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꿈”… 넷플릭스 ‘사이렌’의 정민선[복수자들]
“‘여자 치고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출연자들은 여성경찰, 여성군인, 여성소방관이 아니라 직업군을 대표해서 나온 겁니다.”
올 상반기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을 연출한 이은경PD는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경찰, 소방관, 군인, 스턴트맨, 운동선수, 경호원 등 6개 직업군의 여성들이 각자 직업의 명예를 걸고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입니다. 진흙을 뒤집어쓰고 땀범벅 되고 부상을 입어도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편견을 먹고 사는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지독한 승부를 벌이는 모습에 대리 쾌감을 느꼈다는 시청자의 응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사이렌: 불의 섬> 속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강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센 놈이랑 붙자, 그게 멋있지” “나보다 센 놈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왔다”고선전포고한 용감한 소방관입니다. 짧은 시간에 혼자 장작 30개를 패서 팀을 승리로 이끌고, 불 끄는 경기에선 전문성을 발휘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신속하게 제압했습니다. 경북 상주소방서 소속 정민선 소방사(30)가 그 주인공입니다. 최근 <복수자들>이 만난 그는 지난해 제1호 여성 소방차량 운전요원으로 임명된 소방관이기도 합니다. 소방차 운전은 오랫동안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입니다. 정민선 소방사 인터뷰는 동아일보 유튜브 ‘복수자들’(https://youtu.be/QVFKC264Jxw)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기개 넘치는 선전포고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사이렌> 1화 나오는 날, 소방학교 훈련 중이었어요. 텔레비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는데 훈련 중이라 그럴 수 없었어요. 너무 궁금해서 휴식시간에 근처 카페로 가서 휴대전화로 봤는데 첫 화에서 제가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웃음) ‘내가 저런 말을 했었나’ 하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말만 그런 게 아니라 경기에서 ‘센 놈’ 역할을 톡톡히 하셨습니다. 특히 장작 패기의 달인이 되셨어요. 다른 팀은 나눠서 했는데 정 소방사님 혼자 장작 30개를 팼어요.
“그때 소방팀 리더였던 김현아 언니가 부상을 입으면서 저희팀 분위기가 안 좋았어요. 누구 하나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이 툭 흐를 정도로 암울했어요. 팀별 아레나전을 하러 현장에 도착했는데 운동장에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거예요. 진행자가 ‘의리 게임입니다. 순서를 정하십시오’라고 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 ‘최대한 혼자 해봐야 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순서를 정하는 게 저한테는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책임지고 다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른 팀원들도 있는데 왜 혼자 장작 30개를 다 패야 한다고 생각했나요?
“암울해진 팀 분위기를 다시 띄우고 싶었어요. 저도 언니들도 다시 힘을 내려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잖아요. 소방관들이 매일 겪는 화재, 재난 현장이랑 똑같아요. 팀원이 부상을 입고 뒤처지고 있으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팀워크라고 생각해요. 아마 장작이 2배 더 많았어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체력보다 정신력으로 해내는 거니까요.”
부상 입은 동료를 대신해 한계에 도전하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타인을 해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려는 모습을 보여준 소방팀.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구하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적 특성이 잘 드러났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사이렌>을 통해 소방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습니다.
“저희 4명이 소방관을 대표해서 출연했을 뿐입니다. 현장에 있는 모든 소방관의 평소 모습이에요. 아주 오래 전부터 대한민국 소방관들이 땀으로, 피로 일궈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이렌> 출연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근무 중에 소방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넷플릭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보겠냐고요. 처음엔 방송 출연 엄두가 나지 않아 거절했어요. 근데 일주일 뒤에 또 연락이 와서 죄송한 마음에 제작진 미팅을 하게 됐어요. 대화를 한참 나눈 후에 프로그램 취지에 대해 여쭤봤죠. PD, 작가님들이 정말 오랫동안 <사이렌>의 기획의도를 설명해주셨어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귀담아 들었어요. 제작진 말씀이 끝나자마자 ‘출연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사이렌> 연출을 맡은 이은경PD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포츠 만화의 세 가지 키워드는 우정, 노력, 승리다. 이 키워드들은 가슴을 뛰게 한다. 자기 분야에 진심이고, 조금 모자라도 뛰어들고, 무언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데에 거리낌 없는 이야기 속에서 늘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런데 여성이 주인공인 스포츠 만화가 많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정, 노력, 승리가 담긴 진한 여성 서사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정과 노력, 승리. 소방팀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세 가지 키워드는 유독 빛이 났습니다. 소방팀은 반칙보다 정공법으로 경기에 임하며, 피 튀는 싸움보단 땀 흘리는 경쟁을 택했습니다. 생사를 함께 한 소방팀뿐 아니라 결승전에 오르기까지 ‘원팀’으로 협력했던 운동팀과도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사이렌>촬영이 끝난 후에도 출연자들과 우정을 나누고 계시다고요.
“소방팀 언니들과는 단체카톡방에서 하루 종일 떠들고요. 사이렌에 대한 좋은 기사, 댓글 나오면 꼭 공유해요. 결승전에서 맞붙은 운동팀과는 촬영 끝나고 회식도 했어요. 운동팀 김성연 선수와는 여행도 다녀오기로 했고요.”
―소방팀 리더 김현아 소방장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현아 언니의 말이 소방팀의 방향이었어요. 현아 언니는 힘도 세고 성격도 불같아요. 누구보다 의리 있고 리더로서 희생 정신도 강해요. 언니는 자기가 독재자처럼 굴었다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해왔어요. ‘행복한 독재’ ‘멋있는 독재’였다고요.
그래서 결승전 때 소방팀 리더인 현아 언니가 ‘우리답게 공격하고 멋지게 전사하자’고 이야기했잖아요. 저희 모두 질 거라 예감했지만 마지막이니까 우리다운 것을 하자는 언니 말에 다들 설득됐던 것 같아요. 너무 허망하게 운동팀에 패배하긴 했지만요.(웃음)”
―‘사이렌’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소방관이란 존재를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화재, 재난 현장은 남녀 소방관을 가리지 않아요. 똑같은 압력의 호스를 들고 똑같은 무게의 장비를 차고 요구조자(구조가 필요한 사람)를 구해야 해요. 저희가 성별을 떠나 해야 하는 일을 할 뿐이에요. 현아 언니 인터뷰를 봤는데 이런 말이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항상 증명하고 입증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여자 소방관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시선 끝에 무시, 짜증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선입견을 갖고 보시는 거예요.”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저는 그런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긴 해요. 머리가 짧고 덩치가 크니까 제가 여잔지 남잔지 모르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생 모토 중 하나가 ‘진짜는 모두가 알아본다’는 거예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성장하고 배우려는 거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그냥 웃고 말아요. 날마다 출동해야 하는 사고, 재난 현장이 있는데, 그런 편견들에 속상해할 시간이 없는 거죠.”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은 대피하지만 소방관은 안전한 데 있다가도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일단 출동벨이 울리고 나서부터는 위험하지 않은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뉴스에는 큰 사고, 큰 사건만 나오잖아요. 소방관 고립, 사망 이런 큰 뉴스만 나오죠. 근데 현장에서는 작은 사건, 사고도 정말 많이 일어나요. 예를 들면 저희가 타는 소방차는 되게 높거든요. 착용 장비가 굉장히 무겁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다가 넘어지기도 해요. 공기호흡기 착용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옆에 장애물을 보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방화복이 찢어질 때도 있어요. 화재 현장에서는 불덩이들이 제 머리 위에서 굴러다니고요. 개방된 창문 틈으로 화염이 용암처럼 분출되는 경우도 많고요.”
―화재 현장에서 방화복을 입어도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나요?
“저희가 입는 방화복은 만능이 아닙니다. 순간의 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요. 방화복의 소재가 밖에서 오는 열기, 수분을 막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제 몸에서 나오는 열을 밖으로 나가는 걸 막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화복 안에 있는 열기를 고스란히 다 견뎌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소방관들이 교대로 현장에 진입하는 거예요.”
―화재 현장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 있다면요?
“화재 현장은 농연(濃煙·짙은 연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거든요. ‘중성대’라고 해서 시야 확보가 되는 공간으로 진입, 대피해야 해요. 여기에 놓인 물이 가득 찬 수건을 잡고 이동하는데 그 수건이 소방관들에겐 목숨 줄 같은 거거든요. 이걸 놓치면 정말 무서워요. 소방관도 사람이지 않습니까? 소방관들이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건 두려움과 무서움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원래부터 소방관인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해요.”
―모든 소방관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고 하더라고요. 트라우마가 심했던 사고가 있었나요?
“몇 년 전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어요. 산사태, 낙석 방지 구조물에 들이받았는데 차량 정면, 오른쪽 유리가 다 깨져서 파편이 얼굴로 튀었어요.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뒷목 부분이 되게 뜨거운 거예요.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나오고 있더라고요. 그때의 뜨거운 느낌이 아직도 완전 선명해요. 찢어진 부위에 아홉 바늘 정도 꿰매고 후유증으로 이석증도 생겼어요. 정말 큰 사고였어요.”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사고 났을 때 응급실에서 급한 조치를 받고 붕대를 감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11시 정도 됐더라고요. 타지에서 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고향에 계신 엄마한테 전화를 드렸죠. 사고 났다고 말씀드리니 엄마가 덤덤하게 ‘내일 갈게’ 하시고는 바로 오셨어요. 생각보다 엄마 목소리가 차분해서 괜찮으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엄마가 보고 싶어서 저녁 늦게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엄청 긴장하는 목소리로 받으시는 거예요. 늦은 시간 딸에게 전화가 오니까 저번 사고 때처럼 또 다친 게 아닐까 염려하신 거죠. 그때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선 소방사는 소방관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방송 출연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가 스스로에게 붙인 별칭은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입니다.
―‘동네를 지키는 평범한 소방관’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구조가 간절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특이하게도, 제가 직접 119 신고하는 일이 많았어요. 제 눈앞에서 누가 다치거나 교통사고가 난다거나, 산불이 난다거나…. 한 번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씨가 어떤가 보고 있는데 공사장에서 불이 나는 거예요. 다른 누가 먼저 신고를 할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제가 최초 신고자였어요. 아무도 손대지 않았고,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날것의 현장에 소방관들이 사람들을 구하고 조치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걸 보면서 막연하게 ‘타인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정말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제가 소방관이 된 후부터는 사건, 사고를 목격한 적이 없어요. 이젠 제가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하는 사람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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