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순결 지켰는데 ‘임신’…인간은 힘들지만 동물은 가능하다? [생색(生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8. 20.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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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색-10] 순결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던 숙녀였습니다. 첫 경험은 결혼하는 사람과 하겠노라고 매일 밤 다짐했지요. “지난밤 화려한 잠자리를 가졌다”는 친구들의 가십성 대화에도 일절 끼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몸의 변화를 느낀 건 건강검진 이후였습니다. 검진 3개월 후부터, 어찌 된 일이지 속이 자주 매스꺼웠지요. 배가 더부룩하고, 음식을 보면 헛구역질이 나곤 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찾아간 병원. 그녀는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1473년 작품.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회임 소식을 알리는 장면을 묘사했다.
“임신입니다.” 남자 손 한번 안잡아 본 그녀가 임신이라니. 성모 마리아의 재림도 아니고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입니까.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늘의 뜻인 것인지 그녀의 마음은 복잡해져만 갑니다.

‘처녀의 임신’은 하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3개월 전 건강검진에서 의사의 실수로 인공수정이 되었던 것이었지요. 넷플릭스 드라마 ‘제인 더 버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임신이라고요?” 혼전순결주의자의 임신 이야기를 다룬 미드 ‘제인 더 버진’ 포스터. <사진 출처=IMDB>
처녀가 남성과의 잠자리 없이 아이를 낳는 것. 드라마나 혹은 성경에만 나오는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종의 경계를 넘어 동물의 세계로 넘어가면 ‘꿈같은 이야기’만은 아니게 됩니다. 이성과의 교미 없이도 홀로 새끼를 낳는 동물들이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지요. ‘처녀 생식’(Virgin Birth)입니다.
혼자서도 잘해요, 근데 출산까지도?
“제가 어떻게 새끼를 낳는지는 비밀입니다만?” ‘처녀생식’을 하는 코모도 도마뱀. <저작권자=Mark Dumont>
위에 보이는 녀석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도마뱀 중 하나인 코모도입니다. 길이가 최대 3m에 달할 만큼 거대하지요. 녀석들의 존재감은 비단 크기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었습니다. 2005년 과학계를 놀라게 한 주인공이어서입니다.

2005년 연말 런던의 한 동물원에서였습니다. 코모도 도마뱀 암컷 한 녀석은 2년째 독수공방 중이었지요. 근데 어느 날 불쑥 알을 낳았습니다. 인간에 빗대면, 굳센 마음으로 처녀성을 지키던 여성이 임신한 것과 같았지요. 코모도 암컷을 수컷과 몰래 합방시킨 것도 아니었고, 괴짜 과학자가 짓궂은 마음으로 인공수정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키우시니...” 영국 체스터 동물원에서 처녀생식으로 태어난 수컷 코모도 도마뱀. 이 종의 처녀생식으로는 이론적으로 수컷만 태어날 수 있다. <저작권자=NELL>
처음에 학계에서는 코모도 도마뱀 암컷이 2년 전, 그러니까 독수공방 전에 한 관계에서 알을 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정자 보관 능력이 월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지요.

일 년 후 영국 체스터 동물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홀로 사는 코모도 도마뱀 암컷이 알 11개를 낳은 것이었지요. 학계는 다시 흥분에 빠집니다. 부화한 새끼들의 유전자 검사를 단행했습니다. 검사 결과 코모도 도마뱀 암컷의 유전자와 새끼의 유전자는 99.9% 일치합니다. 수컷과 교미 없이 알을 낳았다는 의미입니다. 그야말로 처녀생식이 현실로 일어났던 것이었지요.

악어도, 상어도...80종의 척추동물이 ‘처녀생식’
최근에는 코스타리카의 한 동물원에서도 16년간 홀로 산 암컷 미국악어가 여러 개의 알을 낳았습니다. 수정되지 않은 난자에서 배아가 발달하는 단성생식이 악어에서 발견된 건 처음있는 사례였습니다.
“교미는 싫은데, 아이는 낳고 싶어.” 미국악어 사진. <저작권자=postdlf>
그동안 과학계에서 단성생식은 단세포나, 무척추동물에게만 가능한 걸로 여겨져 왔습니다. 실제로 벌, 딱정벌레, 물벼룩, 말미잘 등 여러 무척추동물들에게서 ‘처녀생식’이 확인됐었지요. 하지만 DNA 분석기술의 발달로 척추동물들도 홀로 번식하는 사례가 발견됩니다. 코모도 도마뱀을 비롯해 약 80종이나 될 정도입니다. 2017년에는 얼룩말상어의 처녀 생식을 발견했지요.

이들이 처녀생식을 하는 배경에 대해서 완벽한 과학적 설명은 불가합니다. 다만, 일부 가설은 있습니다. 암컷이 생물학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단성생식(Parthenogenesis)을 한다는 설명입니다. 짝을 만날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생존 환경이 좋지 않으니 혼자서라도 새끼를 낳게끔 설계됐다는 것이지요.

바닷속 생명체인 얼룩말상어도 처녀 생식이 확인된 종이다. <저작권자=Sigmund>
처녀생식을 하는 채찍꼬리도마뱀도 교미없이 새끼를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태계가 심하게 파괴되는 지역에서 살게 될 때입니다. 인간에 의해 생태계 교란이 일어난 지역이 이들의 주 터전이지요.

미국 하와이처럼 생태계가 교란된 지역(인간에겐 천국으로 통하지만)의 도마뱀들도 유성생식(교미)을 하다가 처녀생식으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학자들은 전합니다. 먹을 것도, 짝도 찾을 수 없는 환경에서 선택한 ‘고육지책’인 셈이지요. 그만큼 종족번식을 향한 열망은 강력하다는 방증입니다.

“너희가 생태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처녀생식을 하는겨.” 채찍꼬리 도마뱀도 무성생식의 대표 종이다. <저작권자=Alistair J. Cullum>
‘자웅동체’로 유명한 지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놈들은 짝을 만나 유성생식을 하는 반면, 또 어떤 놈들은 나 홀로 처녀생식을 하지요. 차이는 환경입니다. 짝짓기하는 놈들은 깊고 안정된 토양에서 거주합니다. 처녀생식을 하는 놈들은 썩은 나무로 가득한 토양 상층부에 살지요. 성장이나 번식이 어려운 지역입니다.
혼자서 낳지만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처녀생식’의 이점은 간편하게 많은 개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같은 개체끼리 모이면서 살게 되는 이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다 말미잘이 이를 증명합니다.

바다 말미잘은 북미 태평양 연안에 서식합니다. 남쪽에 사는 놈들은 암수가 구분돼 유성생식으로 번식합니다. 북쪽 연안에 사는 놈들은 처녀생식으로 살아가지요. 북쪽에 군락을 이루는 바다말미잘은 유전적으로 모두 같습니다. 개체 간 이기심이나 속임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지요. 유성생식에 의해 발생한 개체들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한에서만 협력하는 것과는 명확히 다릅니다.

1904년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그린 말미잘.
바다말미잘은 무성생식으로 번식한 바위에는 다른 조개류나 해초, 벌레들이 서식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다른 개체들을 공격하기 때문이지요. 유전적으로 같기 때문에 개체의 이익이 집단의 이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단성생식의 단점은 명확합니다. 홀로 새끼를 낳을 경우에는 정확히 어미와 똑같은 새끼가 나옵니다. 유전자가 다양하지 않으면 환경 변화에 적응을 못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작은 환경 변화에도 모든 개체가 몰살당할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2004년 작고한 유전학의 대가 메이너드 스미스는 “처녀생식을 하는 종은 유성생식 종보다 멸종 비율이 훨씬 높았다”고 얘기합니다. 생존에 좋은 환경이 아닐 때, 짝을 찾는 행위를 포기한다는 것. 어쩐지 남의 집 이야기 같지만은 않습니다.

프랑스 화가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의 장미의 성모. 1903년 작품.
<세줄요약>

ㅇ도마뱀, 상어 등 약 80종의 척추동물이 ‘교미’ 없이 번식하는 ‘처녀생식’(Virgin Birth)을 한다.

ㅇ짝을 만날 수 없거나, 생존에 좋지 않은 환경일 때 무성생식을 하는 것이다.

ㅇ남의 집, 아니 남의 ‘종’ 이야기 같지 않다.

<참고 문헌>

ㅇ애드리언 포사이스, 성의 자연사, 양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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