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인지 광고판인지... 애국지사 최재형 선생 후손들의 한숨 [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거점 중 하나인 연해주 한인의 역사에는 빠트리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원과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 연해주 굴지의 거부로 떠올랐고, 이후 이 모든 재산을 동포의 권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에 바친 최재형 선생입니다.
최 선생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출범보다 한 달 더 빨리 해삼위(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국민회의’라는 임시정부를 세웠습니다. 이듬해 일본군이 최 선생이 거주하던 우수리스크를 급습해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켰을 때 최 선생이 즉결처형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최 선생의 시신을 찾을 수는 없었죠.
최 선생의 업적과 최후를 설명한 것은 최근 국가보훈부가 최 선생의 순국지 인근에서 국내로 반입한 흙과 최 선생의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국내로 운구해 국립서울현충원에 합장한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보훈부는 이른바 ‘가짜 후손 사건’으로 멸실됐던 최 선생의 묘지를 지난 14일 복원했습니다. 최 선생 순국 103년 만에 부부를 함께 모신 것이죠.
최 엘레나 여사 비석에 새겨진 업체들... 왜?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잡음이 나옵니다. 최 엘레나 여사의 묘지가 있던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 세워진 비석 때문입니다. 비석에 새겨진 비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최 엘레나 여사 묘지 터 비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부인이다.
광복 78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 정부는 2023년 8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운동가 묘역 108번에 최재형 묘를
복원하고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유해를 합장하였다.
순국선열 예우에 노력해준
대한민국 정부
국가보훈부
광복회
주키르기즈공화국 대한민국대사관
주식회사 티웨이항공
주식회사 페이버스
주식회사 반월투어
주식회사 엘지유플러스
롯데장학재단
서경덕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2023년 8월 6일
러시아ㆍ중앙아시아 최재형 후손 일동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
한눈에 보더라도 각각 한 줄씩 차지하고 있는 국가기관과 기업·재단, 개인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본문은 네 줄에 불과한데 기업과 재단, 개인은 여섯 줄이나 차지하고 있죠. 사실상 ‘광고판’이 된 셈입니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 어떤 근거로 기업 등을 비석에 넣었는지 질문하자 날 선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송덕비가 아니고 단지 (최) 엘레나 여사를 국내로 이장하는 데 도와주신 분들”이라며 “어떤 이의를 제기하는 거냐”라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기념관을 지을 때 후원한 사람들 전부 벽에 이름을 넣는 것처럼 기념비를 세우기까지, 또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한국에 모시기까지 민간인들이 다 했기 때문에 큰 업체들을 감사(의미)로 넣었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 대체 어떤 분이 궁금해하냐”고 따지듯 되물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비석에 업체들의 이름이 들어간 이유를 최 엘레나 여사 유해 봉환 비용을 국가에서 대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업회에 따르면 티웨이항공과 페이버스는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올 수 있게 항공 지원을 해준 곳입니다. 반월투어는 “현지에서 모든 업무를 다 관할해 도와준 여행사”이며 “우리(기념사업회)가 직접 가지 않아도 현지에서 업무를 담당하고 1,000만 원을 후원했다”고 합니다. 롯데장학재단은 “이거(이장) 하는 비용으로 1,000만 원을 후원”했고 서경덕 교수는 “기념사업회와 손잡고 국민 모금 운동을 해서 7,200만 원을 모금했다”고 합니다.
보훈부는 최 선생과 최 엘레나 여사의 합장식이 열린 지난 14일 LG유플러스가 지난 1일부터 진행한 ‘문화로 독립을 외치다’ 캠페인에서 적립된 기부금 5,000만 원을 최 엘레나 여사 유해 봉환에 소요된 비용으로 쓸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업체 5곳과 개인 1명이 비문에 쓰인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후손들은 부글부글 속이 끓고 있습니다. 묘비가 공개되자마자 최재형 선생 후손인 전주 최씨 종중은 입장을 내고 시정을 요청했습니다. 소중한 묘비가 너저분한 광고판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 후손 전주 최씨 종중의 입장
우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업적과 명예 회복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대한민국 국가보훈부와 독립운동가 최재형 기념사업회에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전주 최씨 종중은 선조이신 최재형 선생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후손으로서 예를 다하기 위해 많은 지원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주 최씨 종중은 최재형 선생 기념사업회를 이끌어주신 문영숙 이사장님께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 종인들이 개인 경비를 들여서 키르기스스탄까지 찾아가서 후손으로서 고유제까지 지냈는데 할머니 비석에 새겨진 내용이 너저분한 광고판이 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전주 최씨 후손들과 상의도 없이 세워진 비석의 내용에 대해 종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늦은 감이 있지만, 일반의 묘도 아니고 키르기스스탄에 남아있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부인의 묘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대한민국 국격과도 직결되기 때문에 함구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종중의 의견은 아래와 같습니다.
ㅡ 앞면에 한국정부가 이런사유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부인을 국립묘지로 모셔서 합장하여 안장한다는 사유를 한글과 키르기스스탄 언어로 써넣어야 합니다.
ㅡ 뒷면에는 대한민국정부. 보훈부. 광복회. 키르기스스탄대사관, 더 쓴다면 기념사업회 그리고 고유제를 지낸 전주 최씨 후손을 기록해야 합니다.
이는 다른 의미가 아니라 그곳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셨는데 고국으로 모셔갔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그 자체가 대한민국 국격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키르기스스탄에 남은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부인이시자 전주 최씨 후손에게는 할머니이신 최 엘레나 페트로부나 여사님의 비석을 광고판으로 만든 것은 기념사업회의 취지와 목적을 흐릴 수 있고 대한민국의 국격을 훼손할 수 있는 것으로 신속한 시정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서훈 없어 지원 못 해... 보훈부 국립묘지법 개정했지만 되레 뒷소리 들어
보훈부는 비슈케크에 세워진 비석에 대해 탐탁지 않은 모습이 역력합니다. 기념사업회가 되풀이해 ‘정부 지원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 이유로 보입니다. 문영숙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지난달 한 매체 인터뷰에서 “최재형 선생을 도와 평생을 내조하고 아들과 사위까지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단지 서훈이 없다는 이유로 유골을 모셔 오는 모든 비용을 민간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보훈부의 입장은 다릅니다. 보훈부 관계자는 “최 엘레나 여사가 국가유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비 지출을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감사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관계자는 또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이번에 (최 엘레나 여사 유해를) 이장해 오는 것을 지원하면 다른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를 전했습니다.
보훈부는 보훈처 시절이던 지난 1월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의 위패를 배우자의 유골과 함께 국립묘지에 합장할 수 있는 근거가 담긴 국립묘지법 개정을 이끌었습니다. 이를 통해 최재형 선생 순국 추정 장소의 흙이나마 현충원에 모실 수 있게 됐습니다. 보훈부 관계자는 “최재형 선생 같은 경우에는 (이장을) 당연히 지원한다”며 “최 선생의 묘를 복원하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법을 개정해 할 수 있는 선에서 정책적인 부분을 풀어낸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힘을 쏟은 순국선열을 예우하는 것은 후손의 의무입니다. 법 개정을 이끌어내면서 최재형 선생을 국내로 모실 수 있는 근거법을 개정한 보훈부는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또 민간의 지원을 이끌어내며 최 엘레나 여사 유해의 국내 이장을 추진한 기념사업회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묘비가 이런 형태로 남아 있다면 많은 분들이 발 벗고 나선 고귀한 뜻이 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일이었더라도 뒷말이 나오게 됩니다. 정부와 민간이 서로 이해하고 합심해 협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진욱 기자 kimjinu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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