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선생 외손자 안커디씨 “이승만기념관 건립은 잘못된 일”
공적 높이려 과 가리면 역사 수정주의적 행태”
한국말에 서툴지만 한국 역사를 한국인보다 많이 아는 미국인 필립 안 커디씨(Philip Ahn Cuddy·68)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외손자다.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독립운동과 후세 양성에 힘쓴 도산의 정신이 커디씨에게도 유산처럼 그대로 대물림된 듯했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커디씨는 “도산의 역사를 알리는 게 나의 팔자”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팔자’보다는 ‘운명’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겠냐고 묻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팔자, 팔자”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황병학 선생의 손자인 황성민씨의 통역 도움을 받았다.
커디씨의 외할아버지인 도산과 외할머니 이혜련 선생, 어머니 안수산 선생은 모두 독립유공자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생계와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공부하고자 미국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화가 유명하다. 도산의 배우자 이혜련 선생은 도산이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 뒤 홀로 5남매를 길렀다. 이 선생은 일터에 나간 커디씨의 부모를 대신해 도산의 사진과 글들을 보여주며 도산의 인생 궤적을 가르쳤다.
도산의 5남매 중 셋째이자 장녀인 안수산 선생은 미 해군에 입대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이다. 여성 최초 포격술 장교이자 태평양 전쟁에서는 암호해독가로 활약했다. 해군에서 같이 암호해독가로 일한 아일랜드계 미국인과 결혼해 커디씨를 낳았다. 커디씨가 태어난 1955년 메릴랜드주에서는 인종 간 결혼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커디씨 남매는 일반 병원이 아닌 군 병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제와 싸웠고 부모님은일제 및 인종차별 제도와 맞서 싸웠다. 커디씨는 자신의 운명은 역사를 가리거나 왜곡하려는 세력과 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떤 인물의 공적을 드높이기 위해 그 사람의 어두운 단면을 가리는 것이야말로 역사 왜곡이라는 것이다.
커디씨는 “도산의 가장 큰 실수는 이승만을 지지한 것”이라고 했다. 미주 한인 사회를 이끌던 도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를 출범하는데 기여했다. 이 전 대통령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도 도산과의 사전 교감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임정 안팎에서 이 전 대통령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었지만 도산은 이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후 독립운동 노선을 두고 갈등을 벌였다. 이 전 대통령의 외교전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하자 도산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한국 사람들이 도산에 대해 잘 몰라요. 도산이 평양 출신인 데다 이승만보다 학벌이 안 좋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이승만이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고요. 정작 상하이에서 임정 활동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은 도산입니다. 이승만은 도산과 갈등이 격해지자 1925년 미국 시카고에서 도산을 공산주의자로 몰았습니다. 도산이 경찰에 체포된 기록도 제가 갖고 있어요. 당연히 무혐의로 풀려났고요.”
한국 정부는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예산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4월 국가보훈부는 기념관 건립 사업에 3년간 약 460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커디씨는 이 같은 움직임이 “잘못됐고 말도 안 되는(wrong and ridiculous) 일”이라고 했다. 공적을 높이기 위해 과를 가리는 것은 “역사 수정주의적 행태”라며 “제주4·3사건으로 한국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 사람이 이승만 아닌가”라고 했다. 그는 “진실이 아닌 것은 역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남북한 사람들과 서핑하는 것이 꿈”
도산은 자식들에게 늘 ‘훌륭한 미국 시민으로 살되 한국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커디씨는 가족이 미국에 뿌리내린 것은 고통과 행운을 동시에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가족은 평생 한국을 그리워하면서 살아야 했고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렸지만 미국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어머니는 그 시대에 군에 복무할 수 있었고 커디씨의 외삼촌이자 도산의 아들인 안필립·안필선·안필영씨는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커디씨는 어머니의 권유로 10대 때 서핑을 시작한 1세대 한국계 서퍼다.
커디씨는 지난 광복절을 계기로 경기 시흥 웨이브파크에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만났다. 어린 후손들에게 도산의 ‘애기애타(愛己愛他·나를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라)’ 정신을 공유하고 서핑도 직접 가르쳤다. 그는 또 타고 싶다며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8살 아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서핑은 그가 한국과 교감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
서프보드에 태극 마크를 새긴 커디씨는 남북한 사람들과 함께 바다에서 서핑하는 것이 꿈이다. 분단된 한국은 아직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며 도산의 고향인 평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할 수 있는 잠수함 이름을 도산안창호함이라고 지은 것도 비판했다. 북한을 공격하려고 만든 잠수함에 어떻게 평양을 그리워했던 도산의 이름을 쓸 수 있냐는 것이다.
“도산의 삶의 철학이 진실됨(sincerity)이었다면 이혜련 선생은 용기(courage), 안수산 선생은 끈질김(persistence)이었어요. 제 철학은 책임감(accountability)입니다. 통일된 한반도, 도산의 고향에서 도산의 역사를 알리는 날이 오면 제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되겠죠.”
유새슬 기자 yoos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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