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자 변제, 진정한 해법?…일본 전문가에게 듣다
지난 15일과 16일, 법원이 정부의 강제동원 배상금 ‘제3자 변제’에 제동을 걸었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됐습니다.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법원에 배상금을 공탁하겠다고 신청했지만 담당 공무원이 이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고, 이에 정부가 이의 신청을 했지만 판사가 기각한 겁니다.
정부는 법원의 기각 결정에 대해 항고하겠다는 입장이라, 사건은 2심으로 올라가 다시 심리되고 최종적으로는 대법원 판단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번 법원 결정과 달리 정부의 공탁이 적법하다는 시각도 있어서, 결과는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KBS 9층시사국이 입수한 외교부 문건을 보면, 외교부는 이미 10년 전인 2013년부터 피해자 동의 없는 변제 공탁을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방송 다시보기: [9층시사국 2023.8.13.] 강제동원 외교 막후, 비밀 문서를 열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47377 )
하지만 만일 대법원까지 가서 이번 기각 결정이 확정되면, 정부의 제3자 변제는 형식적으로도 강제동원 배상 판결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게 됩니다.
현재까지 배상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 15명 중 정부의 제3자 변제 해법을 거부하고 있는 피해자 4명은, 법적으로 배상금을 받지 못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 해법의 성패가 아직 불투명한 상황에서, KBS 9층시사국은 일본의 외교·한일관계 전문가 2명에게 한국 정부의 해법과 향후 과제, 한일관계에 대한 생각을 물었습니다.
방송에 모두 담지 못한 인터뷰 내용 중에서, 좀 더 깊은 이아기를 기사로 정리했습니다.
■ 제3자 변제: “용기와 지혜 담겨”·“방향성 틀리지 않아”
먼저 한국 정부가 3월 6일 발표한 강제동원 배상 판결 관련 해법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에서 조약국장과 주네덜란드 대사 등을 역임한 도고 가즈히코(東郷和彦) 시즈오카 현립 대학 글로벌 지역센터 객원 교수는 단번에 “이 해법은 정말 훌륭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강제집행 절차가 진행돼 일본 피고 기업들의 한국 내 자산이 매각되는 일이 벌어졌다면 “가만히 있어도 어려운 한일의 역사 문제, 36년 일제 통치를 둘러싼 문제는 또 하나의 큰 구멍이 뻥 뚫릴 것”이라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한 한국 정부의 해법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 해법은 정말 훌륭합니다. 용기와 지혜가 있는 제안으로,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발표한 해법의 핵심은 이른바 제3자 변제, 지불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일본 피고인 두 기업이 아니라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라는 곳에서 소송을 제기한 14명에게 돈을 지불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단에 누가 돈을 낼 것인가에 대해서, 예를 들어 포스코라는 기업은 말씀드릴 필요도 없는데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에 의하여 (한국 정부는) 청구권 자금 5억 달러의 24%에 해당하는 1억2천만 달러를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소에 지불했습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서 상당히 큰 이익을 본 기업이므로 그 기업이 돈을 내는 것이 하나의 합리적인 방법이므로, 그런 매커니즘에 따라 한국 측의 주도 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윤 대통령의 해법이 나오기 전까지 저는 정말 (이런 방법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접근법을 생각해내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에 깊이 존경을 표합니다.” (도고 가즈히코 교수)
한국 정치·외교를 연구해 온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 역시, “방향성은 틀리지 않았다”며 한국 정부의 해법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이 해결안에 대해 한국 사람들이 과연 납득할 것인지는 의문”이었다며 한국 정부가 국내 여론을 설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강제동원 배상 판결의 바람직한 해법에 대해서) 저는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 일관되게 말했고 생각이 그다지 바뀌지 않았어요.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약속, 즉 한일청구권협정과 한국의 사법 판단, 이 두 가지를 양립시킬 수 있는 어떠한 해결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거죠. 그 해결안을 일본 정부, 그리고 한국 사법부나 한국 사회에 제시해서 제대로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늘 말해왔어요.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3월에 발표한 윤석열 정권의 해결 방안은 그러한 조건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하고 있어요. 일단, 일본 정부는 그 해결 방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어요. 한 가지는 해결되었어요. 한국 사회에서 납득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윤 정권이 해결하려는 방향성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문제는 한국 사회를 설득할 수 있을지가 중요한 부분이에요.” (기미야 다다시 교수)
■ 일본의 호응-①기시다 총리 발언: “올바른 역사 인식”·“한일 여론 모두 고려”
한국 정부는 제3자 변제 해법을 발표하면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기대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호응의 핵심은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포괄적인 사과, 그리고 한일 재계가 함께 만드는 이른바 ‘미래 기금’이나 제3자 변제에 나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대한 피고 기업의 자발적인 기여라고 밝혔습니다.
한국 측의 해법 발표 후,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입장 표명에 대해 두 전문가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물었습니다.
도고 가즈히코 교수는 3월 해법 발표 직후 한일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98년 한일공동선언을 포함해서 역사문제에 대해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고 말한 점을 지적하며, 이 발언에 기시다 총리의 생각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정말 유감스러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5월 한국을 찾은 기시다 총리가 강제동원 문제를 두고 한 말은 분명 달랐다고 평가했습니다.
“‘제 자신은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신 것에 대해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기시다 총리의 이 말을 듣고) 저는 정말 솔직히 말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이 말을 기다렸습니다.
내용을 보면,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많은 분들이 매우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신 것’. 이것은 기시다 총리의 역사 인식입니다다. 이 역사 인식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사 인식을 기시다 총리가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는, 점점 악화되고 있는 한일관계 속에서 확실히 발표했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중요합니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는 여러 가지 연구가 추진되고 있는데, 한국 또는 일본 내에서 일제 통치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양쪽에서 다양한 시각들(variation)이 나타났습니다. 그것 자체는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일부 일본인 중에는 일제 통치 36년은 정말 훌륭한 시대였다고, 그래서 일본이 반성해야 할 점이나 일본인으로서 한국 사람들에 대한 배려나 공감(empathy)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는 의견까지 나왔습니다. 이건 정말 너무 나갔다는(too much) 생각이 듭니다. (중략)
이번에 기시다 총리의 의견은 그 부분을 딱 잘라버린 겁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일본 국민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도고 가즈히코 교수)
당시 기시다 총리는 해당 발언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것이냐는 취지의 한국 기자 질문에 확답을 피한 채 “그 당시 굉장히 힘들었던 분들에 대한 저의 개인적 생각을 말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한국에서는 기시다 총리의 발언은 결국 개인적 생각임을 전제로 한 데다 그 메시지도 불분명하다며, 일본 정부의 사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기미야 다다시 교수 역시 기시다 총리가 처한 정치적 환경을 고려하면, 해당 발언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정부에 대한 일본 여론은 굉장히 엄격해졌어요. (중략) 한국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역사 문제를 가지고 일본을 비판만 한다, 그런 식의 여론이 있어요. 그런 여론을 배경으로, 기시다 총리는 우익의 지지 기반이 그다지 강한 정권은 아니에요. 최근 일본 우익은 기시다 정권을 여러 가지 형태로 비판하기 시작해서 지지율이 떨어졌어요. 그렇게 되면 기시다 총리로서도 자신의 신념 문제, 그리고 아베 전 총리를 상당히 지지해온 일본 우익들을 생각했을 경우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그것도 한국 여론을 만족시키는 것과 일본 여론의 반발을 어느 정도 최소화하는 것을 양립시키는 방법을 생각한 결과 그런 발언을 미리 생각해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물론 한국의 여론이 요구하는 100% 수준에 답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수준에 100% 답하는 말을 해버리면 일본 국내여론은 ‘뭐냐? 기시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에 대해 겁쟁이가 아닌가?’라는 그런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 부분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다, 양립시킨 측면이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기미야 다다시 교수)
■ 일본의 호응-②피고 기업의 자발적 기여: “변제 재원에 기여하긴 어려울 것”
그렇다면 ‘성의 있는 호응’의 또 다른 측면인 피고 기업의 자발적인 기여는 어떨까요.
도고 교수는 “ 일본 기업은 본래 이 문제(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서 “일본 정부가 이렇게까지 입장을 바꾼 이상, 기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이어 “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 관계자는 ‘일본 기업도 기시다 총리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분들이 알 수 있도록 뭔가를 하길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기미야 교수는 피고 기업이 제3자 변제에 나선 한국의 재단에 자금을 기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전망했습니다.
“저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재원에) 일본 기업이 참여하면 순탄하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국내 여론 문제도 있고, 일본 경영자 자신이 그런 결단을 내리기가 상당히 어려울 거예요. 한국처럼 오너 경영이라면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아시다시피 일본 경영자는 월급쟁이 사장이에요. 더욱이 일본 국내의 강경파 우익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고,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주주 소송’까지 일으키겠다고 일종의 협박도 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일본 기업으로서도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그 재단과는 별개로 미래재단을 만들어서 참여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거예요. 실제로 그 재단에 일본 기업에 출자를 하면 결국 판결대로 되는 것이다, 판결을 이행한 것이 된다는 의견도 있어요.” (기미야 다다시 교수)
실제로 KBS 9층시사국이 지난달 ‘향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여할 의사가 있냐’고 서면 질의를 보낸 결과, 미쓰비시는 “한국 내 절차인 걸로 알고 있다”며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고, 일본제철은 “강제동원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외교부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대한 피고 기업의 기여가 단기간 안에 있을 것으로는 예상하지 않는다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다만 문이 열려 있고 일본 정부도 민간 기업의 기부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힌 만큼, 한일관계가 진전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기대를 갖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 나가며: 여전히 남은 역사의 문제
강제동원 문제와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관통하는 핵심은 결국 ‘식민 지배의 불법성’입니다.
기미야 교수는 제3자 변제의 성패와 별개로, 한일 간에 강제동원을 포함한 과거사 문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한 역사는 인정하고, 이에 대해 잘못했다고 명확히 말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일본 내에서는 이로써 역사 문제는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역사 문제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저는 생각해요. 한국에 당사자가 아직 살아계시지만, 모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한일 간의 역사 문제는 남을 거예요.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이익과 자신들의 안전 보장을 위해서 한반도를 침략하고 지배한 역사가 엄연히 존재해요. 물론 일본 내에서 다양한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저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자신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나라를 지배한 역사는 확실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그런 일은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하고,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확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기미야 다다시 교수)
도고 교수 역시 “일어난 일을 전부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인으로서 일제 통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본인으로서 일제 통치 36년 문제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식민 통치 또는 한국 병합을 해버린 일본은 가해자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한국 사람들은 피해자입니다. 이 구도를 일본인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걸 바탕으로 일본, 일본인으로서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역사가 다양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무엇을 유지해야만 하는가 하면, 일본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말을 하자면, 한국인은 잊어버리더라도 일본인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제 통치 문제를 생각할 때 ‘미래 지향’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일본인은 미래 지향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미래 지향이라는 말을 한다면, 그건 한국 사람들이 할 말입니다. 일본이 할 말은 아닙니다. 일본이 해야 할 말은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침표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한국 사람들이 “알겠다. 그렇다면 미래 지향적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균형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성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잘 되었습니다. 오부치 총리가 사과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김대중 대통령이 사과를 받아주고 그렇다면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오부치 총리가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미래 지향적으로 나아가자고 말을 했다면 그 공동성명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제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도고 가즈히코 교수)
지난 3월 박진 외교부 장관은 제3자 변제를 해법으로 발표하며 "이번 해법은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닌 진정한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제3자 변제 해법을 내놓은 것만으로 정부의 역할이 끝난 건 아니라는 겁니다. 현 정부가 강조하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의 권리를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여전히 큽니다.
강제동원 문제는 단순한 법적 배상만이 아닌 충분한 역사적 사실 조사, 사실 인정, 철저한 반성과 재발 방지 대책 등을 필요로 하는 지난한 문제인 만큼, 진전된 한일관계를 기초로 한 정부의 다음 걸음을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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