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할 수 없음’... 화산재를 품은 伊 시칠리아 와인, 한식과 만나다
이탈리아와 우리나라는 공통 분모가 많다.
두 나라 모두 반도국가다. 각각 유럽과 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다. 역사적으로 외부에서 침입을 많이 받은 탓에 외부 위협이 닥치면 곧장 뭉치는 성향 역시 뚜렷하다.
지리적으로는 지형이 험하고 산지가 많다. 지역 구분도 분명하다. 여기에 사계절이 더해지면서 지방마다 개성 있는 음식 문화가 발달했다.
우리나라에 제주도가 있듯 이탈리아에는 시칠리아라는 섬이 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섬이다. 제주도 같은 화산섬이기도 하다.
시칠리아를 빼고 이탈리아의 영혼을 논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가 있다.
Without Sicily, Italy creates no image in the soul.
Here is the key to everything.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기행기(Italienische Reise)
한때 이곳은 마피아 본고장으로 악명을 떨쳤다. 영화 ‘대부’ 배경이 시칠리아다. 마피아 흔적이 사라진 오늘날 시칠리아는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음식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교차로로 탈바꿈했다.
지중해 음식을 논하는 자리에 와인이 빠질 수 없다. 이탈리아는 와인 생산량을 기준으로 전 세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국가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서도 와인용 포도밭 면적이 가장 넓다.
여기에 화산토양 같은 다양한 지질학적 특징과 지중해성 기후까지 갖췄다. 포도알은 덥고 건조한 여름을 거치면서 농익는다. 온화하고 적당히 비가 오는 겨울은 수확을 마친 포도밭에 영양분을 새로 제공한다.
세계적 와인 석학 마스터 오브 와인(MW·Master of Wine) 잭키 블리슨은 시칠리아 지리적 연구 보고서에서 “시칠리아는 산이나 구릉이 많아 평지가 전체 표면적 대비 14% 수준”이라며 “섬 전반에 걸쳐 고도가 높아 다른 포도 재배 지역보다 수확 시기를 7월 말부터 11월까지 길게 가져갈 수 있다”고 평가했다.
공식적으로 시칠리아 와인 역사는 40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800∼700년 그리스인들은 포도 재배와 양조 기술을 시칠리아 동부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도 면적 14배에 달하는 지중해에서 가장 넓은 섬, 화산토가 펼쳐진 천혜의 포도 재배 환경은 일찍부터 이 곳을 와인 생산지로 키웠다.
그러나 정작 근현대 들어 시칠리아 와인은 경쟁력을 잃었다. 1980년대까지 시칠리아는 저렴한 벌크(bulk)와인 생산지에 그쳤다.
벌크와인이란 병에 담기지 않은 채 팔리는 와인을 말한다. 오래전 우리나라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퍼다 팔던 방식과 비슷하다.
벌크와인이라고 품질이 항상 나쁘진 않다. 하지만 벌크와인은 원산지 통제 등 품질 좋은 와인을 얻기 위한 까다로운 규제와 거리가 멀어 품질이 일정하지 않다. 어디서 온 지 알 수 없는 포도를 몽땅 섞어 만들기도 한다. 지역별 특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양조 방식이다.
당시 시칠리아에 들어와 있던 영국인들은 이 벌크와인을 다시 가공해 마르살라 같은 주정 강화 와인으로 만들었다. 시칠리아 와인만이 가지고 있던 개성은 대량 생산과 재(再)가공 사이에서 사라졌다.
‘고급 와인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칠리아가 잠재력을 내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이후다. 이탈리아 와인 산업 규모가 커지고, 관련 학문이 체계화되면서 와인 전문가들은 다시 시칠리아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70여 종에 달하는 이 지역 토착 품종이 빚는 다양성에 주목했다. 널리 알려진 샤르도네나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국제적인 포도 품종은 어느 정도 결과물을 예상할 수 있다.
반면 시칠리아에서는 그릴로나 카리칸테, 프라파토 같은 생소한 토착 품종을 많이 사용한다. 이런 토착 품종들은 섣불리 예측할 수 없고,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와인을 만들어 낸다.
일찍부터 제초제나 농약을 사용했던 이탈리아 내 다른 와인 생산지역과 달리 친환경 농법을 오래도록 고수했던 점도 관심을 끌었다. 이탈리아에서 키우는 유기농 포도나무 세그루 가운데 한그루는 시칠리아에 있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을 연결하는 입지 조건은 세계 각국 음식과 잘 어울리는 와인을 생산하는 데 한몫 했다.
와인즈 오브 시칠리아(Wines of Sicilia)와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주은’의 김주용 소믈리에는 “시칠리아 와인은 한국 음식과도 두루 잘 어울린다”며 “전통적인 이탈리아 남부 와인이 직선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인 반면 시칠리아 와인은 신선하고 우아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가령 이 지역을 대표하는 화이트 와인 품종 그릴로로 만든 와인은 깔끔한 느낌이 특징이다. 복숭아 같은 과일향과 짭조름한 풍미도 있어 국내산 메밀을 사용한 메밀 증편, 탕평채, 육포 다식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참소라나 매생이 죽처럼 바다 향이 강해 어울리는 술을 찾기 어려운 음식과도 쉽게 조화를 이룬다.
김주용 주은 소믈리에는 “오골계 같은 흰 살 육류나 도토리 부꾸미를 깨즙 양념에 버무려 낸 월과채와 함께 즐기면 맛을 살리는 효과가 있다”며 “발효 음식인 된장이 들어간 면 요리에 짭조름함을 더하면 된장 향이 입안에서 더 풍성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시칠리아 와인은 ‘레드와인은 해산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과도 거리가 먼 편이다.
프라파토라는 토속 품종으로 만든 레드 와인은 평소보다 살짝 온도를 낮춰 마시면 신선한 붉은 과일 향이 기분 좋게 올라온다. 지나치게 달콤하거나 끈적한 느낌이 없어 매콤한 고추장을 베이스로 만든 갑오징어 물회와도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다.
데보라 살라모네 와인즈 오브 시칠리아 디렉터는 “과일향이 풍부한 프라파토가 물회가 가진 매콤한 맛을 부드럽게 감싸준다”고 평가했다.
네로다볼라라는 품종 역시 시칠리아에서는 지역마다, 혹은 와이너리 스타일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주된다. 네로다볼라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많이 키우는 레드와인 품종 포도다. 가볍게 마시기 좋은 프라파토와 달리 일반적으로 묵직하고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에 자주 쓰인다.
그러나 바람이 따뜻하고 기후가 더 온난한 시칠리아 서부 지역에서는 같은 네로다볼라로 양조를 해도 더 부드럽고 마시기 편한 와인이 나온다. 마셔보기 전까지 함부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시칠리아 와인의 특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이인순 이인순와인랩 대표는 “시칠리아 와인은 마시기 쉬울 뿐 아니라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와인”이라며 “일상에서 한식과 편하게 곁들여 마시기 좋은 와인인데, 가격 대비 만족도도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시칠리아에서 활약하는 젊은 와인 생산자들은 친환경 방식 포도 재배나 생물 다양성 유지 같은 최근 양조 흐름을 적극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며 “그 결과 신선하고 깨끗한 느낌을 강조한 시칠리아 와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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