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으로 도배된 칼럼은 재미없어, 정치도 그럴것 [노원명 에세이]
데스크 시각에서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글은 좋지 않다. 신문업계의 오래된 관습이 그렇다. 많은 신문이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지향하노라 주장한다. 25년 차 기자인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세상에 당파적이지 않은 신문은 없다. 순정하게 홀로 빛나는 사실은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 모든 사실은 해석을 수반하며 신문은 해석을 통해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산업이다. 말하자면 신문이 파는 것은 하나의 관점이고 세계관이다. 세계관을 팔면서 당파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다. 이념 스펙트럼의 중간지대를 겨냥하는 신문이 더러 있지만 그 신문은 비당파적인 것이 아니라 중간 당파를 지향하는 신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신문이 표방하는 불편부당의 가치는 ‘대놓고 정치적이지는 말라’는 경계로 이해되면 족하다. 왜 대놓고 정치적이면 안되는가. 그것은 모럴 보다는 ‘레시피’의 문제이다. 커피를 마시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설탕을 전혀 안 타는 사람도 있고 두세 티스푼 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다섯 티스푼 이상 타는 사람은 거의 없다(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17~18세기 포르투갈에선 티스푼이 커피잔 중간에 세워질 정도로 설탕을 때려 넣는 레시피가 유행하기도 했다). 신문의 정치성은 커피에 넣는 설탕 같은 것이다. 너무 많이 넣으면 설탕물이 되어 커피를 즐기기 어렵다.
오늘날 취향이 고급인 사람이 커피에 다섯 티스푼의 설탕을 넣지 않듯 교양 있는 독자들은 정치적 격정으로 채워진 칼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잘 노출하지 않지만 오피니언 리더들이고 세상에 더 많이 관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선택을 받는 신문이라야 ‘리딩 페이퍼’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신문은 설탕 티스푼 개수처럼 정치성의 농도를 매번 신중하게 측정해야 한다. 신문은 기사의 선택과 방향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스며들듯 독자들에게 제시해야지 장광설로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장광설은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재미가 없다.
미디어는 본질적으로 정파적이면서 어느 정도는 불편부당을 지향해야 하는 내적 길항의 운명이다. 그 모순된 운명에 잘 적응한 미디어가 레거시 언론이고 앞으로도 그런 언론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나는 정권도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정권은 한 정파가 잡는 것이지만 어느 정권도 ‘우리는 모모 정파의 정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국민의 정권’이 있을 뿐이다. 정권에서 말하는 국민에 내가 포함돼 있는지 정권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그래도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대놓고 정파적인 것보다는 말이라도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지난 정권때 8.15 광복절과 삼일절이 다가오면 머리가 아팠다. 당시 대통령이 또 무슨 괴이한 역사관으로 나를 격동시킬지 걱정됐고, 그 편 가르기에 넌더리가 났고, 그들이 상정하는 국민에 나는 포함이 돼 있지 않다는 소외감을 확인하는 것도 불쾌했다. 정권이 바뀌고 나니 과연 그런 두통이 없어졌다. 나는 대통령 기념사를 듣고 분이 치미는 증상을 더 이상 겪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설탕의 개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난 삼일절 기념사가 설탕 두스푼짜리였다면 이번 광복절 기념사에는 다섯 스푼이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나는 입맛이 그다지 까다로운 편이 아니고 또 단것을 좋아하지만 설탕을 다섯 스푼까지 넣지는 않는다.
광복절 기념사에서 내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것을 굳이 대통령 기념사를 통해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와 당파성이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선동적인 칼럼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 연설이 더 차분했으면, 덜 도발적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정권때 내가 느꼈던 분노를 나와 당파성이 다른 사람에게 수건돌리기로 넘기는 것이 정권 교체의 의의가 되는 세상에선 정치를 하는 보람이 줄어든다. 정권은 당파적 가치를 덜 당파적으로 구현해야 성공한다는 점에서 신문과 같은 운명이다. 시끄럽게 외치지 말고 관점과 착상의 영리함으로 은근히 다가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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