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 도서관에서 빼주세요"…21세기판 '금서 논쟁'[체크리스트]
공공도서관 "시민의 정보 접근권 보장할 의무 있어" 난색
[편집자주]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거나 쟁점이 되는 예민한 현안을 점검하는 고정물입니다. 확인·점검 사항 목록인 '체크리스트'를 만들 듯, 우리 사회의 과제들을 꼼꼼히 살펴보겠습니다.
(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이 책들은 도서관에서 빼주세요"
최근 공공도서관들이 학부모들의 이같은 요구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중세·군부독재 시절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금서 논쟁'에 해당 기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부모들이 문제 삼고 있는 책들은 페미니즘·성소수자 관련 아동청소년 도서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 그림책 '꽃할머니' 등의 책도 포함돼 있습니다.
◇ "잘못된 성 고정관념 심어준다" 빗발치는 학부모 민원…충청 이어 경남·경기 지역으로 확산 시작은 충청도 일대 공공도서관에 제기된 일부 학부모 단체들의 민원이었습니다. 도서관에 비치된 일부 도서가 아이들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친다며 열람과 대출을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충청 일대의 공공도서관들엔 지난 5월부터 리스트 속 도서 퇴출을 요구하는 대면 및 전화 항의가 폭주했습니다. 학부모단체들은 '금서' 117권의 리스트도 같이 제공했습니다.
충남 소재 공공도서관의 한 관계자는 "전체 리스트 120권 중 우리 도서관엔 60여권 정도가 있다"며 "지금은 전부 도서 대출이 가능하지만 당시는 민원이 폭주해 해당 도서의 유해성 등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학부모 단체들의 이 같은 요구에 더불어 충남 등 일부 지자체에선 문제가 제기된 도서 중 7종에 한해선 도내 열람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들 도서에 과도한 성적 내용이 적혀 아이들의 접근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입니다.
이 같은 도서 검열은 충청 지역을 넘어 경남·경기 지역까지 퍼지고 있는 양상입니다. 울산의 한 공공도서관에선 퀴어 등을 주제로 한 강연을 폐지하라는 시위가 벌어져 도서관 측이 강연자와 협의해 내용을 조정하기도 했습니다. 용인 등 경기도에서도 항의 전화가 이어져 '금서'로 불린 책의 비치 여부를 고민하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미국에서도 '21세기 분서갱유 진행중'…노골적 음란 표현 vs 독서할 자유
이 같은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소수자 차별에서 인종 불평등 이슈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도서를 금서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도서관협회가 지난 4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특정 도서를 학교, 공공도서관에서 볼 수 없도록 요청한 건수는 2022년 1269건으로 급증했습니다. 2021년(729건) 대비 70% 넘게 늘어난 수치입니다. 금서 신청이 들어온 도서 13권 중 절반 이상이 성소수자 이슈를 다루고 있습니다.
금서를 찬성하는 이들은 해당 도서가 주로 다루는 성소수자 및 인종 불평등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동 청소년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특히 이들 책에서 다루는 노골적인 성적 내용이 유아 및 청소년들에게 유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반대측은 독서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할 권리라고 말합니다. 설령 노골적 성표현이 문제라고 해도, 그걸 읽을지 말지의 여부는 당사자와 그들의 보호자가 결정할 문제라는 겁니다. 편견 없는 자세로 지식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할 공공 도서관에 '금서'가 생기면 표현 및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큽니다.
보수 지지세가 강한 아칸소 주 등 7개 주는 성소수자, 인종차별 등을 다룬 일부 도서를 공공 도서관에 비치할 시 형사처벌을 받는 법을 통과시켰으나 시민단체의 반발로 시행 효력이 중지된 상태입니다.
◇ 뿔난 출판업계 "특정 내용 기반으로 열람·대출 제한 두는 건 있을 수 없어"
출판 및 도서관 업계 역시 '금서 지정'에 난색을 표하는 입장입니다. 편견 또는 일부의 주장만으로 누군가의 정보 접근권을 침해하는 역할은 일종의 '검열'에 해당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일부 학부모들의 민원이 지속되자 충청 공공도서관들은 이들이 문제를 제기한 책 리스트가 정말 유해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해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출판 관련 협·단체들에게 발송했습니다.
공문을 받은 단체 중 하나인 대한출판문화협회 관계자는 "도서관인 윤리선언 및 관련 헌법재판소 결정을 근거로 특정 도서를 '금서'로 지정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취지의 답변서를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도서관인 윤리선언은 사서가 지켜야 할 직업적 소명 및 의무를 담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입니다. 1997년 10월 한국도서관협회에서 발표한 이후 개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선언문 제 2항에 따르면 도서관인은 편견을 배제하고 정보접근을 저해하는 일체의 검열에 반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를 해치는 일부 사례를 제외하고는 선정성을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고 본 여러 헌법재판소 결정도 학부모단체의 검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이같은 사안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한국도서관협회를 비롯한 21개 협·단체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대응책을 검토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명서에서 협·단체들은 최근 일어나는 '금서' 지정 요구에 대해 "국민의 지적 자유 보장을 목표로 존재하는 공적 시설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며 "어떤 형태의 외압이나 검열, 일괄 폐기, 이용제한도 단호히 거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전문가들 "도서관 책, 대부분 검증 거쳐 소장…일방적 '금서' 요구는 옳지 않아"
전문가들 역시 평등한 정보 접근권 및 출판의 자유라는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선 '금서 리스트' 지정은 부적절하다는데 동의합니다. 특히 한국 공공 도서관의 경우 편향성 등 문제를 보완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어 일방적인 금서 요구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입니다.
도서관법 제 34조에 따르면 공립 공공도서관은 효율적 운영 및 문화시설과의 협조를 위해 도서운영위원회 등을 두고 혹시나 발생할 수 있는 편향성 등에 대한 문제를 보완할 수 있도록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서관운영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은 지자체 조례로 결정하고 있는데, 출판 도서 전문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인적 구성을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남영준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도서관 책들은 전문가 자문 및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해 구매 및 소장 여부가 결정된다. 최소한의 검증을 거친 책들이라는 것"이라며 "설령 책 내용이 문제가 돼도 '도서관의 상식'을 존중하며 논의해야지, 일방적인 열람 제한 및 폐기 요청은 기본권 침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kimye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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