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토착 자본과 일본 자본의 백화점 대전, 그 결과는?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8. 20. 11: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4)
미츠코시 경성점 옥상정원에서 내려다본 경성 시가지. 맞은편에 조선은행과 경성우편국이 보인다. [신세계그룹 블로그]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 의 한 토막입니다. 식민지의 무기력한 지식인이었던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날아오르려 했던 그곳, ‘미쓰코시 옥상’은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의 옥상이었습니다. 오늘은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배회하던 경성의 상업중심과 백화점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경성 백화점 열전
1930년 문을 연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의 전경. 준공 9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건물은 신세계백화점의 본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한주형기자]
선은전 광장은 경성의 주요 관청과 금융기관, 기업들이 인접해 있어 수많은 인파가 오가는 장소였습니다. 이 광장 일대에 백화점들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1930년대 경성에는 화신, 조지아, 미츠코시, 히라타, 미나카이 이렇게 ‘5대 백화점’이 있었습니다. 그 중 종로의 화신백화점을 제외한 네 곳은 일본 자본이거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이었고, 모두 선은전 광장에서 인접한 남촌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1915년 촬영된 미츠코시 오복점 경성 출장소. [서울역사아카이브]
1906년, 지금의 충무로인 혼마치에 미츠코시 오복점이 개관합니다. 일본의 백화점 체인인 미츠코시에서 수출입 업무를 위한 경성 출장소 겸 잡화점 운영을 위해 문을 연 점포였습니다. 경성에서의 사업성을 따져본 본 미츠코시는 경영 확장을 위해 1929년 출장소를 지점으로 승격합니다. 때마침 경성부청이 신청사로 옮겨 가며 선은전의 한 꼭짓점에 부지가 생겼고, 그곳에 대규모 신관을 지어 대형 백화점으로 발돋움합니다.
1930년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 개장일 당시 몰린 인파(왼쪽)와 백화점 개장을 홍보하는 포스터. [신세계그룹 블로그]
백화점 건물은 소비자의 이목을 끌고 환심을 사기 위해 화려한 외양을 갖춘 고층 건물로 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미츠코시 경성점도 이 공식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1930년 문을 연 미츠코시 경성점은 종업원 360여명,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대규모 업장이었습니다. 지금은 주변에 고층 빌딩들에 둘러싸여 그 존재감이 덜하게 되었지만 준공 당시만 하더라도 경성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건물이었습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 중앙의 화려한 대리석 계단을 따라 옥상정원에 닿으면 경성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고 합니다.
1931년 미츠코시백화점 경성점에서 제작한 ‘경성삼월신관안내’. 지하층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층별 매장 구성을 알 수 있다. 이 구성은 해방 이전까지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신세계그룹 블로그]
미츠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경성에 들어선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었습니다. 여기서 ‘근대식’ 이란 말은 영업 방식과 서비스, 관리가 지금의 백화점 운영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각 층마다 섹션을 구분하여 물건들을 진열했고, 점장 아래 인사 조직을 체계화하여 종업원들을 부렸습니다. 미츠코시 경성점은 가격 정찰제 판매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일 년에 두 차례(2월과 9월 말) 정기 할인 행사를 열어 물건을 원가 수준으로 판매했습니다. 조선인 손님에게는 조선어로, 일본인 손님에게는 일본어로 응대하며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1930년대 제작된 조지야 백화점(왼쪽)과 미나카이 백화점의 사진엽서. [서울역사아카이브]
비슷한 시기 남촌에는 백화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남대문통에는 조지야 상점이 확장 이전한 조지야 백화점이 문을 엽니다. 혼마치에는 미나카이 백화점과 히라타 백화점이 개점합니다. 미나카이 백화점은 이후 전국에 12개, 만주와 중국에 6개 지점을 내며 전체 종업원이 4천여 명에 달하는 전국 최대의 유통망으로 거듭납니다. 히라타 백화점의 경우 다른 백화점만큼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지금의 마트처럼 잡화와 식료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저가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여성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소공로에서 바라본 경성우편국과 미츠코시 경성점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경성에 백화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을 무렵, 이곳을 찾는 손님은 압도적으로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백화점들이 최상류층을 겨냥한 고급화 전략을 폈던 이유도 있지만 조선인들에게 백화점이란 장소는 생소한 곳이었고, 소재지가 남촌이라는 심리적 거리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30년대 경성에 일었던 ‘모던 붐’과 함께 백화점은 조선인들에게도 더 이상 낯선 공간이 아니게 됩니다. 모던 바람과 함께 등장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 새로운 의상과 소품으로 치장한 이들은 최신 유행을 좇으며 경성의 신문화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주 활동 무대는 세련된 남촌의 백화점과 카페였습니다.
미츠코시 경성점과 조선저축은행 본점. 조선저축은행 건물은 이후 SC제일은행 제일지점으로 사용되다 2019년 신세계그룹에 매각되었다. 2025년까지 리모델링을 거쳐 신세계 상업사 박물관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장할 예정이다. [서울역사아카이브]
백화점이 유행의 중심지가 되자 물건을 살 의도가 없음에도 백화점 안팎을 들락날락하는 무리까지 생겼습니다. 이를 혼마치를 방황하는 무리라는 뜻의 속어 ‘혼부라당’이라고 불렀습니다. 돈이 있던 사람들, 즉 극소수의 식민 지배세력과 친일세력은 특권적 서비스를 누리고 없는 자들은 ‘혼부라당’처럼 이들을 좇아 겉치레하는 모습. 이것이 백화점을 통해 드러난 식민지 소비문화의 현실이었습니다.

백화점 정문을 열고 들어서면 드넓은 매장이 펼쳐지고, 화려한 진열장 안에는 온갖 상품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남촌의 백화점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유입된 근대화와 자본주의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청계천 남쪽에 국한된 이야기였을 뿐, 대다수의 식민지 국민들은 그 혜택에 조금도 닿지 못한 채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연말 신세계백화점 본점 외벽에 설치된 미디어 파사드가 불을 밝히고 있다. [한주형기자]
조선인이 경영하는 북촌의 백화점
조선시대부터 500년간 이어온 상업 중심가 종로와 북촌 일대의 상권은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1920년대 쇠락한 종로 거리에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동아부인상회와 화신상회가 그나마 성업 중에 있었습니다. 보신각을 마주보고 나란히 붙어 있던 이 두 상회는 조선인을 타겟으로 하며 남촌의 일본 상점들과 경쟁했습니다.
1920년대 후반 화신상회(왼쪽)과 박흥식이 인수 이후 3층 건물로 재건축한 화신백화점의 모습. [화신오십년사편찬위원회]
그 중 화신상회는 1918년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회사로, 귀금속과 공예품, 양복, 잡화를 판매하는 대형 금은상회였습니다. 무리한 사업 확장을 이어가던 화신상회는 1931년 결국 경영난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인수해 화신백화점으로 재탄생시킨 인물이 박흥식입니다. 평안남도 용강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미곡, 인쇄, 제지와 관련된 사업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이 자본을 바탕으로 화신상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경영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동아백화점 인수 이후 구름다리로 두 건물이 연결된 화신백화점. [화신오십년사편찬위원회]
1932년 박흥식은 화신상회 건물을 3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재건축하여 화신백화점을 개점합니다.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8칸 기와집’까지 소비자 경품으로 걸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이어 갑니다. 화신은 같은 해 바로 옆 동아백화점(동아부인상회의 후신)까지 인수하며 북촌 제일의 백화점으로 거듭납니다. 인수 후 두 백화점은 육교로 연결되었고, 두 건물과 연결다리는 종로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화신은 미츠코시의 영업을 벤치마킹해 체계를 마련하였고, 전국의 1000개의 가맹점을 열 정도로 영업망을 확보하여 사세를 키웠습니다.
화재로 전소된 서관 공사 중인 화신백화점과 종로 거리의 모습. [화신오십년사편찬위원회]
1934년, 화신백화점에서 큰 화재가 발생합니다. 촛불에서 시작된 불이 옮겨 붙어 서관 전체와 동관 일부가 전소됩니다. 몇 년의 노력으로 자리 잡은 백화점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지만 박흥식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화재 진압의 책임을 물어 조선 총독을 압박했고, 대가로 종로경찰서 구청사를 빌려 임시 영업을 이어갑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으로 ‘119’ 번호가 경성중앙전화국에 등록되며 이후 화재신고 번호로 자리매김했다고 합니다.
1937년 전관 재개장 당일의 화신백화점. 화신백화점은 화재를 딛고 남촌의 어느 백화점보다 큰 규모로 재개장했다. [화신오십년사편찬위원회]
화신백화점에 설치된 15인승 엘리베이터 두 대와 안내원. [서울역사박물관]
1937년, 불타 사라진 화신백화점 서관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르네상스풍 초대형 건물이 완공됩니다. 새로 문을 연 화신백화점은 남촌의 어느 백화점보다 높고 화려했습니다. 15인승 엘리베이터가 두 대와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당대 최고의 백화점이었던 미츠코시 경성점에도 없던 시설이었습니다. 건물의 외벽에는 화신을 상징하는 빨간 꽃이 네온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화신백화점은 전국의 유통망을 확보해 유통 과정에서의 폭리를 빼고 소비자에게 저렴하고 질 좋은 물건을 공급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개점 초기에는 경성의 백화점 중 가장 낮은 매출을 기록하였으나, 점점 성장을 이어가 1942년에는 5대 백화점 중 세 번째로 높은 매출액을 기록했습니다.
화신백화점 신관과 종로 거리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화신백화점은 조선인 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이라는 의의가 있지만, 박흥식은 조선총독부 산하 각종 단체의 직책을 8개나 가진 친일 인사였습니다. 조선 제일의 거부였던 그는 교육을 위해 각종 농업·상업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 안창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친일 행적과는 반하는 이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으로서 기업을 경영하기 위해 일제에 기댄 것이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반대로 일제에 부역한 대가로 대형 백화점을 운영하고 사업을 확장하며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남촌의 백화점들과 다르게 화신백화점은 광복 이후에도 운영을 이어갔지만, 오너가 친일파라는 오명은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았습니다.

<참고문헌>

ㅇ정수진, 「서울의 인문학」, 창비

ㅇ김기호,「서울 남촌 : 시간,장소,사람」, 서울시 간행물

ㅇ최지혜,「경성백화점 상품 박물지」, 혜화1117

<사-연 지난화 보기>

ㅇ사-연 지난화 모음

https://www.mk.co.kr/news/running-story/S00010078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1) / 질퍽대는 동네에 일본인 몰려왔습니다...화려한 불빛이 슬퍼지네요 [사-연]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3740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2) / 일제가 남산에 세운 신궁 허물고...그 자리를 채운게 스키장?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9295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3) /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조선은행의 만주진출에서 비롯됐다 [사-연]

https://www.mk.co.kr/news/premium/10804110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