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주의 결합한 정교회… 전쟁 키우거나 중재 ‘양날의 검’ [뉴스 인사이드-우크라 오데사 ‘축일성당’ 폭격한 러]

서필웅 2023. 8. 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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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최소 17세기부터 종교적 동질감
돈바스 분쟁 등 정치적 갈등에 갈라져
일부 학자, 양국 충돌 ‘21C 첫 종교전쟁’
사회·문화적으로 압도적 영향력 행사
전쟁 양상 감정적 폭발시킬 가능성도
러·우크라, 정교회 ‘한 틀’… 평화 기대도
지난달 23일 러시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축일성당을 공습해 폭파한 사건은 전 세계인의 공분을 샀다. 놀라움도 컸다. 1억명이 넘는 정교회 신자가 있는 러시아가 정교회 성당을 주저 없이 폭격한 탓이다. 게다가 이곳은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에 의해 2010년 축성까지 받은 장소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축일성당이 지난 7월 러시아의 폭격을 받아 무너진 모습. 오데사=AP연합뉴스
그러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종교적으로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놀라움은 다소 사라진다. 최소 17세기부터 종교적으로는 동질감을 유지했던 두 나라는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지역 분쟁 등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며 갈라졌고, 2019년 러시아 정교회에 소속돼 있던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바르톨로메오스 1세 세계 총대주교로부터 독립된 지위를 인정받아 제도적으로도 ‘남남’이 됐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종교 시설을 공격할 정도로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에 따라 종교라는 틀로 양국 간 충돌을 바라본 일부 학자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을 ‘21세기 최초의 종교전쟁’이라고 표현하며 종교가 전쟁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경계하기도 했다.

◆정교회 영향력 절대적

종교가 전쟁으로 촉발된 갈등을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큰 것은 정교회가 두 국가에서 압도적인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이전인 2015년 미국 싱크탱크인 퓨리서치센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의 정교회 신자 비중은 전체 인구의 71%에 달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보다 더 높아 인구 중 정교회 신자 비중이 78%에 이른다. 여타 종교가 최대 10% 비중을 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신자 수에서도 양국은 러시아 약 1억명, 우크라이나 약 3500만명으로 약 2억6000만명으로 추정되는 전 세계 정교회 신자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정교회 신자수가 가장 많고,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정교회와는 결이 다른 에티오피아 정교회에 이은 3위다.
주목할 부분은 양국 정교회의 성장이 불과 20여년 만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의 영향이 남아있던 1990년대만 해도 양국에서 자신이 정교회 신자라고 응답한 비율이 러시아 37%, 우크라이나 39%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5년에는 두 국가 모두 신자 비중이 70%를 넘어섰다. 사회 전반에서 종교의 영향력도 한층 짙어졌다. 가톨릭, 개신교 등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서유럽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이들 지역 정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국가주의와 결합해 이루어졌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심리적 공백을 국가가 종교를 통해 메웠고, 이를 통해 이 지역 종교가 국가주의적 성향을 짙게 띠게 된 것. 사회주의가 득세했던 동유럽 대부분 국가들이 비슷한 성향을 보이고, 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권 이후 정교회를 자신의 주요 통치기반으로 삼았고 우크라이나와 갈등에도 종교적 요소를 깊게 개입시켰다. 크리스틴 마그벨라시빌리 조지아 일리아주립대 교수는 이탈리아 싱크탱크인 ISPI에 기고한 글을 통해 “정교회는 이미 전쟁 이전부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지역 정치 담론의 일부였으며 이제는 러시아의 외교 정책 및 안보 전략의 일부가 됐다”면서 “러시아의 국가적 정통성과 전통적·정신적 가치를 수호한다는 명분 속 러시아의 세계관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자신들을 희생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쟁 양상 감정적 격화 우려도

우크라이나도 이런 러시아에 대한 반작용으로 종교의 국가주의적 성향이 한층 짙어지는 중이다.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독립 조직으로 인정받은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내에 남아있던 모스크바 총교구 산하 교회에 대한 청산도 본격화하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 독립 우크라이나 정교회 인사들은 모스크바 총교구 소속 고위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영향력을 ‘러시아의 복합전쟁 무기’로 활용해왔다고 비난해 왔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에 부응해 이들 교회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주력해왔다. 전쟁이 발발한 지난해 2월 이후 기소된 모스크바 총교구 사제들은 61명에 이르고, 이들 중 7명은 친러 선전 혐의와 우크라이나 군정보 염탐 혐의가 적용됐다.
러시아 정교회를 이끄는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오른쪽)가 2017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거리에서 긴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기존 1월7일로 기념해왔던 예수의 탄생일을 서구와 같은 12월25일로 옮겨 기념하는 등 러시아와 종교적 분리도 가속화하는 중이다. 돈바스 등 지역의 분쟁을 연구하는 독립연구자인 콘스탄틴 스코르킨은 지난 4월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이 펴내는 ‘카네기 폴리티카’에 게재한 기고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이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돌아갈 수 없다. 전시 우크라이나 정부는 성직자들이 종교 내부 분쟁을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없다”면서 향후 국가주의적 색채가 짙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희망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교회 모두 정교회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과거 이슬람과 유대교의 갈등 등 전쟁 관련 비극 때마다 등장했던 종교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런 기대감 속에서 지난 6월 측근이자 차기 교황 후보인 테오 주피 추기경을 평화 특사로 파견하기도 했다. 결국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정교회 내부에서 이견 조율만 이루어진다면 양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종교가 평화로 향하는 길을 닦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국가주의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면 오히려 전쟁 양상을 감정적으로 폭발시키는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마그벨라시빌리 교수는 “종교 담론이 미디어 등 공적 공간에서 점점 더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종교가 통합이 아닌 배제에 이용될 위험이 있다. 특히 정치 체제가 민주적이지 않고 권위주의적일 때 위험은 더욱 크다”며 분쟁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계했다.

서필웅 기자 seose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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