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와인’ 전설이 오타에서 시작됐다고요?…맛은 찐입니다 [전형민의 와인프릭]
미국과 이란 사이 최근 타결한 수감자 맞교환 협상에 한국과 이란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돕니다. 우리나라에 묶인 이란 정부의 자산 약 70억 달러(약 9조 3240억원)의 동결 해제가 포함되면서인데요.
이는 이란산 원유 수입 대금으로 지난 2019년 5월 당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對)이란 제재로 국내 은행 등에 묶여 있던 자금이죠. 동결이라는 큰 걸림돌이 제거된 만큼 우리 기업이 이란 기업이나 바이어 등에게 떼인 돈 역시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이란에 대한 국제뉴스를 접하니 이란의 고도(古都)와 얽힌 와인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이란은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이슬람 국가인데, 술과 관련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으실텐데요.
알고보면 1979년 이슬람 혁명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곳에서 와이너리가 성업했던 중동 최대의 와인 생산국이었고, 북부 자그로스 산맥에서 조지아 다음으로 오래된 7000년 전 와인을 양조한 유적이 발견되는 등 역사적으로도 전통의 와인 생산국가였습니다.
이런 영향 때문일까요? 이란의 수천년된 도시 중 한 곳의 이름이 오늘날 인기 포도 품종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바로 이 품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시라·쉬라즈(Syrah·Shiraz)입니다.
와인을 공부하다보면, 같은 품종을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에서 프리미티보(Primitivo), 미국에서 진판델(Zinfandel)이라고 불리는 품종입니다. 두 포도는 같은 품종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어 각자 지역에서 자기들이 부르던 대로 계속 불리고 있죠. 프랑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Pinot Noir) 역시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네로(Pinot Nero)로 불립니다.
포도 품종이 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인류의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가 워낙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동일한 품종이 타지로 흘러들어갔더라도, 그 지역의 기후나 토질 등 떼루아(Terroir)에 맞춰 각자의 특성이 발휘되다보니 같은 품종으로 보지 않은 것이죠.
그나마 유전자 비교가 가능해진 현대에서야 품종별 유전자 조사하면서 같은 종이었다는 게 밝혀지곤 하는 것 입니다.
다큐는 이란의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14세기의 시인 하페즈(Hafez·1324~1389)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10~14세기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 문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가 술이었는데요. 특히 오랜 포도주 문화를 간직하고 있던 천년고도 쉬라즈의 시인, 하페즈는 동양의 이태백에 버금갈 정도로 술을 사랑했고 당시 와인들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다양한 작품에서 와인을 ‘신의 이슬’이라던가 ‘불타는 루비’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는데요. 그가 남긴 와인의 강이라는 시에는 당시 그가 마셨을 와인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봐도 아름다운 문장인데요. 와인 애호가들이라면 사향 내음 진한 검붉은 포도주에서 눈이 반짝 빛날 겁니다. 당시 양조해 먹던 와인의 포도가 어떤 품종이었을지 짐작케 하는 문구니까요.
특히 ‘사향 내음’과 ‘검붉은 색’에서 하페즈가 살았던 도시이자, 그의 영묘(靈廟·Mausoleum)가 건설된 도시와 같은 이름의 포도 품종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바로 쉬라즈 입니다.
유럽에 시라(Syrah)라는 품종이 알려지고 본격적으로 양조에 사용된 것은 13세기 무렵입니다.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1209년께 가스파드 드 스테림베르그(Gaspard de Sterimberg)라는 기사가 페르시아의 포도를 프랑스 남부 론 지방에 전파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요.
유전자 검사 결과 남프랑스에서 재배돼온 시라는 페르시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토착 자생 품종임이 밝혀집니다.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든, 페르시아의 포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쉬라즈라는 철자까지 같은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호주로 시라를 옮겨 심은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제임스 버스비(James Busby·1801년 2월10일~1871년 7월31일) 때문입니다.
그는 옮겨심은 시라를 최초 시라스(Scyras)로 잘못 기재했는데요.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가스파드 드 스테림베르그의 전설을 기억해내곤 시라와 발음이 비슷한 이란의 고도, 쉬라즈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이렇게 쉬라즈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호주 쉬라즈의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느끼기 힘든 블랙체리, 블랙베리, 검은 자두, 검은 올리브 등 검은 과실의 풍미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뒤이어 유칼립투스나 민트 같은 화한 느낌이 동반되고요.
프랑스 론 지방은 시라를 샤또네프 뒤 파프(CDP)처럼 주로 블렌딩해 양조하죠. 꼬뜨 로띠(Cote-Rotie)나 에르미타쥬(Hermitage), 생 조세프(Saint Joseph)에서 시라만으로도 만드는 와인은 검은 과실 풍미에 후추와 감초, 허브류의 향이 멋스럽게 덧입혀집니다.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볼륨감이 있어서 장기숙성 잠재력이 뛰어난 편이고, 향신료와 허브류 풍미가 어우러져서 향긋한 복합미가 잘 느껴집니다. 구운 양고기나 훈연한 붉은 고기류에 두루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와인입니다.
처음의 국제뉴스로 돌아가서, 이번 동결 자금 해제로 우리나라와 이란 간 관계가 빠르게 정상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특히 이란에서 인기가 높은 한국산 가전과 자동차·철강·조선업계는 기대감이 높다고 하는데요.
어쩌면 우리에게 와닿을 가장 큰 변화는 이란의 값싼 원유 수입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재개만 된다면 최근 다시 불안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유가 안정에도 큰 힘이 될테니까요. 이란의 입장에서도 경제강국인 우리나라로의 안정적인 원유 판로 확보는 자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한국과 이란, 두 나라가 서로의 심장 관상동맥 한 줄기에 테헤란과 서울이라는 상대방 수도의 이름을 아로새긴 사이인만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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