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 아닌 3당으로 美 상원의원 지낸 버클리 별세

김태훈 2023. 8. 19.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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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미국 뉴욕주(州)에서 정치적 이변이 하나 일어났다.

양당제가 확고히 뿌리내린 미국에서 민주당도, 보수당도 아닌 제3당 후보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한국인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소속의 제임스 버클리 상원의원이 주인공이다.

버클리는 4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1970년 뉴욕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유력 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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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보수당’ 후보로 뉴욕주 출마해 당선
6년 뒤 재선 도전 실패… 초선의원으로 끝나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 판사 등 역임

1970년 미국 뉴욕주(州)에서 정치적 이변이 하나 일어났다. 양당제가 확고히 뿌리내린 미국에서 민주당도, 보수당도 아닌 제3당 후보가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한국인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보수당(Conservative Party) 소속의 제임스 버클리 상원의원이 주인공이다. 비록 재선에 실패하며 초선의원으로 끝났지만 버클리는 이후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을 지내고 또 사법부로 옮겨 연방법원 판사를 맡는 등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1975년 당시 미국 보수당 소속의 연방 상원의원이던 제임스 버클리(1923∼2023). 게티이미지 제공
18일(현지시간) 미 CNN 방송에 따르면 버클리는 이날 메릴랜드주(州) 베데스다의 자택에서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CNN은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미국에서 생존해 있는 전직 상원의원 중 최고령자였다고 소개했다.

버클리는 1923년 3월 뉴욕에서 태어났다. 1943년 명문 예일대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인 1949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변호사로 활동했다.

버클리는 40대 후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1970년 뉴욕주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유력 정치인 반열에 올랐다.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닌 제3당 인사가 상원에 진출한 것은 거의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에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요즘 뜨는 이른바 ‘제3지대’를 연상케 한다.

버클리가 속한 보수당은 몇 가지 쟁점에서는 공화당과 입장을 같이했으나 그렇다고 공화당의 ‘2중대’는 아니었다. 일례로 버클리는 의정활동 내내 헌법을 개정해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보수적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버클리는 공화당 소속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을 강력히 촉구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이던 로널드 레이건(왼쪽)이 제임스 버클리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 버클리는 레이건을 적극 지지하며 캠프 정치자금 모금에 앞장섰고, 레이건은 대통령 당선 후 버클리를 국무부 차관 그리고 연방항소법원 판사에 차례로 임명했다. AP연합뉴스
6년의 상원의원 임기를 마친 버클리는 1976년 재선에 도전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제3지대론은 한계가 있었고 민주·공화 양대 정당의 벽은 역시나 높았다.

이후로도 버클리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1980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이자 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와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맞붙었을 때 그는 레이건을 적극 지지하며 캠프 선거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레이건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1981년 버클리를 국무부의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에 임명했다. 1985년에는 수도 워싱턴을 관할하는 연방항소법원(우리 고등법원에 해당) 판사 후보자로 지명했다. 상원에서 민주·공화 양당이 초당적으로 그의 인준안을 가결했다. 버클리는 그때부터 약 15년간 판사로 재직하고 2000년 은퇴했다.

원내 정당은 아니지만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 보수당은 이날 뉴욕지부 위원장 명의로 고인을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 뉴욕지부는 “제임스 버클리의 삶과 업적은 보수당과 영원히 연결될 것”이라며 “뉴욕 시민들은 긴 삶의 대부분을 조국을 위해 봉사하며 보낸 한 사람을 잃었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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