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그의 문자메시지엔 찬란했던 과거가 담겨 있었다

한겨레 2023. 8. 2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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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패기와 사기
게티이미지뱅크

당신은 얼마나 자주 문자메시지를 쓰는가. 당신의 하루 중 얼마나 많은 부분이 휴대전화에 저장되는가. 그리하여 당신이 쓰는 문자와 대화 내역들은 얼마나 당신 자신을 담고 있는가.

지금 내 앞에 앉아 손을 떨며 사탕 봉지를 벗기고 있는 남자의 과거를 나는 알고 있다.(남자는 조사 도중 당이 떨어진다고 하며 사무실에 있는 사탕을 좀 먹어도 되겠느냐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검사실 한쪽에 사탕·초콜릿 같은 것을 비치해둔다.) 고급 슈트를 입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 성공한 청년 사업가로 투자자들과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그가 그의 직원들과 나눈 문자메시지들이 상당 분량 확보됐기 때문이다. 범죄를 도모하던 어떤 순간도, 공범과 신호를 주고받던 순간도, 일을 완성한 뒤 성취감과 두려움도 그들의 휴대전화 속 문자메시지로 남는다. 어떤 경우는 누군가의 인생의 한 시절이 통으로 문자메시지 속에서 복원되곤 한다. 눈빛에 자신감이 가득하던 시절 과거의 그를 나는 실시간으로 읽어낸다. 주로 ‘대표님’이라고 불리지만, 가까운 직원들에게는 ‘형’이라고 자신을 칭하기도 하는 쿨하고 매력 넘치는 젊은 남자의 시간이 그 안에서 고스란히 살아난다.

가장 먼저 등 돌린 이는…

“김 실장 오늘 투자자 미팅 자료 다시 한번 체크해서 보내줘.” “네 대표님. 그런데 ○○솔루션에서 뭐가 안 맞는다고 대표님 직접 뵙길 원한다고 하는데요.” “아, 걔들은 뭘 그렇게 확인할 게 많더냐. 일단 내가 다시 연락 준다고 하고 시간 좀 끌어.”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급한 것 같았습니다. 빨리 연락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실장아 형은 점심도 못 먹고 돌아다니고 있다. 어떻게 너네는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나서서 해결을 해줘야 하니.” “죄송합니다, 대표님.” “멀지 않았다 김 실장아 잘하자. 고지가 코앞이야 밑에 애들 잘 챙기고. 조금만 더 고생하자. 참, 박 변호사 사무실 이전한다는데 에스프레소 기계 좋은 걸로 하나 보내. 구리게 화환 같은 거 말고.” “넵! 식사하시고 건강 챙기십시오. 형님!”

대화는 경쾌했다.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을 진행하는 자의 고단함과 동시에 얼마 지나지 않아 거두게 될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뜨겁게 버무려진 젊은 직장인들의 대화였다.

바쁘지만 활기찬, 성공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설렘이 가득한,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 힘들지만 언제라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잃지 않는, 고독하고 유능한 사업가가 거기 있었다. 그들이 저토록 활기차게 도모하던 일들은 결국 범죄행위를 구성하는 일들이었지만, 저 메시지를 나누던 순간만큼은 그들 사이에 어떤 범죄의 낌새도 느낄 수 없다. 실체가 하나도 없는 허황된 모래성 같은 조건을 내세워 투자를 받고 있지만, 그 모래성의 어느 한쪽 귀퉁이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오직 불확실한 미래를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 패기만만한 비즈니스맨이 있을 뿐이다. 이 바닥에서 패기와 사기는 한끗 차이다.

끝내, 모래성은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훨씬 급박한 형태로 붕괴됐다. 무너진 모래성 아래 그의 거짓말들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분노한 투자자들은 앞다퉈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는 구속됐다. 그런데 망연자실하던 투자자들보다 먼저 그에게 등을 돌린 이들은 그와 가장 가까이 있던 이들이었다. 그를 전도유망한 청년 사업가라고 주변에 소개하며 함께 샴페인 잔을 들던 동업자들이 그의 사기 흔적을 찾아 투자자들에게 넘겼다. 처음부터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과시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는 주변의 증언들이 빗발쳤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문자메시지를 긁어 제출한 이는 ‘김 실장’이었다. 성공을 향해 함께 파이팅을 다지던 어느 날의 대화는 그가 대표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일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로 검찰에 제출됐다. ‘박 변호사’는 끝내 그를 면회하러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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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생폼사…이미 죽은 폼

그런 경위로, 투자자도 동업자도 같이 꿈을 이야기하던 동생도 떠나버린 그는 오늘 그의 동업자였던 ‘○○솔루션’에서 추가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내 앞에 앉아 있다. 잘나가던 시절의 그라면 입에 대지도 않았을 믹스커피를 연거푸 몇잔째 마시며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 동업 조건을 적은 계약서의 문구에 대한 질문에, 정산 내역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자 잠시 그는 미간을 좁히고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지만 더 이상 그조차도 과거의 그를 복원해낼 수 없다. 모든 계산과 설명과 구상들이 머릿속에서 풀세트로 돌아가 그림같이 퍼즐을 맞춰내던 그 시절의 자신으로 잠시만 돌아갈 수 있다면 검사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낼 수 있을 텐데, 기억은 전생처럼 흐릿하고 다만 포기되지 않는 억울함만이 생생한 파이팅으로 만져질 뿐이다.

그를 돌려보내고, 그가 남기고 간 종이컵을 본다. 저 종이컵으로 믹스커피를 마시던 남자와 최고급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갓 뽑은 커피만을 마시던 남자는 같은 사람인가? 사람이 몇개월 만에 그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는가. 아니면 불리한 자신의 위치를 극복해보고자 정신을 놓은 척 무너진 척 고도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으로도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설사 그가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폼생폼사의 인생에서 그의 폼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인간은 놀랍도록 영특하고 찬란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 저토록 한없이 무너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자주 보는데도 매번 아찔하다. 그의 안에서 무너진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결국 무너진 것은 과거의 그를 지탱하던 것일 텐데, 그런 것에도 꿈이라든가 희망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신뢰 같은 이름을 붙여도 좋은 건지에 생각이 이르면 입안이 쓰다. 우리 모두의 견고해 보이는 오늘은 무엇으로 지탱되고 있는지 문득 자문하게 된다.

사기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내 기억 속에 ‘대단한 그녀’로 저장된 여성 사기꾼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그녀는 정말 대단했다. 그녀는 삶의 모든 방면에서 사기적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했다. 인생 전체가 사기적이라고 하면 맞을까? 아무튼 그 대단한 사기꾼과의 싸움에서 나는 어쩐지 패배한 적이 있다.

대구지검 상주지청장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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