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레전드, 주크박스 뮤지컬로 다시 깨어나다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스웨덴 출신의 4인조 혼성 팝그룹 아바(ABBA)는 1972년부터 1982년까지 10년 동안만 활동했지만 요즘 젊은 세대들도 그들의 이름과 노래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음악이 세대를 초월해 인기를 끌 정도의 대중성을 갖추기도 했지만, 1999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뮤지컬 《맘마미아!》의 전 세계적인 장기 흥행 덕분이기도 하다.
애초부터 뮤지컬을 위해 쓰인 곡이 아닌, 기존 팝스타들의 노래들을 모아 창작한 뮤지컬을 '주크박스(Jukebox) 뮤지컬'이라고 한다.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곡이 흘러나오는 자동판매기라는 뜻을 가진 주크박스는 기존 곡에 이야기를 꿰맞추는 창작법 때문에 작품성이 저평가되는 사례가 많다. 반면 '히트곡 모음집'이라는 높은 대중성을 가진 덕에 뮤지컬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춰주는 장점도 크다. 이 때문에 뮤지컬계에서는 수많은 팝 레전드 뮤지션들의 곡을 소재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새로운 이야기 vs 바이오그래피
주크박스 뮤지컬의 최대 약점으로 지목되는 드라마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도 있다. 바로 그 음악의 주인공인 팝 레전드의 실제 이야기를 대본에 반영하는 것이다. 노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기(傳記)'가 가지는 팩트의 힘까지 보여주는 이른바 '바이오그래피 뮤지컬'이다.
브로드웨이에서 기폭제가 된 작품은 2006년 토니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저지 보이즈》다. 1960년대 활동했던 미국의 유명 로큰롤 그룹 '포 시즌즈(Four Seasons)' 멤버 4명의 실제 인생을 담은 자서전을 기반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각광을 받았다. 포 시즌즈는 그룹 활동으로 수많은 히트곡을 쏟아냈지만, 돈의 배분을 둘러싼 탐욕과 자존심 싸움으로 멤버들과 매니저 사이에 잦은 불화가 나타났다. 이 작품에서 이런 내용까지도 가감 없이 공개됐다.
바이오그래피 뮤지컬은 주크박스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당사자의 사생활을 직접 대본에 담아야 한다. 제작사들은 당사자의 노래들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명권, 초상권 등 추가적인 퍼블리시티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때문에 당사자들이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2018년 개봉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흥행을 기록한 음악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1970~80년대를 풍미한 영국 록그룹 퀸(Queen)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1946~91)의 전기 영화다. 음악으로만 소비해 왔던 팝 레전드의 실제 삶이 얼마나 절절한 감동을 주는 뮤지컬 드라마 콘텐츠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퀸의 노래만으로 이루어진 주크박스 뮤지컬도 있다. 《위 윌 락유(We Will Rock You)》는 2002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을 올렸고, 우리나라에서도 투어 공연과 라이선스 공연을 가진 바 있다. 퀸의 멤버인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직접 음악작업에 참여했고 퀸의 주요 히트곡 24곡이 나온다. 하지만 동성애자였던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는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다. 《위 윌 락유》의 스토리는 퀸 혹은 멤버들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벤 엘튼이 대본을 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음악이 금지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자유로운 혁명가 갈릴레오와 스카라무슈가 무자비한 지배자 킬러퀸에 맞서는 일종의 SF물이다. 이 작품은 한국 창작진이 새롭게 각색한 스핀오프 버전으로 대학로 더굿씨어터에서 오는 9월22일부터 12월31일까지 공연이 예정돼 있다.
관객들은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과 바이오그래피 뮤지컬 중에서 특별히 하나를 선호하진 않는다.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면 어느 쪽이든 기꺼이 지갑을 연다. 다만 대본의 완성도만 본다면 《맘마미아!》와 같은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태생적으로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 바이오그래피가 좀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
최근 해외 뮤지컬계에서도 바이오그래피의 성공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아티스트이자 '팝의 제왕'으로 칭송받는 마이클 잭슨(1958~2009)의 뮤지컬도 그중 하나다. 그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엠제이(MJ)》는 지난해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해 올해 토니상 남우주연상까지 받으며 순항하고 있다. 그의 음악만을 나열한 주크박스 뮤지컬은 기존에도 있었지만, 그의 실제 삶을 담은 이야기로 만든 뮤지컬은 《MJ》가 처음이다. 작품 속에는 《ABC》 《빌리진》 《스릴러》 《스무스 크리미널》 등 25곡의 대형 히트곡이 등장한다. 또한 1992년 데인저러스 월드투어를 배경으로 화려한 커리어 속에 담긴 희노애락을 잭슨파이브 시절부터 되짚어 마이클 잭슨의 '팝의 제왕' 이전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아메리카》 《스윗 캐롤라인》 등 히트곡으로 우리나라 중장년층에게 잘 알려진 미국 원로가수 닐 다이아몬드의 바이오그래피 뮤지컬도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뷰티플 노이즈》라는 제목으로 그의 청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는,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쌓고 꿈을 실현해 나가는 내용을 담았다.
김광석 노래와 전기 담은 뮤지컬도 잇달아 개봉
한국 창작뮤지컬에서도 최근 주크박스 작품들이 꾸준히 관객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故) 김광석(1964~96)의 노래가 등장하는 뮤지컬이 현재 두 편 공연 중이다. 그가 불렀던 노래들에 새로운 이야기를 결합시켜 만든 《그날들》은 2013년 초연 이후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스테디셀러 작품이다. 포크록 장르를 상징하는 고인의 음악세계와는 다른 스타일의 대극장 뮤지컬 편곡이 특징인데, 극의 내용도 2012년 한·중 수교를 추진하는 정부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하는 스펙터클한 무대를 보여준다. 오는 9월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김광석이 초기 멤버로 활동하며 1988년 첫 앨범을 낸 한국 포크음악의 레전드 그룹 '동물원'의 곡으로 만든 뮤지컬 《그 여름, 동물원》도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이다. 김창기, 유준열, 박기영, 박경찬 등 동물원 멤버들은 처음부터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그룹 활동을 시작하면서 음악에만 집중하려는 김광석과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결국 그가 탈퇴하고 객원으로 남게 되는 실화를 뮤지컬 대본에 직접 담은 한국형 바이오그래피 뮤지컬이다.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변해가네》 《널 사랑하겠어》 등 그룹의 대표곡과 《서른 즈음에》 등 김광석의 노래들을 출연 배우들이 밴드를 재현하며 직접 연주하는 액터-뮤지션 형식으로 공연한다. 9월17일까지 서울 혜화동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코튼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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