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네" 일상이 펄펄 끓거나 물폭탄…法은 '쿨쿨', 이대로면
[편집자주] 기후위기가 현실이 됐다. 선을 넘은 더위와 비가 우리와 일상 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한다. 그동안 해오던 방식으론 폭염, 폭우 등 기상이변에 따른 피해를 막을 수 없다. 획기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다.
극한 호우와 폭염 등 '기상이변'이 일상이 되는 '뉴노멀'의 시대다. 지난달 충남 청양에선 이틀새 5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500년에서 10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강우량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날씨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새로운 기후 패러다임에 맞춰 법·제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19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극한 호우로 47명이 숨지고, 3명이 실종됐다. 행정안전부의 자료를 보면 지난 2012~2018년 매년 호우로 인한 전국 인명피해(사망·실종)는 10명에 못 미쳤지만 2020년 44명으로 급증했다. 2017년까지 자연재해에 포함되지 않았던 폭염은 2018~2021년 연평균 36.5명의 생명을 빼앗았다.
정창삼 인덕대 스마트건설방재학과 교수는 "기후변화, 기후위기로 인해 전 세계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며 "이제 기후변화 예측이 아니라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2021년 지구의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1850~1900년) 수준보다 약 1.11도(℃) 높아졌다. 수증기는 기온이 1도 상승할 때마다 7%씩 늘어나는데 이 증가량을 무게로 환산시 8900억톤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우리나라의 극한 호우는 이상고온으로 한반도 상공에 막대한 수증기가 유입되고, 이것이 곧 장마전선과 저기압을 만나 발생한 것으로 분석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재난 관련 예산편성부터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며 "자연재해 대응 복구 예산보다 예방과 대응에 쓰이는 예산을 더 늘릴 필요가 있다. 예방 관련 예산 편성·집행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재해의 대부분이 '물'과 관련된 재해인 만큼 호우·침수 피해 예방에 주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2011~2020년 자연재해 피해액은 10년간 총 4조4200억원에 달했고 그 중 태풍, 호우, 대설 등 물 관련된 피해 규모가 96.8%(4조2800억원)였다. 전문가들은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단계로 나아가려면 구조적(구조물 등 설치)·비구조적(법·제도) 대책이 모두 수반돼야 한다고 본다.
이승수 한국환경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지난 16일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도시하천유역 침수피해방지대책법 입법토론회'에서 도심의 호우·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구조적 대책으로 대심도터널, 빗물펌프장, 빗물저류조, 하수(우수)관로 용량 확대 등을 제안했다. 비구조적 대책으로는 침수위험지도 제작·공표, 침수예경보시스템 및 상황전파 시스템 마련, 침수대피장소 설치 등을 제안했다.
노 의원실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91.8%가 도시지역에 거주중이고 도로가 대부분 아스팔트로 돼 있어 물이 하수구로 빠져나가기 어렵다. 일례로 서울은 불투수면 비율이 1962년 7.8%에서 2021년 52.3%로 크게 올랐다. 불투수면이란 빗물 등이 지하로 스며들 수 없게 아스팔트 등으로 포장된 도로, 보도 등을 뜻한다.
이에 서울시는 침수취약지역인 강남역·광화문·도림철 등에 '대심도 빗물배수터널' 구축 사업을 추진 중으로, 이르면 올 11월 말 착공 예정이다. 대심도 빗물배수터널은 지하 40~50m의 땅속 깊은 곳에 설치하는 원형 터널로 복우시 빗물을 보관하고 비가 그치면 하천으로 방류하는 역할을 한다.
법 개정도 시급하다. 지난달 말 일부 지방하천에 국비 지원을 허용하는 하천법 개정안이 통과된 가운데 노 의원이 대표발의한 도시침수방지법(도시침수하천유역 침수피해방지대책법) 제정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도시침수방지법은 일원화된 도시침수 대응체계를 확립하고 통합예보 및 전담조직을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현행법에 따르면 하수도정비는 하수도법에, 하천 정비는 하천법에 따라 각각 이뤄져 효과적 대응이 어렵다.
황희 민주당 의원은 침수시 진입 차단시설이 설치된 곳이 일반국도 지하차도 68개소 중 3곳, 고속도로 지하차도 28개소 중 6개소에 불과하다며 '도로법 개정안'을 지난 16일 대표 발의했다. 천재지변 등으로 발생하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지하차도, 터널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설에 통행 차단 설비, 화재 감지 및 자동경보 설비를 반드시 갖추도록 하는 내용이다.
폭염에 대비한 법령 정비도 요구된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르면 폭염은 자연재난 범위에 속해 매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폭염 대책을 마련토록 돼 있다. 또 고용노동부가 가이드라인인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사업주가 폭염시 휴게시간 지정 등 적절한 조치를 할 뿐 아니라 그늘막 등 시설을 설치토록 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 권고사항인 만큼 한 발 더 나아가 '의무화'를 명시한 법개정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나온다
이용빈 민주당 의원이 2021년 발의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은 근로자의 노동환경에 위협을 주는 폭염 등 기후여건 도래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작업중지, 휴게시간 조정 등 조치를 하도록 하는 한편 정부가 작업중지에 따른 임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하는 대책을 마련토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아울러 폭염에 따른 작업중지로 계약 기한 연장, 사업마감 기한 연장 등이 불가피한 사업주에 대해 부당한 손실과 피해가 발생치 않도록 정부는 해당 사업주를 보호하고 사업자 간 갈등사항을 중재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산업계는 법안 발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 작업이 중지되면 정해진 납기 물량 소화를 위해 추가 인원을 고용해야 할텐데 현실적으로 비용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 등이다.
기후변화에 보다 효과적 대응을 위해 ICT(정보통신기술)을 활용토록 하는 법안도 계류 중이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022년 '기후·기후변화 감시 및 예측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기상청장으로 하여금 기후 감시 및 예측 기술의 연구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전문인력을 양성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ICT 기술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더 자주, 더 크게 발생하는 산불 예방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한 기업이 자신들이 개발한 AI(인공지능) 영상 감지 기술을 국내 산불 감시에 도입하려 했지만 정보 제공, 보안문제 등에 대한 우려로 국내 공공기관에 도입되지 못한 사례가 있다. 배재현 국회입법조사처 행정안전팀 입법조사관은 "첨단기술과의 접목이 필요한 영역에 있어 민간 기술연계는 필수적"이라며 "개인정보와 관계없는 재난분야 공공데이터는 과감하게 풀어 대형재난을 방지할 수 있는 혁신 기술이 개발·사용되도록 기반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 대응 관련 ICT 기술이 적용되고 제도가 마련되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재난 발생지에서 가장 근접한 관할 지방자치단체의 빠른 판단과 노력이란 지적도 나온다.
기후위기에 대응해 정부의 재난안전 정책과 조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시스템이 전면 개편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올해 폭우와 폭염으로 사상자가 잇따르자 정부가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섰다.
19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달 극한호우로 인해 47명이 숨지고, 3명이 실종됐다. 이는 지난해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를 덮친 당시 희생자수(사망자 11명·실종자 1명)의 4배를 넘어선 수치다. 뿐만 아니라 질병관리청이 파악한 올해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9명(5월20일~8월15일)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7명의 4배를 넘어선다.
정부는 그간 기후변화에 대비해 지난해 12월 재난관리 체계를 개선하고, 올해 1월 국가안전시스템을 개편하는 등의 조치를 해왔지만 이번 기록적인 호우를 경험한 뒤 재난관리 체계와 대응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난달 31일 '기후위기 대응 수해방지 범정부 특별팀'(TF)를 출범하고 격주 회의를 열어 과제 선정에 나서고 있다. 특히 TF 출범 이후 그간 재난안전 대응회의에선 모습을 보기 힘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해양수산부, 질병관리청도 참여의사를 밝혔다.
구체적인 과제 선정에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하지만 방향성은 정해졌다는 것이 TF 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우선 14명이 숨진 충북 오송 궁평2지하차도 사고로 드러난 관계기관의 소통 및 협력체계를 손볼 예정이다. 이번 참사에서 같은 지역에 있는 충북도청과 청주시청 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아 상황전파 등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지역 소방과 경찰까지 아우르는 현장 중심 대응체계를 세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성호 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본부장도 관련 기관간 신속한 상황전파와 조치가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 본부장은 지난 4일 TF 과제선정 회의에서 "재난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재난상황을 신속하게 인지해 관계기관에 전파하고 해당 기관에서는 즉각적으로 조치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첫 단추는 지자체와 소방, 경찰 등 대응기관의 상황관리 체계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와 산사태 등에 대한 예·경보 체계도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폭우시 산사태와 관련한 예·경보 체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첨단과학기술을 활용한 대책이 나올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재난안전 주무부처인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호우 등이 국민안전을 위협한다고 보고, 이달 안에 재난안전관리본부를 재탄생 수준으로 개편키로 했다.
현재 '안전정책실-재난관리실-재난협력실'로 구성된 체계를 실제 재난업무 프로세스인 예방-대비-대응-복구에 맞춰 '안전예방정책실-자연재난실-사회재난실-재난복구지원국' 체계로 개편된다. 그간 사회재난과 자연재난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조직을 자연재난실과 사회재난실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재난관리실 산하에 있던 재난 복구지원국은 재난복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별도 국으로 독립시켰다.
기후위기 대응 수해방지 범정부 TF 관계자는 "하루 500~600mm의 호우가 잦은 만큼 기후위기에 따른 대응방향이 달라져야 한다는 데 모든 부처가 공감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과제선정이 이뤄져 있지 않다"면서 "하천 정비 등 법률 개정이 필요한 장기 과제와 부처별로 대응이 가능한 단기 과제를 구분하고, 당장 실현 가능한 사안부터 서둘러 조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성은 기자 gttsw@mt.co.kr 이창명 기자 charmi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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