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저평가 해소, ‘지배구조 개선’서 답 찾았다…韓도 주주활동 활성화 고민해야” [헤경이 만난 사람 - 박유경 네덜란드연금운용사 아태총괄]

2023. 8. 2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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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에서 아시아 책임투자를 담당하는 박유경 총괄이사. [대한변호사협회]

[헤럴드경제=유혜림 기자] “최근 일본이 심상치 않다. 아베 신조 총리 시기에도 한때 증시가 뜨거웠지만 뒷심이 부족해 ‘반쪽 성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이후 최근 2~3년간 일본 기업과 대화하면서 느낀 건 ‘절박하다’는 인상이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이번이 우리에게 밀려오는 '캐피털(자본)'을 위대하게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공감대가 강했다.”

유럽 최대 연기금인 네덜란드 연금자산운용(APG)에서 아시아 책임투자를 담당하는 박유경 총괄이사는 헤럴드경제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 증시가 되살아난 배경에 대해 “일본 금융청과 기업은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저평가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일관성 있게 해왔다”며 이같이 밝혔다. 이 과정에서 중장기적 기업가치가 올라가고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분위기가 정착됐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일본 증시의 상승세도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세계 3대 연기금 운용기관 중 하나인 APG는 지속가능성·사회적 책임·지배구조를 중점에 둔 투자에 나서고 있다. 8월 기준 약 789조원 규모의 연금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박 이사는 15여 년간 국내 기업 뿐만 아니라 일본 등 아시아 기업들의 의사결정 체제, 주주를 대하는 자세를 지켜봐 왔다. 아시아 지역의 책임투자를 이끄는 박 이사를 만나 일본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한국 경제에 주는 시사점을 짚어봤다.

아베노믹스 일관성, 체질 개선 이끌어

박 이사는 일본 기업이 체질을 개선한 배경을 3가지로 구분해 설명했다. 특히 정부 차원의 일관성 있는 지배구조 정책이 가장 주효했다고 주목했다. 2012년 아베노믹스(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정책) ‘세 번째 화살’의 일환인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일본 금융청이 중심이 돼 2~3년 단위로 시장 여건에 맞게 꾸준히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도쿄 증권거래소(TSE)도 금융청의 정책을 뒷받침해줬다. 거래소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이하로 떨어지는 기업들에게는 자본수익성(자본비용 개선)과 장래의 성장성 관점에서 과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개선 방침과 구체적인 목표까지 공개해달라며 강도 높은 요구 활동을 했다. 박 이사는 “일본과 달리 한국 지배구조 정책은 정권마다 연속성이 떨어지고 주체 기관도 모호해 기업들의 혼란만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 최근 3년간 일본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무엇인가.

2019년 2차 아베노믹스로 돌입하면서 '질적 성장'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아베 집권 당시 기업 거버넌스와 스튜어드십 코드에 관한 논의도 굉장히 활발했지만 당시 시장에선 “반쪽 성공”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럼에도 정책을 뒤집지 않고 주기적으로 점검하면서 2~3년 단위로 개정안을 내놓는 작업을 해왔다. 기업 체질 변화를 이끄는 정책은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 퀄리티를 서서히 올리더라도 일보 후퇴하는 일은 없었다.

- 한국 지배구조 정책은 어떤가.

한국 금융당국은 ‘흑과 백’처럼 지배구조 정책을 다룬다. 어떤 정부는 하고 또 새 정부가 들어서면 안 하는 식이다. 일본은 금융청이 주도해 스튜어드십·기업거버넌스 정책을 끌고 가니 기업 입장에서 안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가령, 스큐어드십 코드의 경우 금융위도 거래소도 아니고 ESG기준원이라는 지원기관에서 한다. 정부가 구심점이 돼 진정성,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하는데 애매한 정책을 누가 듣겠는가.

주주 행동주의, 저평가 해소 주효

일본 정부는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주주 행동주의’를 적극 활용했다. 연기금 등 대형 기관투자자와 행동주의 펀드는 사내유보금을 대규모로 쌓아두면서도 투자도, 배당도 하지 않는 기업들에게 변화를 요구하며 지배구조 개혁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주주 활동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박 이사의 진단이다. 미국, 영국 등 선진시장에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등 다양한 이슈를 안건으로 올리는 주주 제안이 활발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재무제표 승인, 정관 변경과 임원 선임 등 주주총회 결의 사항에 한해서 주주 제안이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박 이사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주주제안’을 ESG 주제에 한해서 도입해 주총 활성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와 함께, 일본이 골머리를 앓았던 ‘상호주’ 문제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호주란 상장기업이 자신의 주식을 상대기업이 소유하게 하고, 그 대가로 상대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는 경우의 주식을 뜻한다. 경영진의 우호지분으로 작용하다 보니 주주 활동도 무력화시킬 가능성도 크다는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4년 전 일본 거래소는 상호출자 축소 계획을 공시하라는 등 규제를 강화한 바 있다. 박 이사는 최근 한국 기업에서도 일본의 상호주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했다.

- 한국은 왜 주주제안이 활발하지 않은가.

주주제안에 법적인 구속력이 너무 강하다보니 제안하는 투자자나 기업 모두 큰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주제안을 하는 순간 투자자와 기업 간 대결구도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대주주 지분이 많은 기업에 제기하는 주주제안은 무력화되기 쉽다. 기업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대부분의 국내 기관투자자라면 주주제안은 엄두도 못 낸다. 기존 주총 결의사항 말고도 다양한 의제까지 주총 안건으로 올려놓고 주주와 회사가 소통하려면 ‘권고적 주주제안’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권고’ 성격이라 회사 입장에선 법적 구속력도 없고 주주들은 주총 표대결과 상관 없이 경영진과 이사회에 기후위기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고적 주주제안이 이사회의 권한을 제약하고 남발될 수 있다고 우려도 있다.

주총 결의사항에 해당하는 주주제안은 현행처럼 유지하되 ‘ESG 주제’로만 한정해 ‘권고적 주주제안’을 도입해볼 수 있다. 터무니없는 제안은 그냥 넘겨도 된다. 법적 구속력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사회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있다. 다만, 권고적 주주제안은 일종의 보완장치일 뿐 주주제안 자체가 활발해져야 한다. 우선 ESG 주제 한해서 권고적 주주제안을 도입해보고 추후 기존 주주제안 요건·주제 등 문턱을 낮춰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부정적 의미의 투자 철회보다는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형태의 주주제안이 더 긍정적이고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 올해 KT 이어 네이버까지 상호주를 경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은 ‘상호주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호주는 주주활동을 틀어막는 고질적인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때 상호주 비중이 50%를 넘겼던 도요타의 경우, 주총만 열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상호주는 주총을 요식행위로 전락시킬 수 있다. 상호주는 한번 시작되면 끊기 어려운 구조다. 웬만해선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상호주 조짐이 나타나는데 경계해야 한다.

뭉치는 日기업…韓 각자도생 성향 강해

박 이사는 한국과 일본 기업이 글로벌 투자자를 비롯 시장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도 다르다고 짚었다. 탄소배출 감축 과제가 대표적이다. 저렴하고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공급해달라고 산업별로 뭉쳐 정부에 요구하는 일본 기업과 달리 한국 기업은 각자도생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박 이사는 “한국 기업들이 뭉쳐 정부에 필요한 정책을 적극 요구하고 얻어내야 시장 역동성도 높아질 수 있다”며 “정부도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시장 흐름에 대응하는 한일 기업 간 차이점이 있나.

일본 기업들은 산업별로 뭉쳐서 '공동대응'하는 특징이 있다. 물론 공동대응에는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각각 기업들의 역량이 모여서 시너지가 발현되는 장면을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기업이 수출을 주도하고 나라를 이끈다는 인식이 강해 일본 기업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한 배’를 탄다는 공감대가 있는데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따로 논다는 인상이다.

-어떤 장면을 보고 그런 인상을 느꼈는가.

공급망 탄소중립을 실현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은 거의 울고 있는 상태다. 기후위기 대응이 글로벌 투자사들의 투자 결정 요소로 떠오르면서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을 친환경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하는 숙제를 풀어가고 있다. 사실 재생에너지 확보와 같은 문제는 기업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한국 기업들이 “제발 한국전력에 가서 (재생에너지를 공급해달라는) 말 좀 해달라”고 우리에게 호소하는 상황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기업들도 손 놓고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일본 기업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을 텐데.

일찍이 일본 기업들은 그룹사며 산업별로 뭉쳐 재생에너지 발전비용을 낮추고 송전망의 용량을 늘려달라고 한목소리를 내며 정부와 전력사들을 움직였다. 한국 기업들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예컨대 한국에서 삼성그룹과 LG그룹이 공동대응한다, 이런 협력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나마 철강과 반도체 산업에서 협력하는 움직임도 포착되지만 정부에 강력한 ‘권고’까지 내놓지는 못하는 것 같다. 2050년까지 공급망의 탄소중립 압박감이 강해지고 있다. 정부 눈치가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한국 기업들도 뭉쳐야 산다.

fores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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