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당 이만오천 원 받는 축구 선수였습니다”[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다.
미국 통계사이트 월드아틀라스에 따르면 축구는 35억 명이 넘는 팬을 보유해 2위 크리켓(약 25억 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러니 올해 가장 돈 많이 번 스포츠 스타 순위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 킬리안 음바페가 1~3위인 건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허나 알다시피, 모든 축구선수가 이런 영화를 누리는 건 아니다. 지난해 국내 프로축구리그(K1리그) 선수 평균연봉은 2억8211만 원. 상당한 액수지만, 최저연봉을 보면 8년째 2400만 원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이마저 최고 리그인 K1일 경우다. 유튜브 등에 출연한 아마추어리그(K5, K6, K7) 선수들은 “하루 몇만 원 받는 이들이 많다. 심각하게 생계가 쪼들린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현재 세미프로 K3리그에 있는 김해시청축구단 소속 골키퍼 김승건 선수(24)도 상황은 비슷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해왔지만 사정상 관두고 군대를 다녀온 그는, 다시 시작했을 때 한 구단에서 월 50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월세 35만 원을 내고 나면 남는 건 15만 원. 결국 고깃집이나 인터넷쇼핑에서 일하며 근근이 버텨야 했다. 다행히 실력을 인정받으며 지금은 사정이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기만 하다. 김 선수에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조금은 비켜나 있는 현실 속 축구선수의 삶을 들어봤다.
“1999년생 축구선수 김승건입니다.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는데, 자란 곳은 창원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하신 뒤 할머니 아버지 누나 이렇게 네 명이서 쭉 살았습니다. 이런 얘기 하면 딱하게 보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아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연락도 안 합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정성껏 키워주셨기에 아쉬운 것도 없어요. 누구나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니까요.”
-쿨해서 좋네요. 축구는 창원에서 시작했나요.
“네. 창원초 3학년 때 운동장에서 공차며 노는데, 축구부 코치님이 부르시더라고요. 축구 해 볼 생각 없냐고. 뭐, 그땐 운동신경 좀 있어 보이면 그냥 권유해보는 거 같아요. 덥석 한다고 했죠. 어린 마음에 엄청 유명한 선수가 될 줄 알았죠, 하하. 아버지도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땐 자식 하나 운동시키는데 그렇게 돈이 많이 들 줄 모르셨을 거예요.”
-처음부터 골키퍼를 지원한 겁니까.
“아뇨.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걸요. 필드플레이어로 뛰다가 5학년 때쯤인가 골키퍼 맡고 있던 형이 다치는 바람에 얼떨결에 한 게임 뛰었어요. 근데 꽤 잘한 거예요. 그때부터 코치님이 전향을 권유해서 시작한 거예요. 솔직히 처음엔 반항도 하고 고민도 좀 했어요. 솔직히 골키퍼는 안 멋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안 멋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렇잖아요. 공격수에 비해 그다지 환호도 못 받고, 제일 뒤에 처져 있는 느낌도 들고. 어린 마음에 일단 골 넣고 싶기도 하고요. 약간 창피함 같은 것도 있었어요. 요즘은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저 때만 해도 골키퍼를 축구 잘하는 선수로 생각하질 않았거든요. 또래보다 키가 크고 팔도 긴 편이라 골키퍼에 잘 맞는 체형(현재 신장 189cm)이긴 했지만, 매력 없는 포지션이란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아예 축구를 관둘 생각도 몇 번 했었어요.”
“그게… 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하하. 6학년 때 시합 나가서 무실점 경기를 꽤 했어요. 칭찬을 많이 받으니 자신감도 붙었고요. ‘어, 나 좀 잘 막는데’하고 살짝 우쭐해지는 거죠. 아마 그런 게 지금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어요. 뭐든 자신감이 없으면 결과도 안 좋은 법이잖아요. 제가 잘 할 수 있단 믿음이 생기면서 골키퍼란 포지션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기도 했고요.”
-마산중앙중학교, 경남정보고등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고 들었어요.
“에이, 진짜 잘했으면 지금 엄청 유명한 선수가 됐겠죠. 다만 그런대로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건, 중학교 때 스승님을 잘 만난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이효섭 코치님이란 분인데 골키퍼 출신이시라 기본기부터 제대로 배웠습니다. 그때는 꾸중도 많이 듣고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가르쳐주셨어요. 뭐든 지나고 나면 다 보이는 법이잖아요. 지금도 자주 연락드리고 있어요. 고교 때는 다들 아는 축구협회 소속 청소년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축구연맹에 뽑는 청소년 대표에 뽑혀서 국제경기도 나가긴 했죠.”
-그리 잘했는데 왜 관둘 생각을 여러 차례 했던 건가요.
“뭐 뻔한 얘기라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일단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들이 자주 학교에 찾아와 뒷바라지하질 못하다 보니,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거든요. 어린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또 아시겠지만, 요즘은 나아졌나 모르겠는데 옛날엔 운동부 규율이 엄격했잖아요. 선배들의 얼차려나 구타도 흔했고. 개인적으로는, 없는 살림에 제가 운동을 하니 누나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누나가 청력이 약해 더 보살핌을 받아야 했는데, 그것도 미안했고…. 이래저래 속앓이도 많고 방황했던 시기였어요.”
-그걸 버틸 수 있는 힘은 뭐였습니까.
“제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생겨도 오래 맘에 담아두지 않는 편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겠거니 했죠. 자꾸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 축구 하는 이유가 확실했거든요. 축구가 좋기도 했지만, 고생하신 할머니 아버지한테 효도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어릴 때부터 공을 찼으니 공부 쪽으론 답이 없었죠. 축구 잘하면 돈 많이 버니 성공할 수 있겠다 싶었죠. 게다가 고등학교 때까진 제가 진짜 잘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 희망이 있으니까 다 잘 될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어요.”
“음…, 어렵네요. 굳이 따져보면, 아까 말씀드린 축구연맹 청소년대표 이후였던 거 같아요. 거기서 국제대회 나가서 우승했고 최우수 골키퍼 상도 받았거든요. 주위에서 잘한다고 떠받들어주니까 저도 한껏 고무됐죠. 근데 당시 대표팀에 골키퍼가 4명 있었는데, 나머지 3명은 K1 프로구단에 입단하거나 명문대 축구부로 갔어요. 정말 잘 됐고 축하할 일인데, 저한테는 제대로 된 오퍼가 없는 거예요. 그때 뭔가 이상하고, 억울한 느낌도 많이 받았죠.”
-학연 지연 같은 거에 밀린 건가요.
“모르겠어요. 솔직히 이젠 알고 싶지도 않고요. 생각해봤자 속만 쓰리죠. 다만 그때 어린 마음엔 지방에 있다 보니 사람들 눈에 잘 들어오질 않는 건가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수도권에 있는 곳으로 진학했어요. 실은 지방에 있는 다른 대학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받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땐 일단 서울 쪽으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앞섰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력을 보여주면 기회도 다시 생기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죠.”
-대학은 1년만 다니고 파주시민축구단으로 갔더군요.
“그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어요. 대학 감독님이 연결해주셔서 간 건데, 실은 일본 진출을 위한 포석이었거든요. 국내에선 곧장 프로리그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으니까, 일본에서 선수생활하면 가능성이 더 열린다고 본 거죠. 실제로 한두 팀이 관심을 보여줘서 준비도 착실히 진행했고요. 근데 중간에 뭐가 꼬이는 바람에…. 파주에 갔더니 다들 한참 나이 많은 선배들 중심인 팀이라 저한테 출장 기회가 거의 돌아오질 않았어요. 그렇게 경기를 못 뛰다 보니 일본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질 않더라고요.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셔서 계약 성사 직전까지 갔는데, 결국 무산돼 버렸어요.”
-실망감이 컸겠습니다.
“거대한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어요. 넉넉한 집안 환경이 아닌데도 어렵사리 축구를 해왔는데, 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실패한 기분이랄까. 그대로 파주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도 여전히 경기는 못 뛰고 똑같은 삶이 반복될 거 같고. 이럴 거면 다 관두자 싶었던 거죠. 그때가 딱 스무 살이었는데, 왜 그 나이에는 ‘에이, 군대나 가자’ 이런 생각 많이 하잖아요. 별생각 없이 지원했는데, 덜컥 영장이 나와 버린 거죠. 그렇게 내 축구 인생은 끝나는 거구나 싶었어요.”
“그땐 그런 기대는 하질 않았어요. 갈수록 미래가 불투명하게만 느껴졌거든요. 계속 집에다 손 벌리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고. 스무 살이 넘었으면 제가 가계에 보탬이 돼야 하는데,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었죠. 군대 가서 다른 일을 찾아보자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실제로도 군대에서 재미로 하는 시합에야 몇 번 나갔지만 그게 다였죠. 운동도 아예 관둬서 축구선수로서의 몸 상태가 아니었어요.”
-흔한 말로 군대에 말뚝 박으려고 했다면서요.
“네, 그럴 뻔했어요. 당시 행정관님이 엄청 권유했어요. 운동부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뭐든 안 빼고 열심히 하긴 해죠. 그걸 좋게 보셨던지 자기가 도와줄 테니 하사관으로 지원하라고 하더군요. 저도 전역 뒤에 뭘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라 꽤 흔들렸어요. 한참 생각 끝에 아버지한테 전화해 상의했는데 ‘어떻게 결정하든 네 뜻대로 해라’고 하시면서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을 콕콕 찔렀어요. 나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을까. 정말 이렇게 축구를 관둬도 되는 걸까.”
-아버지가 멋지십니다.
“네, 아버지 앞에선 이런 얘기한 적 없지만, 제 아버지라서 너무 고마운 분이에요. 간판 일 하시면서 홀로 어렵게 집안을 꾸려오셨어요. 뭣보다 항상 절 믿어주고 옆에서 담담하게 지켜주세요. 그래서 ‘나 다시 축구해도 될까’라고 했더니 바로 ‘그럼, 나라면 무조건 한다’고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이렇게 관뒀다가 다시 하는 게 엄청 어려운 일인 줄 아시면서도, 자식이 마음에 미련이 남지 않길 바라셨나 봐요. 지금도 저한테는 제일 친한 친구가 아버지예요. 그 덕분에 다시 축구 하겠다는 결심도 설 수 있었어요.”
-오래 쉬었고 소속도 없어서 쉽진 않았겠어요.
“그렇죠. 그냥 전역 뒤에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군대에서 월급 꼬박꼬박 모아서 400만 원쯤 있었거든요. 할머니 아버지 용돈 좀 드리고 나머지 챙겨 들고 갔어요. 어쨌든 거기서 무슨 수든 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행히 아는 분 소개로 독립구단인 서울 TNT FC에서 운동할 수 있게 됐어요. 일단 몸도 다시 만들고 경기감각도 찾아야 해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때 받은 돈이 일당 2만5000 원이었어요. 사실 받아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죠. 그렇게 제일 밑바닥에서 다시 축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하편에서 계속)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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