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공화국 떠오르게 하는 한국의 정치적 내란 상태 [쓴소리 곧은소리]
여야 과반 의석 막을 수 있다면 최악의 진영정치 벗어날 수도
(시사저널=이상돈 전 국회의원·중앙대 명예교수)
민주국가에선 선거에서 승리한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정책을 추구해 나간다. 새 정권은 전 정권 시절의 정책을 검토해 고칠 것은 고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이 민주적 정부가 굴러가는 상식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근래에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진영논리를 앞세운 두 세력이 다투는 정치적 내란 상태에 빠져 있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후보들이 내세웠던 '국민통합'이라는 단어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대통합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촛불민심을 받드는 국민통합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전 정권 사람을 상대로 한 적폐청산과 진영정치에 몰두했다. 2022년 대선 때도 윤석열·이재명 두 후보는 국민통합을 이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귀담아듣는 국민은 없었다. 지난 대선은 덜 혐오하는 후보를 찍어야 했던 치욕적인 선거였다.
문재인 정권에 이어 윤석열 정권도 전 정권이 만든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전 정권 사람들을 수사 대상으로 세워놓고 있다. 새 정권에 의한 '지난 정권 지우기'를 비난할 수만도 없다. 지난 정권이 저지른 일 중에는 전면적 재검토를 필요로 하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차원을 넘어 정치보복으로밖에 볼 수 없는 조치들이다.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일단 기소해 정치적으로 매장하려는 작태가 그런 경우다.
집권 세력은 또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정권을 재창출하려고 한다. 혹시 정권을 내주더라도 굳건하게 버틸 수 있게 인적·물적 자원을 무리하게 구축해 놓는다. 충성도가 높은 강경한 인물을 여기저기 심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 전 대통령이 임기 만료 직전에 서명해 법률로 만든 '검수완박법'은 그 같은 무리수의 극치였다.
여야 지도부, 강경 세력에 장악당해
우리 정치가 이렇게 된 데는 두 정당이 모두 강경파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 정당에도 유연한 성향을 띤 비주류가 있었으나 2017년 대선과 2020년 총선을 거치면서 이들은 절멸돼 버렸다. 그 결과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인사들이 내각과 청와대(대통령실)에 자리 잡고 정치 낭인(浪人)들이 산하기관장 자리를 꿰차는 경우가 흔해졌다.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합의제 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그리고 방송문화진흥회는 양당이 임명한 강경한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어 회의를 하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새만금 잼버리는 물론이고 이전 정권에서 있었던 4대강 사업과 탈원전 정책을 두고 벌이는 논쟁은 진영정치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새만금 잼버리는 새만금 매립을 결정한 시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정권에 걸쳐 잘못된 결정을 거듭하며 그 지경에 이른 것이지만, 양당은 모든 것은 상대방 잘못이라면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4대강 사업과 탈원전이 잘못된 정책임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데, 이에 대해 책임이 있는 정당이 완곡하게나마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사안이 무엇이든 오로지 상대방을 비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양당이 하고 있는 정치 게임이다.
진영정치에서 진실은 중요치 않기에 진영의 기반인 강경파의 입맛에 맞는 저질적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미디어와 사회관계망이 이런 추세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진영을 대표한다는 패널들이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라디오와 TV 프로그램은 모든 이슈를 정략적으로 해석해 전파하고 있다. 방송은 이 같은 궤변을 기계적 균형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하에 하루 종일 내보내고 있다. 균형 보도 원칙을 저해할까봐 진실 보도를 꺼리는 게 오늘날 우리의 방송이다. 진실 탐사를 포기한 언론은 관심을 끌기 위해 황당한 주장을 해대는 인물들의 발언으로 지면을 메우고 클릭 수를 올리고 있다.
이 같은 난장판 정치 때문에 온건하고 합리적인 정치 세력은 설 땅을 잃어버렸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진영 간 극한 대립은 1930년대 초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새 헌법에 근거해 비례대표제에 입각한 이원적 정부제를 도입했으나, 이로 인해 많은 정당이 의회에 진출해 내각은 불안한 연정에 의존해야만 했다. 사민당 등 온건한 정당에 대한 지지는 줄어들고 공산당이 세력을 늘려가더니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치당이 급속하게 부상했다. 공산당과 나치당은 선전과 폭력을 동원해 서로 경쟁하더니 결국은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제3당이나 새로운 세력에 기대 걸 수밖에
바이마르공화국에선 공산당과 나치당이 각기 민병대를 동원해 사회 불안을 조성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사이버 민병대들이 대립과 갈등을 부추겨 온 국민을 심리적 내전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매주 월·수·금 아침에 카메라를 앞에 두고 거친 언어를 토해 내는 각 정당의 최고회의, 그리고 진영을 대표하는 패널들이 말싸움을 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그들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사이버 민병대의 꼭두각시놀음에 불과하다. 정치는 진영논리에 입각한 불량상품을 만들어내고, 미디어는 그것을 팔고, 국민은 그것을 소비하고 있다.
그러면 이 같은 진영정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거나 비례대표 의석을 늘려 다당제 정치를 구현하자는 주장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해법이 되진 못한다. 중대선거구는 선거 자체를 난장판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도입해서는 안 되는 제도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진영정치의 돌격대로 전락해 버린 실상을 감안하면 비례대표 확대 역시 대안이 될 수 없다.
비례성을 강조하는 선거제를 기반으로 의원내각제를 해온 북유럽·이탈리아 등지에서도 과격한 정책을 내건 정당이 우세를 보이기 때문에 다당제는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소선구제에 입각한 양당 정치는 극단적 정치 세력의 부상을 막는다고 생각됐으나 그것도 이제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정치를 오래 해온 영국과 미국에서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같은 극단적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해결은 결국 선거에 임하는 유권자들의 몫이다. 많은 여론조사는 여당과 야당을 모두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 비중이 전에 없이 높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년 총선에선 강경한 노선을 버리고 합리적인 인물을 등용하는 쪽이 유리할 것이지만, 어느 쪽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사정이 그렇다면 제3당이나 새로운 세력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이들이 다만 20석이라도 차지해 여당이나 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지금 같은 최악의 진영정치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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