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성폭행·살해범도 우울증…'범죄의 불씨' 정신질환 치료 시스템이 없다
조기 진단·치료 무엇보다 중요…복지부 "전 국민 정신건강 혁신안 마련"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 서울 신림동의 한 공원 인근에서 대낮에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 30대 최모씨에 대해 경찰이 20일 '강간살인죄'를 적용하기로 한 가운데, 이 남성이 과거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는 받지 않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감형을 노리고 의례적으로 '정신병력'을 들먹인 가능성도 있지만 최근 잇따라 벌어진 흉악범죄 피의자들이 모두 정신질환 진단을 받았다는 점에서 조기 치료와 관리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직업 없이 부모와 함께 살던 최씨는 과거 우울증 등의 진단을 받았지만 치료는 하지 않았다고 가족들이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우울증이 성폭행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우울증도 심해질 경우 망상 증상을 보이긴 하지만 대개는 자신을 해하는 행위(자살이나 자해)를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조울증(양극성 정동장애)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기분이 들뜨는 조증과 기분이 가라앉는 우울증이 왔다갔다 하는 조울증이라면 연관성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적이 있지만 치료를 받지 않아 왔고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최 씨는 최근 일어난 흉악범죄들의 피의자들과 닮아있다.
지난 19일 서울 지하철 2호선에서 20대 남성 2명을 공격해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 50대 남성도 조현병 치료를 받다 중단한 사실이 알려졌다. 서울 마포경찰서에 따르면 특수상해 혐의로 체포된 50대 남성 B씨는 조현병을 진단받아 치료를 받았지만 2019년 중단했다. 이 남성은 경찰 조사에서 “열차 안에서 여러 사람이 공격해 방어 차원에서 폭행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3일 흉기를 휘둘러 14명의 사상자를 낸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의 피의자 최원종(22)도 마찬가지다. 3년 전 조현성 인격장애 진단을 받았으나 치료를 중단했고 경찰 조사 과정에서 "특정 집단이 나를 괴롭히고 죽이려 한다"고 밝히는 등 망상 증상을 보였다고 알려졌다.
최원종이 앓고 있다는 조현성 인격장애도 공상 등 기이한 사고 패턴을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조현병 만큼 심한 망상은 보이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최씨가 제때 치료를 받지 않아 조현병으로 악화했거나 조현성 인격장애 진단 당시 조현병 초기 단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요즘 연이어 발생하는 이 사건들이 치료와 관리만 잘 이루어졌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라고 입을 모은다. 손지훈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환청, 망상, 사고 장애 등 조현병 환자에게 나타나는 급성 증상인 ‘양성 증상’은 약으로 관리가 아주 잘 된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 나빠지기 전에 조기에 치료받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치료에 손놓고 있는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해줄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다는 데 있다.
홍나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정신질환자는 망상이나 환각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치료를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서 “현재로선 타인을 해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 중증 정신질환자라고 하더라도 현저한 자해·타해가 있어야만 입원을 할 수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신질환자를 강제로 입원시키려면 절차가 꽤 까다롭다. 현행법상 정신질환자를 비(非)자의, 다시 말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입원시키는 방법으로 △보호자 2명 이상의 신청 △서로 다른 병원에 소속된 전문의 2명 이상의 일치된 소견 △경찰과 의사 동의로 3일 입원하는 ‘응급 입원’ △전문의 진단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장이 명령하는 ‘행정 입원’ 등이 있다.
미국과 유럽, 대만은 자해·타해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를 발견하면 경찰, 소방이 의료기관까지 책임지고 이송해야 한다. 일본도 신고가 접수되면 지자체가 전문의를 집으로 보내 상태를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정신건강복지법 응급입원규정에 따라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격리 조치를 할 수 없다. 정신건강복지센터가 할 수 있는 조치는 환자를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다.
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비자의 입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호의무자 입원과 의무조항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며 “초기 현장 대응 인력에 적절한 권한을 부여하고 경찰에 의한 병원이송 또는 찾아가는 평가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지적이 계속되자 보건복지부는 관계부처들과 태스크포스(TF)를 관련 제도 개선을 논의 중이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지난 1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전 국민 정신건강 혁신 방안’을 마련해 발표하겠다"며 "치료에만 중점을 두기보다 예방·조기 발견-치료 내실화-일상 복귀·퇴원 후 체계적 지원 등 전 주기적으로 관리하는 방안을 조속히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조속한 대책 마련도 중요하지만, 이들이 사회에서 낙인찍히지 않고 올바른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손지훈 교수는 “정신질환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이 인정을 안 하고 치료를 안 받고 싶어 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더욱 심해지고 환자들은 더욱 숨어들게 될까봐 심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신질환자들이 조기에 치료받고 도움 받으면 ‘내가 그때 좀 아팠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사회가 이들이 양지에 나와 최대한 빨리 치료받을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s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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