멜리타니 수도원이 1400년대부터 이 자리에서 와인을 만들었고 ‘시르미오네의 와인 셀러가 있는 수도사들의 집’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실제 와이너리 가족들이 식사 장소로 사용하던 방은 이런 수도원의 역사를 전한다. 개·보수하면서 밖에 있던 600년 된 문을 보존하기 위해 그대로 떼어 내 벽을 장식했다. 문에는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문장과 마리아, 예수, 베드로를 상징하는 별 3개가 담겨 있다.
카 데이 프라티 오너 안나 마리아(왼쪽).
카 데이 프라티 와인을 소개하는 마리아 끼아라 달 체로(왼쪽).
피에트로와 산타 로사.
베로나 근교에서 와인을 생산하던 도메니코 달체로의 아들 펠리체 달체로가 1939년 와이너리를 인수해 4대째 가족 경영으로 와인을 생산한다. 루가나가 DOC 등급을 획득하는 데 펠리체의 아들 피에트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12년 피에트로가 세상을 떠난 뒤 부인인 산타 로사와 딸 안나 마리아, 두 아들 이지노, 잔 프란코 등 세 남매와 이들의 자식들이 정성과 열정으로 와이너리를 운영 중이다.
카 데이 프라티 전통방식 스파클링 브뤼와 로제.
카 데이 프라티 이 프라티 루가나 2007, 2017, 2022 빈티지.
많은 여행자들이 행복한 미소로 와인을 시음하는 테이스팅룸으로 들어서자 마리아 여사가 인자한 미소로 기자를 맞는다. 먼 길 왔다며 전통 방식으로 만든 스파클링을 내놓는데 한 모금 마시자 신선한 산도와 우아한 효모 풍미가 여행의 피로를 순식간에 날린다. 기분 좋은 산도 덕분에 김치를 비롯해 매콤한 한국 음식과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 다음은 본격적인 루가나 화이트 시음 차례. 이 프라티 루가나(I Frati Lugana)는 카 데이 프라티의 명성을 이어온 플래그쉽 와인으로 신선한 스타일의 루가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매력적인 와인이다. 2022년산, 2017년산에 이어 2007년산을 내놓는다. 놀랍다. 2007 빈티지는 13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산도가 짱짱하다. 잘 익은 사과 향에서 꿀 향까지 시간의 흐름속에 복합미는 더욱 짙어져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니 저절로 ‘엄지 척’이다. 어린 빈티지는 신선한 레몬과 살구향, 흰꽃과 아몬드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 프라티는 발효가 끝나면 효모 앙금과 함께 6개월간의 숙성해 풍부한 효모향도 느껴진다.  카 데이 프라티 와인은 롯데칠성음료가 수입한다.
카 데이 프라티 프롤레티노 루가나.
카 데이 프라티 프롤레티노 루가나(Brolettino Lugana)는 첫번째 압착한 주스만을 사용해 스테인레스 스틸 탱크에서 발효한 뒤 오크 바리크에서 젖산 발효를 진행하고 바리크에서 10개월간 숙성한다. 잘 익은 노란 사과, 복숭아, 장미꽃 잎, 브리오쉬, 바닐라 향이 매우 복합적이고 화려하게 어우러진다. 
카 데이 프라티 트레 필러(Tre Filer)와 디저트 매칭.
가르다호수와 시르미오네 풍경을 즐기는 카 데이 프라티 디저트 카페.
차로 5분 거리에 카 데이 프라티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루가나 트라토리아도 있어 여행자들이 카 데이 프라티 와인과 잘 어울리는 메뉴를 함께 즐기기 좋다. 동네 맛집으로 소문나 평일 점심인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다. 바로 옆 건물에서 케이크 전문점 카페테리아 파스티체리아 라 페니체도 운영하니 꼭 들러 보길. 야자수가 이국적인 야외 테라스에 많은 여행자들이 가르다 호수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와인과 디저트를 즐긴다. 오전에 다녀온 시르미오네가 그림엽서 같이 펼쳐진 풍경은 덤으로 얻으니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olar),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등을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selles) 심사위원, 소펙사 코리아 소믈리에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알자스와 이탈리아, 호주, 체코, 스위스,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

시르미오네(이탈리아)=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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