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려낸 《오펜하이머》, 이토록 모순적인 인간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3. 8. 1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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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발명'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내면 밀도 높게 조명
단순한 개인의 분열이 아닌 정치사회적 분열로 느껴져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역사가 스포일러인 실존 인물 이야기로 3시간 내내 조여오는 긴장감을 선사하는 게 가능할까.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는 그렇다고 답한다.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가 만든 '원자폭탄'은 영화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이고, 많은 나라의 정치적 이해가 얽힌 것이며, 무엇보다 버튼 하나로 인류를 하루아침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발명품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스스로를 파괴할 운명 속으로 뛰어든 지구인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실질적인 공포와 스릴을 안긴다. 

그래서 놀란은 스펙터클을 안겨주는가. '그렇다'에 역시 한 표다. 다만, 당신이 예상한 스펙터클과는 재질이 다를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스펙터클에는 화려한 액션이나 실감 나는 재난이 없다. 그것은 배우의 얼굴에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감정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끝없이 자기 분열하는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3시간 동안 따라간다. 밀도 높고 장엄하고 논쟁적인 동시에 정치적이며 복잡하다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돌이킬 수 없는, 성공 

1945년 7월16일, 미국 뉴멕시코 사막 하늘에 버섯 모양 불기둥이 굉음과 함께 피어올랐다. 오펜하이머가 이끈 인류 최초의 핵무기 실험 '맨해튼 프로젝트' 테스트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것을 예감했을까. 프로젝트의 성공을 바라보며 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읊조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리고 같은 해 8월6일 미 공군 폭격기 B-29 '에놀라 게이'는 포신형 우라늄탄 '리틀 보이'를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다. 14만 명이 사망했다. 3일 후엔 플루토늄탄 '팻맨'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8만여 명이 즉사했다.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지는 순간, 오펜하이머의 인생도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진입한다. 핵폭탄으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안겼지만, 지구가 공멸할 수 있는 위험을 동시에 열었다는 죄책감이 그를 엄습한다. 

자신을 영웅이라고 칭송하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오펜하이머의 심리를 놀란은 흡사 공포영화처럼 그려낸다. 오랜 시간 전력을 다해 만든 원자폭탄이 최고의 기량을 파괴적으로 보여준 날, 가장 극렬한 자기 분열을 겪는 오펜하이머. 과학자와 정치인 사이, 창조자와 파괴자 사이에서 분열하는 오펜하이머는 그러고 보니 선악의 명암이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았던 《다크 나이트》의 브루스 웨인, 배트맨(크리스천 베일 분)과 닮았다. 아니, 혼란을 상징했던 조커(히스 레저 분)에 더 가까울까. 배 두 척에 폭탄을 설치하고 살고 싶다면 서로의 폭탄 스위치를 누르라고 유혹했던 조커를 기억하는가. 여러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지금, 인류는 조커가 세팅한 배 두 척에 몸을 실은 승객과 같다. 

《오펜하이머》는 아이러니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물리학자들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에는 나치 독일이 가공할 무기를 먼저 개발하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목적이었던 적이 스스로 자멸해 버린다면? 게다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승인한 리더가 사라진다면? 실제로 1945년 4월12일 맨해튼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이끌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망했고, 같은 달 30일엔 히틀러가 자살했다. 그리고 5월8일 독일은 패망했다. 목적이 사라진 셈이다. 그러나 나치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원자폭탄은 방향을 틀어 일본으로 향했다. 물리학 300년의 성과가 대량살생무기로 귀결되는 모습을 지켜본 과학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또 하나의 아이러니. 미국의 우려와 달리, 당시 독일은 원자폭탄 개발에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정작 미국에 이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서방 과학자들이 극비리에 이룬 성과를 소련이 어떻게 4년 만에 따라잡을 수 있었을까.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빼돌린 정보 덕분이었다. 푹스의 스파이 행위는 미국이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아이러니를 지닌다. 

미국에서 반역자로 몰린 오펜하이머와 달리, 진짜 반역자였던 푹스가 석방 후 동독으로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았다는 점은 인생의 아이러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핵무기가 인류의 끔찍한 제로섬 게임이 될 것임을 알았던 오펜하이머는,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을 요구하는 정부에 맞섰고 한발 더 나아가 과학 지식을 소련과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빨갱이 색출'이라는 매카시 광풍이 마침 미국 사회 전반을 휩쓸 때였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인물로 낙인찍힌 오펜하이머는 청문회에서 굴욕적인 수모를 겪으며 지위를 잃는다. 

예상하겠지만, 이 모든 과정을 놀란이 일대기 형식으로 그려냈을 리 없다. 놀란이 누구인가. 꿈과, 꿈속의 꿈과, 꿈속의 꿈속의 꿈이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며 관객을 들썩이게 했던 《인셉션》, 밀러 행성에서의 1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이라는 가설을 세워 눈물의 가족 상봉을 끌어낸 《인터스텔라》, 하나의 사건을 세 가지 시공간(해안 1주일, 바다 1일, 하늘 1시간)으로 쪼개고 분해해 전쟁 한복판으로 관객을 후송한 《덩케르크》, 순행하는 시간과 역행하는 시간이 공존했던 《메멘토》와 《테넷》 등 시간을 변주하고 저글링해온 '시간 덕후' 아닌가. 

《오펜하이머》의 경우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 시점을 중심으로, 1954년 오펜하이머의 비공개 청문회, 1959년 원자력위원회 창립 위원 루이스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상무장관 인준 청문회 등 세 개의 타임라인을 교차하며 달린다. 이 중 눈여겨볼 건 흑백으로 처리된 스트라우스 청문회다. 실존 인물을 다룬 전기 영화라는 건 연출이 그의 인생 중 어디를 선택하고, 누구를 부각하느냐의 문제다. 그 선택에 연출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놀란은 정치인 스트라우스를 오펜하이머와 대립되는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과학만 알던 학자가 정부와 과학자 사이를 조율하는 거대 프로젝트의 현실적인 관리자로 바뀌어 가면서 겪었을 법한 고민을 더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오펜하이머》가 단순히 한 과학자의 분열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분열로 다가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놀란의 기존 작품들보다 타임라인이 간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입장벽이 낮은 영화는 아니다. 과학자, 정치인, 군인 등 실존했던 인물들이 쉴 새 없이 등·퇴장하고, 당시의 국제 정세가 대사로 줄기차게 브리핑되는 데다, 눈에 입력해 머리로 즉각 풀어내야 하는 정보값이 상당하고, 과학적 전문용어도 틈틈이 끼어드는 통에 자막 따라가기가 버거울 수 있다. 

주연급으로 활동하는 배우들이 조·단역으로 포진한 까닭에, 《오펜하이머》 캐스팅은 보는 것만으로 포만감을 안긴다. 오펜하이머를 만난 후 "징징거리는 애"라는 평가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 트루먼 대통령을 연기한 게리 올드만은 단 한 장면만으로도 신을 '스틸'하고, 《보헤미안 랩소디》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밀 라믹은 짧게 등·퇴장할 때마다 극의 흐름을 뒤집는다. 오펜하이머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스트라우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살리에르 적'인 연기 또한 기막히다. 탐할 수 없는 재능을 지닌 오펜하이머에게 느끼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열등감을 두툼하게 표현해 낸다. 

그러나 역시 두고두고 이야기될 이는 킬리언 머피다. 아이맥스 카메라에 클로즈업된 킬리언 머피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마다, 우리는 그가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에 함께 물든다. 때론, 침묵 속에서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나는 그 표정에 여러 번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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