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통의 영화 개념 바뀌고 있지만" 극장 지키는 류승완
조연경 기자 2023. 8. 20. 13:59
여름 스크린 박스오피스 1위 '밀수' 류승완 감독 인터뷰
2021년 팬데믹 여름 구세주 '모가디슈' 이후 2년만 컴백
흥행 이끄는 스타감독·오락영화 명장 우뚝…다시 '류승완 시대'
진정성 넘치는 절박함을 관객은 외면하지 않았다. 관객이 기다린 작품의 힘이 돋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괜찮은 영화가 환영 받는 건 또 아니기에 소통의 윈윈 효과가 빛난 건 사실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진다 하더라도 어쨌든 흥행의 기쁨을 맛 봤다. 여름의 구원투수, 다시 맞이한 '류승완 시대'다.
"중요한 건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명확한 바람을 이뤘다. 개봉 전 오랜만에 진행된 대면 인터뷰에서 쉽게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인사하고 인터뷰를 진행하려 한 류승완 감독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을 장면으로 각인됐다. 감독의 "절박하다"는 외침은 영화계에 건재해줘서 고마운 존재로 치환됐다.
2년 전 '모가디슈'에 이어 '밀수'까지 극장가 최대 성수기 여름 시장에서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지켰다. 특히 '밀수'는 모든 캐릭터의 힘이 빛나는 멀티 캐스팅 작품이지만 여성 투톱을 블록버스터 장르에 앞세웠다는 점에서, 흥행까지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향후 영화계 방향성의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시대의 흐름과 팬데믹 여파로 콘텐트의 제작 환경, 공개 방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걸출한 영화 감독들도 대부분 OTT의 맛을 한 번씩 '찍먹'할 때, 류승완 감독은 극장과 영화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너스레를 떨면서도,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이다"고 인정하면서도, 류승완 감독에게는 "굳이 극장용 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해야 하나?"라는 물음표가 아직 더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상업 오락 영화의 명장이자, 충무로를 대표하는 스타 감독으로 가장 필요한 시기 연이어 이름값을 증명했다. 그 움직임 자체 만으로 영화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 이제 더 더욱 어떠한 도전이든 신뢰와 믿음이 뒤따르겠지만, 그래서 더 많이 만나고 싶은 '류승완표 영화'다.
-2년 전에도 '모가디슈'로 여름 시장 총대를 멨다.
"여름 시장의 총대를 멘다기 보다는…. 일단 2년 전을 돌이켜 보면 오후 7시 이후에는 티켓 판매가 안 됐고 좌석 간 띄어 앉기를 해야 했다. 극장 관객이 3분의 1 정도 수준에서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뭘 해도 안되고 우리 인터뷰도 줌(화상)으로 하지 않았나.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자체가 사실상 금기 시 되는 상황에서 극장 영화를 개봉한다는 것이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모가디슈'가 개봉했을 당시) 많은 관객 분들이 호응을 해주셨다. 만약 '모가디슈'가 유머가 아주 풍부하고, 객석 반응이 굉장히 중요한 영화였다고 한다면 아마 그 때 개봉을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 개봉이라는 건 감독의 의지 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당시 나와 제작진 모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총대를 멘다'는 건 너무 좋게 봐주신 표현인 것 같고, 영화 업계에서 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있었던 사람으로서 '우리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는 것이었다.
'밀수'는 기본적으로 바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름에 보여 드려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름에 개봉한 이유가 가장 크다. '모가디슈' 때와는 조금 다르다. 여름 극장 시장 분위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계절이 중요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한 여름에 학교를 땡땡이 치고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을 개봉한 날 영화관에 달려가서 봤다. 되게 더웠는데,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열기까지 그대로 나에게 영향 줬던 것이 지금도 기억 난다.
그런 의미에서 ''밀수'는 관객들이 여름에 관람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컸다. 극장 사정은 이미 서서히 좋은 외화들이 나오고 있었고, '범죄도시'도 있지 않았나. 물론 '밀수'는 올 초 일찌감치 여름 개봉을 결정해 놓긴 했다. 2년 전 너무 혹독한 시기에 개봉하고 나니까 '이거보다 더 나쁘겠어? 더 최악이겠어?' 싶더라."
-'밀수'는 감독의 강점이 명확하게 보이면서 새로운 도전까지 담아낸 작품이다. 어떻게 메가폰을 잡게 됐나.
"소재 개발은 (제작사 외유내강) 조성민 부사장이 했다. '시동'을 촬영하기 위해 군산에 갔다가 박물관을 들렀는데 '70년대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했다'는 아주 짧은 한 줄의 설명을 봤다고 하더라. 그리고 미스터리 매거진 '미스테리아'에 곽재식 작가가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여성 밀수단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집으로 쓴 것이 있었는데 흥미를 갖고 있던 차에 두 가지가 같이 맞물렸다. 처음부터 내가 연출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각본이 나온 후에 '아, 이거 못 봤던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어 '내가 해보면 안돼?' 말했고, 부사장이 '시간 맞으시면 하는 것도 괜찮죠'라고 해 하게 됐다.(웃음)"
-'밀수'의 정체성이자 압권은 역시 수중 액션이다.
"난 기본적으로 액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액션을 바탕으로 작품마다 시대를 바꿔보기도 하고, 인물·직업을 바꿔보기도 하고, 총을 들고 싸우다가 칼을 들고 싸우기도 하고, 와이어를 타고 날아보기도 했다. 근데 물 속 액션을 펼친다는 건 나 스스로에게도 되게 새로웠다. 가늠이 잘 안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SF 영화처럼 무언가를 쫙 펼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특수 존재들이 아닌 현실적인 인물들이 물 속에서 액션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근데 내 입장에서 해녀들은 사실 초능력자에 가깝다. 해녀 분들이 기록하는 잠수 기록을 봐도 놀랍고, 생존하기 위해서 어떤 동력의 인계점을 벗어나 버리는데, 그런 사람들과 함께 액션을 펼친다고 하면 새로운 어떤 것들이 나올 것 같았고, 특히 어떤 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한다면 서스펜스가 크게 생길 것 같았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액션을 하다 보면 늘 중력의 작용을 받는다. 때리고 맞을 때 고통스러운 느낌은 결국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근데 물 속에서는 중력의 저항을 받지 않으니까 수직의 움직임이 생길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이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액션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반부 춘자(김혜수)와 장도리(박정민)의 액션은 인물이 둥둥 떠있는 상태에서 몸부림을 친다. 때론 일부러 멋있게 보이려고 고속 촬영을 하는데 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이 느려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요소들이 이전에는 만들지 못했고 이후에도 이런 환경을 굳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만들지 못할 배경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시도하게 됐다."
-'새로움'이라는 키워드는 모든 창작자, 그리고 감독에게도 딜레마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나 같이 만들어 놓은 영화들이 여럿 있는 경우는 항상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 '익숙함과 새로움의 균형을 어떻게 이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만들어 놓은 필모그래피에 의해서 기대치,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관객도 어떤 데이터 안에서 충족이 되고, 되지 않는 기대치가 생기는 것 아닌가. 장르 영화를 하는 감독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익숙함을 얼마나 잘 충족시켜주면서 얼마나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항상 부딪치는 문제다. 그 밸런스 조절이 잘 안 이루어졌을 때, 때론 너무 낯설어서 외면 당하고, 때론 너무 뻔해서 '재탕해?' 소리를 듣는다. 언제나 살얼음판이다. 근데 '밀수' 같은 경우는 바다를 배경으로 물 속에서 펼쳐지는 본격적인 액션 영화라는 측면에서 나 스스로 충분히 새로웠고, 장르적인 특성을 놓고 봐도 '밀수'라는 제목에서 딱 연상 되는 것이 있지 않나. 익숙함과 새로움의 밸런스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맛 가득한 작품'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상상으로는 다 정리가 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싱크로나이즈 크루를 이끄는 김희진 코치에게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우리 무술 감독님이 많이 열려 있는 분이라, 이런 저런 액션 디자인을 하는데 '이건 우리 스턴트 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은 전문가 분들이 하는 게 맞다'고 먼저 제안을 주셨다. 그래서 자문을 구할 팀을 찾다가 김희진 코치를 만나게 됐다.
과정은 싱크로나이즈 팀이 무술 감독님과 함께 물 속에 들어가 여러 테스트를 진행하고 자료를 보내줬다.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와, 이런 것도 나오네?' 싶더라. 그 중 하나가 춘자와 진숙(염정아)의 물 속 크로스 신이다. 시나리오에서는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이었는데, 물 속에서 서로를 당기며 위치를 바꾸는 걸 테스트 과정에서 본 것이다. '이건 써야겠다' 바로 선택했다.
안 해 본 것을 시도한다? 결국 끊임없는 테스트와 연습이 답이다. 자주 이런 비유를 하는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과 비슷하다. '코끼리를 냉장고 앞에 데려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문을 닿는다'(웃음) 영화는 수 많은 전문가들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제안하고, 배우들과 모든 크루들이 머리를 맞대서 짜다 보면 어느 순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영화 만들기를 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 인 것 같다."
-수중 액션이 도전이었다면, 지상 액션은 류승완표 액션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였다. 어수선한 듯 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짜릿했다.
"중반부 이후 지상에서 펼쳐지는 액션 신은 크게 두 장면이 나오는데, 인물들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목표였다. 조인성이 펼치는 호텔방 액션과, 사무실에서 습격 당하는 장도리 액션이다. 완전 스타일이 다르다. '인물과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액션을 통해 이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시작 됐다.
조인성 배우가 연기한 권상사 액션은 디자인 될 때부터 현실적이고 통속적인 콘셉트가 아니라 장르의 세계였다. 되게 멋있고, 폼 나고, 품위 있고. 우리가 액션 영화를 볼 때 기대하고 원하는 것에 가깝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그런 싸움이 벌어질 수 없다. 그건 명백한 장르 세계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형태다. 그래서 더 마음 놓고 멋있게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그려봤다.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지역 이름이 군천이다. 내가 작품에서 그렇게 가상 도시를 설정한 건 '짝패'에 이어 두 번째인데, 가상 공간을 설정했다는 건 이 세계가 장르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액션도 어떻게 하면 익스트림 하게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장도리 액션은, 장도리라는 별명 지은 것부터 '올드보이'에 대한 농담이었다. 굉장히 긴 한 컷과, 그보다 짧은 컷으로 구성한 것도 약간 '올드보이'에 대한 나만의 농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촬영은 오히려 그런 장면이 좀 더 위험하다. 볼 때는 막 싸움인 것 같지만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고, 긴 테이크라 필요한 컷만 잠깐 찍고 회복할 수 있는 호텔방 신보다 체력적인 소모도 크다. 개성 다른 두 개의 액션 장면을 배치하고 싶었다."
-조인성은 등장부터 작정한 듯한 멋짐을 보여주는데 감독의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인가.
"'모가디슈' 때 너무 많이 망가뜨려서 미안한 것도 있었고, 내가 조인성 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하하. '모가디슈'를 함께 하면서 그 배우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번에도 크지 않은 역인데 기꺼이 해준 것이 고맙지 않나. 그럼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아깝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밀도를 높여 다 빼 먹어야지?' 했던 건데, '밀수' 크루들이 또 다 '모가디슈'를 했던 스태프들이라 그들도 조인성 배우를 너무 좋아했다. 그 와중에 찍을 때마다 어느 각도로 찍어도 잘 나오니까. 모두의 마음이 합쳐진 결과다."
-배우는 '액션은 이제 못할 것 같다'고 하던데.
"나도 이번에 한번은 속여서 했지만 두 번째는 안 넘어가더라.(웃음) 인성 씨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지는 것 같다. 이제는 서로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농담하고 이야기 하는 사이라. '나 이거 좋아, 싫어' '해, 안해' 그런 대화가 편하게 되니까 더 좋기도 하다."
-김혜수 염정아 배우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과 다름 없다. 물 공포증이 있고, 수영을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밀수'에 합류했다.
"처음에 혜수 선배와 정아 씨가 같이 사무실에 미팅을 왔다. 그리고 내 방에서 바다와 해녀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자료를 보여 드렸다. 사실 '이런 걸 보여주면 (영화를) 하고 싶어서 빠져나가지 못 할 거야'라는 마음이었다. 캐스팅을 꼬시려고 보여 드렸던 건데, 두 분 표정이 멍하더라. 속으로 '이렇게까지 감동할 정도로 준비한 건 아닌데' 생각했다.
근데 알고 보니 정아 씨는 어느 정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 듣고 왔지만 예상보다 더 한 영상에 '수영을 1도 못하는데 어떡하지' 싶어 놀랐다 하고, 혜수 선배는 영상 속 물만 보고도 공황이 왔었다고 하더라. 근데 난 그 모습을 '감동 받았다' 생각하면서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있었다. 심지어 두 배우의 상황을 나는 며칠 동안 몰랐다. 이후 두 분만 서로 이야기를 했다더라. 혜수 선배가 '나 이 영화 못하나 봐' 생각하고 있던 차에 염배우가 전화해 '언니, 저 수영을 아예 못하는데 어떡하죠. 세면대에 물 받아 놓고 눈 뜨는 것부터 연습 하려고요'라고 했고, 혜수 선배는 '나 사실 옛날에는 물을 되게 좋아했는데 물 공황이 생겼어'라고 했다는 비하인드를 나중에 들었다."
-감독으로서 걱정은 없었나.
"이게 단순히 흉내만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에 들어가서 촬영을 해야 하다 보니까, 두 분 모두 신인도 아닌 경력이 있는 분들이라 '무턱대고 한다고 했다가 프로덕션에 피해 주는 거 아닌가' 싶어 쉽사리 출연 결정을 못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도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영화 못하나 보다. 엎어질 수 있겠다. 어떡하지' 걱정과 논의를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해 보겠다'는 답을 받았고, 그 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배우들을 믿었다. 내가 경험한 배우들은 좀 보통 사람들과 그런 점에서 되게 다르다. 영화 '바빌론'을 보면 브래드 피트가 완전히 술에 취해서 걷지도 못하는데 슬레이트를 딱 치면 언제 취했냐는 듯 대사를 치고, '컷' 하면 다시 무너지지 않나. 내가 알고 있는 배우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어떤 악 조건에서도 '연기를 하겠다' 마음 먹으면 어떻게든 해내는 부류의 사람들이어서 그걸 믿었다. 특히 김혜수 염정아 선배는 수 십 년 동안 그런 모습을 증명해 온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더 믿었다."
-그 믿음이 옳았다.
"김혜수 선배는 처음 수중 훈련을 할 때 공황이 왔었다가, 수중 팀을 비롯해 함께 연기한 해녀 배우들의 '파이팅'이 좋아서 서서히 극복해 나갔다. 나중에는 물 속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미래 소년 코난 같은 표정도 짓고 말까지 했다. 정아 씨가 지금도 이야기 하지만 당시 촬영이 끝나고 모니터 옆으로 와서는 '감독님, 감독님! 언니는 물 속에서 말을 해요. 난 흉내도 못 내겠어!'라고 했던 말이 나 역시 생생하게 기억난다.(웃음)"
-핸디캡이 있음에도 두 배우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두 배우의 아주 오랜 팬이었다. 염배우는 '우리들의 천국'부터 좋아했던 배우다. '장화홍련' 이미지를 보면서 차갑고 도시적인데 굉장히 시네마틱한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범죄의 재구성' 구로동 샤론스톤과 '미성년'에서의 연기도 정말 너무 너무 끝내줬고 '스카이 캐슬'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배우와 정말 꼭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
혜수 선배는 내가 연출부 시절 인물 담당이었을 때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90년대 현장은 필름으로 찍었던 시절이라 모니터 화질이 아주 안 좋았다. 밤 장면을 찍으면 그대로 어둡다. 당시 혜수 선배의 클로즈업을 찍는데, 눈을 내리 깔고 있다가 탁 치켜 뜨는 신이었다. 그 순간 모니터 전체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우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놀랐다. 지금까지도 혜수 선배는 영화배우이면서 어떤 상징 아닌가. 이후에는 오며 가며 인사를 주고 받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이 또한 감독의 눈이 맞았다. 워맨스 케미가 돋보이더라.
"뜨겁고 차가운, 음양의 조화가 좋았다. 혜수 선배가 연기에 한해 뜨겁고 공격적이었다면 정아 씨는 차가우면서 말 그대로 쿨하다. 정아 씨가 쿨톤으로 중심을 잡아줘서 혜수 선배가 높낮이, 연기의 고저를 마음대로 갖고 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같이 뜨거웠다면 아마 영화가 되게 이상했을 것 같고, 반대로 같이 톤 다운이었다면 너무 멋만 부린 것처럼 보였을텐데 아니었다. 특히 우리 영화는 모든 배우들이 경쟁심은 1도 없던 사람들이라. 이번 기회를 통해 두 배우와 함께 하고 싶었던 내 꿈을 이뤘다. '하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팀 해녀로 함께 한 김재화 박준면 박경혜 주보비의 활약도 남달랐다고.
"박경혜 주보비는 '자기 혹시 수영 할 줄 알아?'라고 연락을 했었는데, 내가 연락을 하니까 두 배우 입장에서는 일단 '뭐가 있나 보다' 했던 것 같다. '저 물개죠!'라는 답이 왔었다. 근데 알고 보니 물에서 고개도 못 드는 수준이었다고 하더라. 하하. 그래서 더 놀랐던 건, 배우들이 훈련을 하고 나서 첫 수중 테스트를 할 땐 못하는 게 전혀 티가 안 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배우들이 수영을 잘한다고 알고 있고, 정아 씨도 3개월 정도 훈련을 하면서 '되게 잘 적응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상황이라 혜수 선배의 공황만 집중해서 신경을 썼다. 실제 테스트 땐 박경혜 배우도 너무 아름답게 움직여 놀랐다. 그것 또한 (수영 못하는 걸) 들킬까 봐 엄청 하는 척을 했던 것이더라. 그들에게는 수영 강습 영화가 됐지만 너무 잘해줘 고마웠다.
김재화 박준면 배우는 선수처럼 물 속에서 날아 다녔다. 혜수 선배가 거기에서 큰 힘을 얻었다. 본인들 촬영이 아닌데도 수조 세트에 남아서 흡사 운동 팀처럼 '슛' 하면 '파이팅!'을 외쳐주고 물 속에 들어가서 같이 박수를 쳐주곤 했다. 수영장처럼 울리는 세트이다 보니까 더 크게 들리고 배우들에게도 전염이 됐다. 촬영팀도 산소통을 메고 촬영을 하다가 갈아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계속 들어가 찍고 그랬다. 배우들의 호흡이 안 맞았다면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촬영이 됐을텐데 에너지가 너무 좋아 감사했다."
-막내라인 고민시와 박정민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뒤엔 감독의 '상스럽고, 추잡스러운 디렉팅'이 있었다고.
"그렇지 않아도 고민시 배우의 인터뷰를 보고 연락을 주고 받았다. '자기 인터뷰 때문에 난 이제 틀렸어. 난 이제 더 이상 지적인 감독이 아니야'(웃음) 근데 이 부분도 나에게는 '이 배우들이 아무리 망가지고, 상스럽게 연기 해도 자기 만의 멋을 다 찾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망가진다고 해서 진짜 망가지기만 하면 안되지 않나. 내가 어떠한 장벽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서 감독으로서는 너무 편했다.
솔직히 우리 영화는 내가 배우들에게 한 게 별로 없다. 배우들이 다 했다. 너무 배우들이 다 알아서 연기해 아마 '내가 뭐라고 했었나' 어거지로 생각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관객으로서 현장에서 낄낄대고 좋아한 것 밖에 없다.(웃음) 고민시 배우의 갈매기 눈썹도 당시에는 최첨단 미의 상징이었다. 본인은 어색하고 부담을 가졌을 수 있겠지만 망설임은 1도 없었다. '이 영화에 이게 필요하다면 한다'고 막 가줘서 정말 멋있었다."
-박정민은 '혀 낼름 액션'이라는 명장면을 탄생 시켰는데.
"그것도 나 아니다. 본인이 생각해 연기한 것이다. 온전히 박정민이 창조한 신이다. 내가 진짜 그렇게까지 상스러운 디렉팅을 하지는 않는다. 지도 너무했다 싶으니까 내 핑계를 대지 않았나 싶다.(웃음) 그 장면은 현장에서 다 같이 모니터로 봤을 때부터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박 배우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한걸텐데 우리가 완전히 뒤통수 맞았다. 조인성 배우가 '이 자식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야?' 했을 정도다.
물론 장도리 설정과 콘셉트를 위해 사전에 가이드로 제시한 모델들은 있었다. 왜 말할 때 입 옆에 하얗게 고인 침을 핥는 인물들 있지 않나. 그런 것 몇 개. 걸음걸이를 이야기 하며 '내가 친한 아저씨 중에 이런 아저씨가 있었어' 하고 말해주면 재미있어 하더라. 참고했을 뿐 자신만의 스타일로 너무 재미있는 인물을 만들어내 감탄했다."
2021년 팬데믹 여름 구세주 '모가디슈' 이후 2년만 컴백
흥행 이끄는 스타감독·오락영화 명장 우뚝…다시 '류승완 시대'
진정성 넘치는 절박함을 관객은 외면하지 않았다. 관객이 기다린 작품의 힘이 돋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괜찮은 영화가 환영 받는 건 또 아니기에 소통의 윈윈 효과가 빛난 건 사실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따진다 하더라도 어쨌든 흥행의 기쁨을 맛 봤다. 여름의 구원투수, 다시 맞이한 '류승완 시대'다.
"중요한 건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기분이 좋아야 한다"는 명확한 바람을 이뤘다. 개봉 전 오랜만에 진행된 대면 인터뷰에서 쉽게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서 인사하고 인터뷰를 진행하려 한 류승완 감독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을 장면으로 각인됐다. 감독의 "절박하다"는 외침은 영화계에 건재해줘서 고마운 존재로 치환됐다.
2년 전 '모가디슈'에 이어 '밀수'까지 극장가 최대 성수기 여름 시장에서 한국 영화의 자존심을 지켰다. 특히 '밀수'는 모든 캐릭터의 힘이 빛나는 멀티 캐스팅 작품이지만 여성 투톱을 블록버스터 장르에 앞세웠다는 점에서, 흥행까지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향후 영화계 방향성의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시대의 흐름과 팬데믹 여파로 콘텐트의 제작 환경, 공개 방식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걸출한 영화 감독들도 대부분 OTT의 맛을 한 번씩 '찍먹'할 때, 류승완 감독은 극장과 영화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언제라도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너스레를 떨면서도,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이다"고 인정하면서도, 류승완 감독에게는 "굳이 극장용 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해야 하나?"라는 물음표가 아직 더 크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상업 오락 영화의 명장이자, 충무로를 대표하는 스타 감독으로 가장 필요한 시기 연이어 이름값을 증명했다. 그 움직임 자체 만으로 영화에 대한 감독의 애정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 이제 더 더욱 어떠한 도전이든 신뢰와 믿음이 뒤따르겠지만, 그래서 더 많이 만나고 싶은 '류승완표 영화'다.
-2년 전에도 '모가디슈'로 여름 시장 총대를 멨다.
"여름 시장의 총대를 멘다기 보다는…. 일단 2년 전을 돌이켜 보면 오후 7시 이후에는 티켓 판매가 안 됐고 좌석 간 띄어 앉기를 해야 했다. 극장 관객이 3분의 1 정도 수준에서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뭘 해도 안되고 우리 인터뷰도 줌(화상)으로 하지 않았나. 사람과 사람이 대면하는 자체가 사실상 금기 시 되는 상황에서 극장 영화를 개봉한다는 것이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모가디슈'가 개봉했을 당시) 많은 관객 분들이 호응을 해주셨다. 만약 '모가디슈'가 유머가 아주 풍부하고, 객석 반응이 굉장히 중요한 영화였다고 한다면 아마 그 때 개봉을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 개봉이라는 건 감독의 의지 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당시 나와 제작진 모두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 '총대를 멘다'는 건 너무 좋게 봐주신 표현인 것 같고, 영화 업계에서 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있었던 사람으로서 '우리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나겠다'는 것이었다.
'밀수'는 기본적으로 바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름에 보여 드려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름에 개봉한 이유가 가장 크다. '모가디슈' 때와는 조금 다르다. 여름 극장 시장 분위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계절이 중요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한 여름에 학교를 땡땡이 치고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을 개봉한 날 영화관에 달려가서 봤다. 되게 더웠는데,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는 열기까지 그대로 나에게 영향 줬던 것이 지금도 기억 난다.
그런 의미에서 ''밀수'는 관객들이 여름에 관람해야 한다'는 제작진의 의지가 컸다. 극장 사정은 이미 서서히 좋은 외화들이 나오고 있었고, '범죄도시'도 있지 않았나. 물론 '밀수'는 올 초 일찌감치 여름 개봉을 결정해 놓긴 했다. 2년 전 너무 혹독한 시기에 개봉하고 나니까 '이거보다 더 나쁘겠어? 더 최악이겠어?' 싶더라."
-'밀수'는 감독의 강점이 명확하게 보이면서 새로운 도전까지 담아낸 작품이다. 어떻게 메가폰을 잡게 됐나.
"소재 개발은 (제작사 외유내강) 조성민 부사장이 했다. '시동'을 촬영하기 위해 군산에 갔다가 박물관을 들렀는데 '70년대 해녀들이 밀수에 가담했다'는 아주 짧은 한 줄의 설명을 봤다고 하더라. 그리고 미스터리 매거진 '미스테리아'에 곽재식 작가가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여성 밀수단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집으로 쓴 것이 있었는데 흥미를 갖고 있던 차에 두 가지가 같이 맞물렸다. 처음부터 내가 연출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각본이 나온 후에 '아, 이거 못 봤던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영화가 될 수 있겠다' 싶어 '내가 해보면 안돼?' 말했고, 부사장이 '시간 맞으시면 하는 것도 괜찮죠'라고 해 하게 됐다.(웃음)"
-'밀수'의 정체성이자 압권은 역시 수중 액션이다.
"난 기본적으로 액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액션을 바탕으로 작품마다 시대를 바꿔보기도 하고, 인물·직업을 바꿔보기도 하고, 총을 들고 싸우다가 칼을 들고 싸우기도 하고, 와이어를 타고 날아보기도 했다. 근데 물 속 액션을 펼친다는 건 나 스스로에게도 되게 새로웠다. 가늠이 잘 안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SF 영화처럼 무언가를 쫙 펼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특수 존재들이 아닌 현실적인 인물들이 물 속에서 액션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근데 내 입장에서 해녀들은 사실 초능력자에 가깝다. 해녀 분들이 기록하는 잠수 기록을 봐도 놀랍고, 생존하기 위해서 어떤 동력의 인계점을 벗어나 버리는데, 그런 사람들과 함께 액션을 펼친다고 하면 새로운 어떤 것들이 나올 것 같았고, 특히 어떤 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한다면 서스펜스가 크게 생길 것 같았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액션을 하다 보면 늘 중력의 작용을 받는다. 때리고 맞을 때 고통스러운 느낌은 결국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근데 물 속에서는 중력의 저항을 받지 않으니까 수직의 움직임이 생길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이전에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액션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반부 춘자(김혜수)와 장도리(박정민)의 액션은 인물이 둥둥 떠있는 상태에서 몸부림을 친다. 때론 일부러 멋있게 보이려고 고속 촬영을 하는데 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움직임이 느려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요소들이 이전에는 만들지 못했고 이후에도 이런 환경을 굳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만들지 못할 배경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시도하게 됐다."
-'새로움'이라는 키워드는 모든 창작자, 그리고 감독에게도 딜레마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나 같이 만들어 놓은 영화들이 여럿 있는 경우는 항상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 '익숙함과 새로움의 균형을 어떻게 이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만들어 놓은 필모그래피에 의해서 기대치,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관객도 어떤 데이터 안에서 충족이 되고, 되지 않는 기대치가 생기는 것 아닌가. 장르 영화를 하는 감독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익숙함을 얼마나 잘 충족시켜주면서 얼마나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항상 부딪치는 문제다. 그 밸런스 조절이 잘 안 이루어졌을 때, 때론 너무 낯설어서 외면 당하고, 때론 너무 뻔해서 '재탕해?' 소리를 듣는다. 언제나 살얼음판이다. 근데 '밀수' 같은 경우는 바다를 배경으로 물 속에서 펼쳐지는 본격적인 액션 영화라는 측면에서 나 스스로 충분히 새로웠고, 장르적인 특성을 놓고 봐도 '밀수'라는 제목에서 딱 연상 되는 것이 있지 않나. 익숙함과 새로움의 밸런스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맛 가득한 작품'이라는 평이 우세하다.
"상상으로는 다 정리가 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싱크로나이즈 크루를 이끄는 김희진 코치에게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우리 무술 감독님이 많이 열려 있는 분이라, 이런 저런 액션 디자인을 하는데 '이건 우리 스턴트 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은 전문가 분들이 하는 게 맞다'고 먼저 제안을 주셨다. 그래서 자문을 구할 팀을 찾다가 김희진 코치를 만나게 됐다.
과정은 싱크로나이즈 팀이 무술 감독님과 함께 물 속에 들어가 여러 테스트를 진행하고 자료를 보내줬다. 거기에서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 '와, 이런 것도 나오네?' 싶더라. 그 중 하나가 춘자와 진숙(염정아)의 물 속 크로스 신이다. 시나리오에서는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이었는데, 물 속에서 서로를 당기며 위치를 바꾸는 걸 테스트 과정에서 본 것이다. '이건 써야겠다' 바로 선택했다.
안 해 본 것을 시도한다? 결국 끊임없는 테스트와 연습이 답이다. 자주 이런 비유를 하는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과 비슷하다. '코끼리를 냉장고 앞에 데려다가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문을 닿는다'(웃음) 영화는 수 많은 전문가들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제안하고, 배우들과 모든 크루들이 머리를 맞대서 짜다 보면 어느 순간 무언가를 하고 있다. 영화 만들기를 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 인 것 같다."
-수중 액션이 도전이었다면, 지상 액션은 류승완표 액션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보였다. 어수선한 듯 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짜릿했다.
"중반부 이후 지상에서 펼쳐지는 액션 신은 크게 두 장면이 나오는데, 인물들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목표였다. 조인성이 펼치는 호텔방 액션과, 사무실에서 습격 당하는 장도리 액션이다. 완전 스타일이 다르다. '인물과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액션을 통해 이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지점에서 디자인이 시작 됐다.
조인성 배우가 연기한 권상사 액션은 디자인 될 때부터 현실적이고 통속적인 콘셉트가 아니라 장르의 세계였다. 되게 멋있고, 폼 나고, 품위 있고. 우리가 액션 영화를 볼 때 기대하고 원하는 것에 가깝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그런 싸움이 벌어질 수 없다. 그건 명백한 장르 세계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형태다. 그래서 더 마음 놓고 멋있게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그려봤다.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지역 이름이 군천이다. 내가 작품에서 그렇게 가상 도시를 설정한 건 '짝패'에 이어 두 번째인데, 가상 공간을 설정했다는 건 이 세계가 장르의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액션도 어떻게 하면 익스트림 하게 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장도리 액션은, 장도리라는 별명 지은 것부터 '올드보이'에 대한 농담이었다. 굉장히 긴 한 컷과, 그보다 짧은 컷으로 구성한 것도 약간 '올드보이'에 대한 나만의 농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웃음)
촬영은 오히려 그런 장면이 좀 더 위험하다. 볼 때는 막 싸움인 것 같지만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고 있고, 긴 테이크라 필요한 컷만 잠깐 찍고 회복할 수 있는 호텔방 신보다 체력적인 소모도 크다. 개성 다른 두 개의 액션 장면을 배치하고 싶었다."
-조인성은 등장부터 작정한 듯한 멋짐을 보여주는데 감독의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인가.
"'모가디슈' 때 너무 많이 망가뜨려서 미안한 것도 있었고, 내가 조인성 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하하. '모가디슈'를 함께 하면서 그 배우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졌다. 이번에도 크지 않은 역인데 기꺼이 해준 것이 고맙지 않나. 그럼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이 아깝기 때문에 '이 사람의 밀도를 높여 다 빼 먹어야지?' 했던 건데, '밀수' 크루들이 또 다 '모가디슈'를 했던 스태프들이라 그들도 조인성 배우를 너무 좋아했다. 그 와중에 찍을 때마다 어느 각도로 찍어도 잘 나오니까. 모두의 마음이 합쳐진 결과다."
-배우는 '액션은 이제 못할 것 같다'고 하던데.
"나도 이번에 한번은 속여서 했지만 두 번째는 안 넘어가더라.(웃음) 인성 씨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지는 것 같다. 이제는 서로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농담하고 이야기 하는 사이라. '나 이거 좋아, 싫어' '해, 안해' 그런 대화가 편하게 되니까 더 좋기도 하다."
-김혜수 염정아 배우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과 다름 없다. 물 공포증이 있고, 수영을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밀수'에 합류했다.
"처음에 혜수 선배와 정아 씨가 같이 사무실에 미팅을 왔다. 그리고 내 방에서 바다와 해녀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 자료를 보여 드렸다. 사실 '이런 걸 보여주면 (영화를) 하고 싶어서 빠져나가지 못 할 거야'라는 마음이었다. 캐스팅을 꼬시려고 보여 드렸던 건데, 두 분 표정이 멍하더라. 속으로 '이렇게까지 감동할 정도로 준비한 건 아닌데' 생각했다.
근데 알고 보니 정아 씨는 어느 정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 듣고 왔지만 예상보다 더 한 영상에 '수영을 1도 못하는데 어떡하지' 싶어 놀랐다 하고, 혜수 선배는 영상 속 물만 보고도 공황이 왔었다고 하더라. 근데 난 그 모습을 '감동 받았다' 생각하면서 '이 정도면 됐어!' 하고 있었다. 심지어 두 배우의 상황을 나는 며칠 동안 몰랐다. 이후 두 분만 서로 이야기를 했다더라. 혜수 선배가 '나 이 영화 못하나 봐' 생각하고 있던 차에 염배우가 전화해 '언니, 저 수영을 아예 못하는데 어떡하죠. 세면대에 물 받아 놓고 눈 뜨는 것부터 연습 하려고요'라고 했고, 혜수 선배는 '나 사실 옛날에는 물을 되게 좋아했는데 물 공황이 생겼어'라고 했다는 비하인드를 나중에 들었다."
-감독으로서 걱정은 없었나.
"이게 단순히 흉내만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에 들어가서 촬영을 해야 하다 보니까, 두 분 모두 신인도 아닌 경력이 있는 분들이라 '무턱대고 한다고 했다가 프로덕션에 피해 주는 거 아닌가' 싶어 쉽사리 출연 결정을 못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도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영화 못하나 보다. 엎어질 수 있겠다. 어떡하지' 걱정과 논의를 한꺼번에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해 보겠다'는 답을 받았고, 그 때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배우들을 믿었다. 내가 경험한 배우들은 좀 보통 사람들과 그런 점에서 되게 다르다. 영화 '바빌론'을 보면 브래드 피트가 완전히 술에 취해서 걷지도 못하는데 슬레이트를 딱 치면 언제 취했냐는 듯 대사를 치고, '컷' 하면 다시 무너지지 않나. 내가 알고 있는 배우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어떤 악 조건에서도 '연기를 하겠다' 마음 먹으면 어떻게든 해내는 부류의 사람들이어서 그걸 믿었다. 특히 김혜수 염정아 선배는 수 십 년 동안 그런 모습을 증명해 온 배우들이었기 때문에 더 믿었다."
-그 믿음이 옳았다.
"김혜수 선배는 처음 수중 훈련을 할 때 공황이 왔었다가, 수중 팀을 비롯해 함께 연기한 해녀 배우들의 '파이팅'이 좋아서 서서히 극복해 나갔다. 나중에는 물 속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미래 소년 코난 같은 표정도 짓고 말까지 했다. 정아 씨가 지금도 이야기 하지만 당시 촬영이 끝나고 모니터 옆으로 와서는 '감독님, 감독님! 언니는 물 속에서 말을 해요. 난 흉내도 못 내겠어!'라고 했던 말이 나 역시 생생하게 기억난다.(웃음)"
-핸디캡이 있음에도 두 배우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두 배우의 아주 오랜 팬이었다. 염배우는 '우리들의 천국'부터 좋아했던 배우다. '장화홍련' 이미지를 보면서 차갑고 도시적인데 굉장히 시네마틱한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범죄의 재구성' 구로동 샤론스톤과 '미성년'에서의 연기도 정말 너무 너무 끝내줬고 '스카이 캐슬'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배우와 정말 꼭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
혜수 선배는 내가 연출부 시절 인물 담당이었을 때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90년대 현장은 필름으로 찍었던 시절이라 모니터 화질이 아주 안 좋았다. 밤 장면을 찍으면 그대로 어둡다. 당시 혜수 선배의 클로즈업을 찍는데, 눈을 내리 깔고 있다가 탁 치켜 뜨는 신이었다. 그 순간 모니터 전체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우와~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놀랐다. 지금까지도 혜수 선배는 영화배우이면서 어떤 상징 아닌가. 이후에는 오며 가며 인사를 주고 받는 정도였는데 이번에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다."
-이 또한 감독의 눈이 맞았다. 워맨스 케미가 돋보이더라.
"뜨겁고 차가운, 음양의 조화가 좋았다. 혜수 선배가 연기에 한해 뜨겁고 공격적이었다면 정아 씨는 차가우면서 말 그대로 쿨하다. 정아 씨가 쿨톤으로 중심을 잡아줘서 혜수 선배가 높낮이, 연기의 고저를 마음대로 갖고 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같이 뜨거웠다면 아마 영화가 되게 이상했을 것 같고, 반대로 같이 톤 다운이었다면 너무 멋만 부린 것처럼 보였을텐데 아니었다. 특히 우리 영화는 모든 배우들이 경쟁심은 1도 없던 사람들이라. 이번 기회를 통해 두 배우와 함께 하고 싶었던 내 꿈을 이뤘다. '하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팀 해녀로 함께 한 김재화 박준면 박경혜 주보비의 활약도 남달랐다고.
"박경혜 주보비는 '자기 혹시 수영 할 줄 알아?'라고 연락을 했었는데, 내가 연락을 하니까 두 배우 입장에서는 일단 '뭐가 있나 보다' 했던 것 같다. '저 물개죠!'라는 답이 왔었다. 근데 알고 보니 물에서 고개도 못 드는 수준이었다고 하더라. 하하. 그래서 더 놀랐던 건, 배우들이 훈련을 하고 나서 첫 수중 테스트를 할 땐 못하는 게 전혀 티가 안 났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배우들이 수영을 잘한다고 알고 있고, 정아 씨도 3개월 정도 훈련을 하면서 '되게 잘 적응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상황이라 혜수 선배의 공황만 집중해서 신경을 썼다. 실제 테스트 땐 박경혜 배우도 너무 아름답게 움직여 놀랐다. 그것 또한 (수영 못하는 걸) 들킬까 봐 엄청 하는 척을 했던 것이더라. 그들에게는 수영 강습 영화가 됐지만 너무 잘해줘 고마웠다.
김재화 박준면 배우는 선수처럼 물 속에서 날아 다녔다. 혜수 선배가 거기에서 큰 힘을 얻었다. 본인들 촬영이 아닌데도 수조 세트에 남아서 흡사 운동 팀처럼 '슛' 하면 '파이팅!'을 외쳐주고 물 속에 들어가서 같이 박수를 쳐주곤 했다. 수영장처럼 울리는 세트이다 보니까 더 크게 들리고 배우들에게도 전염이 됐다. 촬영팀도 산소통을 메고 촬영을 하다가 갈아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고 계속 들어가 찍고 그랬다. 배우들의 호흡이 안 맞았다면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촬영이 됐을텐데 에너지가 너무 좋아 감사했다."
-막내라인 고민시와 박정민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뒤엔 감독의 '상스럽고, 추잡스러운 디렉팅'이 있었다고.
"그렇지 않아도 고민시 배우의 인터뷰를 보고 연락을 주고 받았다. '자기 인터뷰 때문에 난 이제 틀렸어. 난 이제 더 이상 지적인 감독이 아니야'(웃음) 근데 이 부분도 나에게는 '이 배우들이 아무리 망가지고, 상스럽게 연기 해도 자기 만의 멋을 다 찾아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망가진다고 해서 진짜 망가지기만 하면 안되지 않나. 내가 어떠한 장벽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서 감독으로서는 너무 편했다.
솔직히 우리 영화는 내가 배우들에게 한 게 별로 없다. 배우들이 다 했다. 너무 배우들이 다 알아서 연기해 아마 '내가 뭐라고 했었나' 어거지로 생각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관객으로서 현장에서 낄낄대고 좋아한 것 밖에 없다.(웃음) 고민시 배우의 갈매기 눈썹도 당시에는 최첨단 미의 상징이었다. 본인은 어색하고 부담을 가졌을 수 있겠지만 망설임은 1도 없었다. '이 영화에 이게 필요하다면 한다'고 막 가줘서 정말 멋있었다."
-박정민은 '혀 낼름 액션'이라는 명장면을 탄생 시켰는데.
"그것도 나 아니다. 본인이 생각해 연기한 것이다. 온전히 박정민이 창조한 신이다. 내가 진짜 그렇게까지 상스러운 디렉팅을 하지는 않는다. 지도 너무했다 싶으니까 내 핑계를 대지 않았나 싶다.(웃음) 그 장면은 현장에서 다 같이 모니터로 봤을 때부터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박 배우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한걸텐데 우리가 완전히 뒤통수 맞았다. 조인성 배우가 '이 자식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야?' 했을 정도다.
물론 장도리 설정과 콘셉트를 위해 사전에 가이드로 제시한 모델들은 있었다. 왜 말할 때 입 옆에 하얗게 고인 침을 핥는 인물들 있지 않나. 그런 것 몇 개. 걸음걸이를 이야기 하며 '내가 친한 아저씨 중에 이런 아저씨가 있었어' 하고 말해주면 재미있어 하더라. 참고했을 뿐 자신만의 스타일로 너무 재미있는 인물을 만들어내 감탄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대사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관통하기도 한다. 실제로 고민해 본 적이 있는 문제일까.
"나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고, 살아가는데 있어 나 스스로에게 많이 하는 질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임계점은 어디인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극단적이 예로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치자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 모두가 알게 모르게 '아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지점을 조금씩 넘기 마련이다. 본인은 안다.
요즘 영화를 만들 때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현장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다. 그게 되게 괴롭더라. '어떻게 하면 쓰레기를 줄일 수 있지?' 스태프들과도 계속 이야기는 하고 있는데, 현장 특성상 움직여야 하다 보니 어떤 하나의 방식으로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 한 때 우리 현장은 식판에 밥을 먹고 설거지 하는 게 유행이었다. 현장 스태프 몇몇이 개인 식판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배우들도 그 식판을 썼다. 근데 그러다 보니 설거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되더라. 상황에 따라 물을 길어와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빼앗긴다.
특수 효과 장면도 폭탄을 빵 한 번 터뜨리면 많은 잔해물들이 나온다. CG로 하자니 또 엉성하고. '내 영화에는 이것이 필요한데 이게 맞나. 영화 하나 찍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딜레마다. 완성도를 위해 최대치로 가려 하지만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싶기는 하다. 그럼에도 유효한 질문을 갖고 있는 건 유의미하다고 본다. 잊지 않고 계속 고민하면 좋은 답이 찾아지지 않을까."
-영화계는 침체기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고, 그 사이 OTT 등 콘텐트 제작과 제공 방식이 굉장히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 극장, 그리고 영화를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드라마와 시리즈에는 전혀 관심이 없나.
"오해다. 저는 언제라도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 하하하. 다만, 예를 들어 이를테면 '여명의 눈동자' '태백산맥' '토지' 이런 작품들은 그 서사를 만드는데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장용 영화에서 3~4시간의 러닝타임을 준다고 해도 다 소화가 안되는 이야기이자 분량이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긴 호흡으로 만드는 것이 맞다 생각한다. 내가 그런 서사를 다루고 싶다면 할텐데 아직 그런 생각이 나에게 들지 않는 것 뿐이다. 제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웃음) 그럼에도 '내가 굳이 극장용 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해야 하나?' 싶더라. 난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이 놓칠 수 없는 삶의 즐거움 중 하나다.
하지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영화 자체가 바뀌었다기 보다, 새로운 세대가 받아들이는 영화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더 어디로 변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기준으로 만든다? 그건 만드는 사람의 기준이지 관람하는 사람의 기준은 아니다. 이미 시대는 바뀌고 있고, 아주 어려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에 노출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운드 시스템이나 시각적 효과 등 기술적인 부분도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니까. 나 역시 미래가 궁금하다."
조연경 엔터뉴스팀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나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고, 살아가는데 있어 나 스스로에게 많이 하는 질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한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임계점은 어디인가'를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극단적이 예로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치자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 아닌가. 모두가 알게 모르게 '아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지점을 조금씩 넘기 마련이다. 본인은 안다.
요즘 영화를 만들 때 나를 가장 괴롭히는 건 현장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다. 그게 되게 괴롭더라. '어떻게 하면 쓰레기를 줄일 수 있지?' 스태프들과도 계속 이야기는 하고 있는데, 현장 특성상 움직여야 하다 보니 어떤 하나의 방식으로 정착하기가 쉽지 않다. 한 때 우리 현장은 식판에 밥을 먹고 설거지 하는 게 유행이었다. 현장 스태프 몇몇이 개인 식판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배우들도 그 식판을 썼다. 근데 그러다 보니 설거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되더라. 상황에 따라 물을 길어와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빼앗긴다.
특수 효과 장면도 폭탄을 빵 한 번 터뜨리면 많은 잔해물들이 나온다. CG로 하자니 또 엉성하고. '내 영화에는 이것이 필요한데 이게 맞나. 영화 하나 찍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솔직히 아직 답을 찾지 못한 딜레마다. 완성도를 위해 최대치로 가려 하지만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거지?' 싶기는 하다. 그럼에도 유효한 질문을 갖고 있는 건 유의미하다고 본다. 잊지 않고 계속 고민하면 좋은 답이 찾아지지 않을까."
-영화계는 침체기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하고 있고, 그 사이 OTT 등 콘텐트 제작과 제공 방식이 굉장히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데, 아직 극장, 그리고 영화를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한 명이다. 드라마와 시리즈에는 전혀 관심이 없나.
"오해다. 저는 언제라도 도전할 준비가 돼 있다. 하하하. 다만, 예를 들어 이를테면 '여명의 눈동자' '태백산맥' '토지' 이런 작품들은 그 서사를 만드는데 필요한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장용 영화에서 3~4시간의 러닝타임을 준다고 해도 다 소화가 안되는 이야기이자 분량이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긴 호흡으로 만드는 것이 맞다 생각한다. 내가 그런 서사를 다루고 싶다면 할텐데 아직 그런 생각이 나에게 들지 않는 것 뿐이다. 제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웃음) 그럼에도 '내가 굳이 극장용 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해야 하나?' 싶더라. 난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이 놓칠 수 없는 삶의 즐거움 중 하나다.
하지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영화 자체가 바뀌었다기 보다, 새로운 세대가 받아들이는 영화의 개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더 어디로 변화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걸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기준으로 만든다? 그건 만드는 사람의 기준이지 관람하는 사람의 기준은 아니다. 이미 시대는 바뀌고 있고, 아주 어려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영상에 노출되기 때문에 앞으로의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운드 시스템이나 시각적 효과 등 기술적인 부분도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니까. 나 역시 미래가 궁금하다."
조연경 엔터뉴스팀 기자 cho.yeongyeong@jtbc.co.kr (콘텐트비즈니스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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