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성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성폭력은 지금도 있다
이현정 기자 2023. 8. 20. 14:03
[더 스피커] '56년 만의 미투'와 '비동의 강간죄' 도입 논의
1990년 개봉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줄거리입니다. 1988년 A 씨가 겪은 실화가 배경입니다. 혀를 물어뜯긴 남자는 A 씨에게 위자료를 요구하며 상해죄로 고소했고, A 씨는 남자들을 강간치상죄로 맞고소했습니다. 남자는 술에 취한 A 씨를 부축하던 중 호기심으로 입을 맞추려다 혀를 물린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A 씨는 남자 둘에게 끌려가 성추행을 당했고, 반항하자 무릎으로 차였고, 강제로 입을 맞추기에 혀를 물었다고 항변했습니다.
여성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에 항의했습니다. 항소심을 위한 7명의 공동변호인단도 꾸려졌습니다. 사회적 관심 속에 2심 재판부는 A 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은 '그동안 죽어 있던 정당방위의 법정신을 되살려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판결문에도 적었듯 '피해자다움'에 대한 세간의 가혹한 잣대는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이 사건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고 의미 있는 판결을 이끌어 냈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기어코 법정에 섰을 땐 더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당시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 100명 중 2명만 신고를 한다'는 연구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오랜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B 씨는 9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가족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못했던 B 씨는 이후 정신분열증과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21년 만인 1991년, 아저씨를 찾아가 살해했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다"라던 B 씨의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을 파괴하는 어린이 성폭력의 잔혹함을 드러냈습니다.
이듬해에는 대학생 C 씨가 남자친구와 함께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C 씨는 9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됐던 근친 성폭력의 실상은 참혹했습니다. 오랜 기간 계속됐던 의붓아버지의 변태적인 범행, 그의 사회적 지위, 어린 연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비극적인 두 사건은 1994년 1월 성폭력 특별법(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특별법이 마련되면서 당시 형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던, 예를 들어 공공밀집장소에서의 성추행이나 전화·컴퓨터 등 통신매체를 통한 음란행위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성폭력 가해자의 보호관찰', '피해자에 대한 비밀 누설 금지', '심리 비공개'처럼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조치도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성계에서 전면폐지를 요구해 왔던 '친고죄(피해자가 고소해야 기소 가능한 범죄)'는 첨예한 찬반 끝에 '근친 강간과 시설수용여성 강간, 장애인 강간, 미성년자 강간 등'에만 폐지됐습니다. B 씨나 C 씨 같은 사례가 아닌, 수많은 성인 여성이 당하는 '대다수의 강간'은 여전히 본인의 고소 없이는 처벌이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고소기한도 종전보다 6개월 늘어난 1년에 그쳤습니다.
특별법이 마련된 뒤 형법도 조금씩 시대를 반영해 개정됐습니다. 1995년 말 형법에 성폭력 범죄를 규정하는 부분(297조~306조)의 제목을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꿨습니다.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정조를 잃은 것'이란, 수많은 피해 여성들을 옥죄어 온 믿음을 깨뜨린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과거 성폭력 사건들은 피해자의 이름과 얼굴이 널리 공개된 바 있습니다. 피해자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뀐 점을 감안해, 이 글에서는 익명으로 다뤘음을 미리 밝힙니다.
'혀'만도 못한 방어
한 여자가 늦은 밤 길에서 두 남자에게 성폭력을 당한다. 저항하던 여자는 남자의 혀를 물어 상황을 벗어나지만, 혀가 잘린 남자에게 고소당해 구속까지 된다. 여자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겪은 모욕, 남편 등 주위 사람들의 불신으로 고통받은 여자는 도움을 자청한 여성변호사와 함께 법정 다툼을 이어간다. 2심 재판 중 여자의 과거 사생활이 밝혀지면서 그는 남편과 갈등을 빚고 자살을 기도한다. 가까스로 회복한 여자는 결국 사건 현장에 있었던 시누이의 위증 번복으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받는다.
-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0년 개봉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의 줄거리입니다. 1988년 A 씨가 겪은 실화가 배경입니다. 혀를 물어뜯긴 남자는 A 씨에게 위자료를 요구하며 상해죄로 고소했고, A 씨는 남자들을 강간치상죄로 맞고소했습니다. 남자는 술에 취한 A 씨를 부축하던 중 호기심으로 입을 맞추려다 혀를 물린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A 씨는 남자 둘에게 끌려가 성추행을 당했고, 반항하자 무릎으로 차였고, 강제로 입을 맞추기에 혀를 물었다고 항변했습니다.
A 씨는 상해 혐의, 남자들은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각각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 판단은 세 사람 모두 '유죄'. 남자들의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인 A 씨에게까지 죄를 물은 건, A 씨가 혀를 물어 자른 게 '정당방위를 벗어난 과잉방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범행 장소가 상가가 밀집돼 있고 범인이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A 피고인이 당황하거나 공포에 떨어 혀를 깨물었다고 보기 힘들다. (중략) 강제키스를 피하기 위해 상대의 혀를 깨무는 행위와 물어뜯는 행위의 2단계로 나눠볼 때 A 피고인의 경우 깨무는 정도로 충분히 저지할 수 있는데도 물어뜯어 혀의 3분의 1을 절단한 것은 방위행위로서 한계를 뛰어넘은 과잉 행위다.
- 1심 판결 중
여성단체는 기자회견을 열고 판결에 항의했습니다. 항소심을 위한 7명의 공동변호인단도 꾸려졌습니다. 사회적 관심 속에 2심 재판부는 A 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은 '그동안 죽어 있던 정당방위의 법정신을 되살려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성적순결 및 신체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어하기 위한 상당한 행위로서 이는 법률상 범죄의 성립을 조각하는 사유인 정당방위에 해당한다. A 피고인이 당시 술을 먹었다거나, 식당을 경영한다거나, 밤늦게 혼자 다녔다거나 하는 등의 사정이 정당방위의 성립을 저해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 2심 판결 중
판결문에도 적었듯 '피해자다움'에 대한 세간의 가혹한 잣대는 엄연히 존재했습니다. 이 사건은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켰고 의미 있는 판결을 이끌어 냈지만, 성폭력 피해자가 기어코 법정에 섰을 땐 더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도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당시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피해자 100명 중 2명만 신고를 한다'는 연구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동네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찾아와서 그동안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해줘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A 씨는 억울하게 4개월간 감옥에 있었을 때와 재판정에서 사건 당시에 술을 마셨다는 부분을 계속 추궁당하면서 '강간당해 마땅한 상황'으로 몰고 가려는 검사와 가해자 쪽 변호사들의 태도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고 밝힌다.
- 1989년 1월 22일 자 한겨레 신문, 2심 선고 후 A 씨 인터뷰
"짐승을 죽였다" : 법을 만든 사건들
피고인은 밤새 법률서적을 뒤지며 9살 때 강간당한 것을 고소하겠다고 하여 남편이 소용없다고 하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기도 하더니 몰래 친정집에 가서는 피해자를 불러놓고 보상으로 금 7억 원을 요구하는 등 위 피해자만 만나면 사기가 왕성하여 청산유수로 말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여 (중략) 당시의 증상은 부적절한 분노, 난폭행동, 고립위축양상, 피해망상, 자책망상, 비논리적 언어, 심한 적막감 등으로 정신분열증의 진단을 받았으며….
- 2심 판결 중
이듬해에는 대학생 C 씨가 남자친구와 함께 자신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C 씨는 9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 됐던 근친 성폭력의 실상은 참혹했습니다. 오랜 기간 계속됐던 의붓아버지의 변태적인 범행, 그의 사회적 지위, 어린 연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C 양은 가정 내 폭력과 강간 피해자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폭력의 노예화' 과정을 거치면서 특수한 정신질환에 빠져 살인을 계획하거나 실행에 옮길 정신적 능력은 없다. C 양의 경우 가혹하고 반복적인 폭력의 결과, 구타 강간 천재지변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만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상태를 보이고 있다. C 양이 대학생이라는 표면적인 신분만으로 정신상태가 정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며, 지적기능과 인지기능은 성인이지만 감정처리와 의지-행동 기능은 유아 수준에 머물러 있다.
- 2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광일 한양대 의대 교수의 진술
비극적인 두 사건은 1994년 1월 성폭력 특별법(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특별법이 마련되면서 당시 형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었던, 예를 들어 공공밀집장소에서의 성추행이나 전화·컴퓨터 등 통신매체를 통한 음란행위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성폭력 가해자의 보호관찰', '피해자에 대한 비밀 누설 금지', '심리 비공개'처럼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조치도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여성계에서 전면폐지를 요구해 왔던 '친고죄(피해자가 고소해야 기소 가능한 범죄)'는 첨예한 찬반 끝에 '근친 강간과 시설수용여성 강간, 장애인 강간, 미성년자 강간 등'에만 폐지됐습니다. B 씨나 C 씨 같은 사례가 아닌, 수많은 성인 여성이 당하는 '대다수의 강간'은 여전히 본인의 고소 없이는 처벌이 불가능하단 뜻입니다. 고소기한도 종전보다 6개월 늘어난 1년에 그쳤습니다.
'친고죄', 그 무거운 짐
2012년 말 개정에선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대했습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자신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당하면, 죄를 물을 수 있게 된 겁니다. 이후 이별을 통보한 남성에게 성폭력을 하려 한 여성이 강간 미수 등 혐의로 처음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습니다.
▶ 관련 기사 : '친고죄' 폐지… 미성년 대상 성범죄 처벌 강화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1837721&plink=SEARCH&cooper=SBSNEWSSEARCH ]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모든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를 폐지한 겁니다. 여성계는 오랜 시간 피해자가 나서야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게 한 '친고죄' 폐지를 주장해 왔지만, '피해 여성의 사생활과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가로막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94년 성폭력 특별법을 만들면서 장애인·미성년자 등 일부에 대해선 친고죄를 폐지했지만, 그마저도 실제로는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법원이 '장애인 강간'의 조건을 좁게 해석하면서,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장애인 피해자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이현정 기자 a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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