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네 엄마나 죽느냐 사느냐한다” 190㎝ 키다리 아저씨, 딸에게 한 고백[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김환기 편]
추상표현주의
<동행하는 작품>
론도
매화와 항아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동행하는>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동림이. 우리, 같이 죽을까?"
시인 이상이 변동림에게 뜬금없는 말을 했다. 녹슨 철로가 깔린 방풍림을 걷던 중이었다. 섬뜩하리만큼 절절한 이 제안을 동림은 사랑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둘은 곧 함께 살았다. 이상은 천재였다. 동림도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의 수재였다. 그렇기에 둘은 문학책 몇 권과 외국어 사전을 곁에 두고 매일 밤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영문학과 러시아 문학을 얘기하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 대해 밤새워 토론할 수도 있었다. 이상은 곧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다. 동림과 결혼식을 올리고 4개월 만이었다. 그런데, 이상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하기 시작했다. 폐결핵이 또 도진 것이었다. "센비키야(千匹屋)의 멜론이 먹고 싶어." 급히 뒤따라온 동림에게 이상이 한 말이었다. 동림이 어렵게 멜론을 안고 왔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1937년 4월, 이상은 허무하게 죽었다. 향년 26세였다. 동림은 허무하게 홀몸이 됐다. 고작 21살이었다.
동림은 이후 무채색의 삶을 살았다.
그런 동림은 1940년대 초, 일본인 시인 노리타케 가즈오의 서울 집에 갈 일이 있었다. 가보니 손님이 한 명 더 보였다. "김환기라고 합니다." 190㎝에 가까운 이 꺽다리 남성은 자기소개부터 했다. "변동림이에요." 동림은 그저 그런 첫인상의 환기에게 사무적으로 인사했다. 가즈오가 슬슬 둘의 눈치를 살펴봤다. 이제야 동림은 이 모임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종종 연락해도 될지…." "그래요." 자리가 끝날 때쯤 환기가 건넨 말에 동림은 알겠다고 했다. ‘뭐,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으니까.’ 동림은 생각했다.
처음에는 몇 번 그러다가 그만둘 줄 알았다.
동림은 '그림 편지'를 보내오는 환기를 여전히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환기의 편지는 계속 왔다. 말을 담담하게 하던 환기는 글도 예쁘게 잘 썼다. 화가라고 하더니 그림도 썩 괜찮았다. 무엇보다 환기의 손길에선 다정함이 느껴졌다. 자학적인 이상(그래서 더 사랑스럽기도 했던)과 달리, 부드럽고 서정적인 면이 가득했다. 그렇기에 더 끌리는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림은 서서히 환기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한 번 젖기 시작한 사랑은 돌이킬 수 없었다. 동림은 조금씩 유채색의 삶을 다시 마주했다. 눈치 빠른 동림은 환기가 막판에 망설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환기는 조혼 풍습으로 일찍 결혼했다. 지금은 딸 셋을 둔 이혼남의 처지였다. 환기는 이 점을 걸려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동림이 용기를 냈다. 그녀 또한 팔자가 사납기로는 밀리지 않았다. "아이가 셋? 그게 왜요?" 동림의 말에 환기가 눈을 끔벅였다. "열이면 어때. 데려다가 가르치면 돼요." 환기는 그 말에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동림과 환기는 1944년에 결혼했다.
"당신의 아호(雅號)인 향안(鄕岸)을 주세요." "왜?" "내가 평생 그 이름을 달고 살게요." 결혼식 날 동림은 환기에게 말했다. 그렇게 동림은 환기의 아호를 가져왔다. 이제 동림은 '변동림'이 아닌 '김향안'이었다. 더는 이상의 옛 연인으로 남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환기, 당신과 늘 한배에 있겠다는 언약 증표였다. 둘은 화가 김용준이 내준 서울 성북동의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 노시산방(老柿山房)이었다. 늙은 감나무 덕에 붙은 이름이었다. 두 사람이 들어간 후에는 김환기의 호 수화(樹話), 향안의 이름에서 앞 글자를 따 수향산방(樹鄕山房)으로 바뀌었다. 둘의 생활은 넉넉지 않았다. 하지만 관계는 굳건했다. "…아내는 내가 술을 마시든, 게으름을 부리든 아무 소리가 없다. 돈을 못 벌어오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먹을 게 있든 없든 항상 명랑하고 깨끗하다. 아내는 능금을 좋아하는데 궤짝으로 사다 두고 먹어본 적도 없다. (…) (능금을)몇 알 사 들고 와 쥐여주면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환기는 언젠가 이런 글을 썼다. 이렇듯, 향안은 환기를 전적으로 믿었다. 끝없이 인내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향안은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또 상처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향안은 언제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이 남자에게 또 다시 생을 걸었다. 향안은 그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봤을까.
김환기는 1913년 전라남도의 한 섬에서 출생했다.
창문을 열면 짭조름한 소금향이 훅 들어오는 곳이었다.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섬의 유지(有志)였던 아버지 덕에 생활은 꽤 넉넉했다. '파란 하늘에서 펄럭이는 오색 깃발'을 태몽으로 품고 온 탓일까. 환기는 어릴 적부터 자연에도, 색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사시사철 다른 빛을 품는 산과 평야, 계절풍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바다를 쓰고 그렸다. 이런 흥밋거리가 안긴 건 결국 예술이었다. 환기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스무 살 때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선 제대로 미술을 배울 수 없었다. 환기를 비롯해 이중섭, 천경자, 이쾌대 등 이쯤에 붓을 쥔 사람 대부분이 일본으로 향한 이유였다. 이들 중 환기의 유학은 특이하긴 했다. 환기는 가출이자, 밀항으로 도쿄까지 왔다. "…수화(환기)는 동경 유학을 약속해 놓고 이를 이행하지 않는 부친에게 분개해 가출, 밀항으로 동경에 갔다. 홀로 공부하려고 했지만 가출에 놀란 부모가 곧 돈을 보내왔다." 훗날 향안의 술회였다. 미술을 향한 환기의 뜻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걸 보여준다.
청년 환기는 그 시절 가장 전위적인 화풍을 접했다.
도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들어간 환기는 유럽의 미술 사조를 익혔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최고 별난 화가로 꼽힌 도고 세이지, 후지타 쓰구하루의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알려준 게 입체파와 미래파, 그리고 추상회화였다. 환기가 특히나 마음을 둔 건 추상이었다. '서광이 비치는 아름다운 아침(Radiant Morning)'의 땅, 구상(具象)으로는 그려내기 벅찬 이 나라의 미감과 한을 추상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환기는 동료들과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백만회' 등 미래의 회화를 고민하는 혁신 그룹을 조직했다.
환기는 그러면서 1935년 권위 있는 미술전인 이과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실험작을 놓고 겨루는 이 대회에서 입선작으로 뽑혔다. 입체파 같은 시점, 초현실주의 같은 배경을 둔 이 그림의 주제는 고향이었다. 누이동생을 본뜬 여성, 섬에서 흘러가던 흰 구름과 푸른 바다, 무뚝뚝하게 선 나무와 바위, 둥지의 새알 등이 있는 작품이었다. 제목은 '종달새 노래할 때'였다. 아직은 완전한 추상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선과 면, 과감한 색 등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재능과 실력을 입증한 건 덤이었다. "그때는 낭만으로 살았던 때인지라 '종달새 노래할 때'는 달기만 한 작품이었다. (…) 나는 그날 밤 스탠드바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내 이름을 들었다. 동료들이 축배를 들어줬다. (…) 밤새도록 '미술가의 노래'와 '파리의 지붕 밑'을 불렀던 기억이다." 훗날 환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1937년, 환기는 돌아왔다.
실력을 인정받은 환기는 연습과 연구를 이어갔다. 일본 화단과의 교류도 계속했다. 그 덕에 환기는 금세 두각을 보였다. 그는 이 시기에 '론도'를 그렸다. 원래 '론도'는 음악 용어다. 같은 주제가 반복되는 동안 다른 요소들이 삽입되는 형식을 뜻한다. 환기는 론도의 특징을 캔버스로 옮겼다. 인체와 악기 모습을 색면의 반복, 중첩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리듬감을 줬다. 음악적 운율이 눈에 보이게끔 했다. 여전히 사람의 몸, 그랜드 피아노 혹은 첼로 같은 악기의 형태는 있었다. 하지만 이를 놓고 더는 구상이라 말하기는 힘들었다. 바실리 칸딘스키의 '인상 3'처럼,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인상을 추상화한 일에 분명 가까웠다. 환기는 한국 최초의 추상 화가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개인전을 열 만큼 자리를 잡아갔다. 그다음 해 환기의 아버지가 죽었다. 이쯤 환기는 두 가지 큰 결정을 한다. 조혼 풍습에 맞춰 사랑 없이 결혼한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일, 그리고 동림, 아니 향안을 만나 사랑을 고백하고 재혼한 일.
"정말 알 수가 없군."
환기가 혼잣말을 했다. "뭘?" 향안이 응수했다. "내 예술이 어느 정도인지 말이야." "그러면 나가봐." "어디?" "구라파로." 환기는 향안의 거침없는 말에 주춤했다. 이유가 있었다. 역시 돈이었다. 환기는 마음 편히 국경을 넘을 만한 돈을 벌지 못했다. 해방 후인 1946년, 환기는 서울대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로 연단에 섰다. 이어 1947년에는 유영국, 이규상과 함께 국내 첫 현대미술 모임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환기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환기는 추상을 통해 사실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때로는 수백마디 말이 아닌 침묵 한 점에서 더 많은 뜻을 읽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것처럼, 꽉꽉 채운 인물화나 풍경화보다도 부족한 듯 담담한 추상화가 더 많은 뜻을 전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환기 주변으로 추상의 가능성을 엿본 화가들이 모였다. 이중섭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땐 부산에서 해군 종군 화가로 나섰다. 이후 1952년부터는 홍익대 미술학부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환기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움직임을 이어갔다. 그러나 돈벌이는 시원찮았다. 한국 정서에서 구상화가 아닌 무언가는 여전히 낯선 예술이었다. "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 않으니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향안이 유럽을 제안한 건, 이렇게나 맥이 빠져있을 때였다. "어떻게 가." "그럼 내가 먼저 나가볼게." 향안이 말을 딱 잘랐다.
향안은 진심이었다.
향안은 곧장 프랑스 영사관을 찾았다. 어디서 무슨 수를 썼는지, 프랑스어 책과 사전을 잔뜩 챙겨왔다. 그리고 달달 외웠다. 1955년, 향안은 홀로 프랑스 파리로 갔다. 엄청난 추진력이었다. 향안은 소르본 대학교와 에콜 드 루브르를 돌며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모델로 유명한 루냐 체코프스카 등 파리 화단 내 주요 인사들과 친분도 쌓았다. 향안은 어느새 프랑스어를 원어민처럼 썼다. 꽤 그럴듯한 거처도 구할 수 있었다. 엄청난 적응력이었다. "이제 오시오." 향안은 환기를 불렀다. 향안이 파리에 오고서 겨우 1년이 흐른 후였다.
사실상 레드 카펫이 깔린 느낌이었다.
파리로 온 환기는 이런 기분이 들 만큼 더 바랄 게 없었다. 향안의 친구가 된 체코프스카가 다사스 거리에 작업실을 구해줬다. 갤러리를 운영한 그녀는 환기의 파리 첫 개인전도 열어줬다. "향안이 나를 위해 이렇게 좋은 환경의 작업실까지…. 그래도 나는 아직 다복한가보오. 파리에 오자마자 그냥 작업에 착수할 수 있는 화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무조건 감사하오." 환기는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환기는 향안의 정성에 화답하듯 그림에 혼을 실었다. 환기는 파리에서 가장 한국적인 화가가 되기로 했다. 정체성을 잃지 않는 동시에 세련된 서양 기법을 적극 차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환기는 산과 사슴, 매화와 학, 구름과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추상 정물화에 매달렸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도 가지 않았다. 꽉 쥔 한국인의 정체성을 옛 대가의 압도적 그림 앞에서 행여나 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파리 시기 환기의 대표작은 '매화와 항아리'다. 환기는 봄을 끌고 오는 매화, 통통한 구름 한 점을 따다 놓은 듯한 백자 달항아리를 한국의 미(美)로 두고 그렸다. 이를 둥근 달과 겹치게 해 하늘에 띄웠다.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투쟁이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건 색이다. 깊은 푸른빛이다. 환기는 낯선 땅에서 이 신비로운 푸른색을 제대로 발견했다. 환기는 종종 한국의 푸른(靑)빛과 서양의 블루(Blue)는 다르다고 설파했다. 1957년, 니스의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한 그는 "한국의 하늘은 지중해보다 진하고 푸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게 이 색은 '환기 블루'였다. 자신을 뜻하고, 고향을 뜻하고, 조국을 뜻하는 색이었다. 이 또한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투쟁의 산물이었다. 환기는 이렇게 '가장 한국적인 것'을 서양의 틀에 버무렸다. 그 결과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가장 독창적인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 늦은 밤에 아직도…."
"나도 곧 자리다." 환기는 뒤척이는 향안을 다독였다. 그는 다시 잠든 향안을 지긋이 쳐다봤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환기에게 향안은 그의 첫 평론가이자 조언자, 그리고 매니저였다. 향안은 사람 앞에선 늘 다정했고, 그림 앞에선 언제나 신랄했다. 그런 그녀는 그림 설명부터 관리, 거래 등 모든 일을 도맡았다. "내조가 대단하십니다." 오지랖 넓은 누군가의 말에 "내조가 아니고, 서로 돕는 거예요"라고 말하던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네 엄마는 파리에 와서 나 때문에 진정 피나는 고생을 한다. (…) 네 엄마의 희생적 노력과 협조가 아니고서는 잠시도 편히 붓을 들 수 없었을 것이고, 일부에서 인정을 못 받았을 것이다. 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경으로 붓을 들어왔고, 네 엄마 또한 이런 정신력으로 오늘까지 밀고 온 것이다. (…) 아, 사람이란 이런 것을 보고 투쟁이라 하고, 극복이라 하나 보다." 환기는 향안의 이불을 가슴팍까지 올려줬다.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다. 1959년, 이제 돌아갈 때였다.
다시 서울이었다.
환기는 홍익대 미술학부장과 학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심사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했다. 그런 환기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먼 대륙이 찍혀있는 비행기 티켓이었다. 1963년, 환기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회화 부분 명예상을 받았다. 이 일로 그의 짧은 이벤트는 끝날 뻔도 했다. 그러나 환기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곧장 미국 뉴욕으로 갔다. 원래 한두 달 정도 머물 뜻이었지만, 그는 그대로 자리를 깔고 앉았다. 때마침 예술의 무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가던 때였다. 잭슨 폴록 이후 추상 표현주의가 만개하고, 팝아트와 미니멀리즘 등 실험적 미술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환기는 한국에서의 교수직, 여러 명예직을 뒤로 한 채 새로운 모험에 나섰다. 그의 나이는 쉰 살이었다.
뉴욕은 쉽지 않았다.
현대 미술의 요람을 자처하는 뉴욕의 미술 세계는 파리보다 더 어렵고 복잡했다. 누군가는 자유를 찾아, 누군가는 차별과 탄압을 피해, 또 누군가는 새로운 미술시장을 정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고 있었다. 한가닥하는 전 세계 예술가가 모두 모인 이 도시에서 두각을 보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작고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무명 예술가일 뿐이었다. 환기는 수모도 겪었다. 뉴욕타임스(NYT)는 1964년 뉴욕에서 열린 환기의 첫 개인전에 대해 "이 한국 화가에게는 아시아적 영향의 흔적이 없다"고 혹평했다. 한국, 나아가 동아시아가 해와 달, 산과 구름을 얼마나 중요히 보는지를 몰랐던 탓이 컸다. NYT는 그의 그림 기법을 놓고도 "끈적끈적한 안료의 겹겹 반죽 속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듯하다"고 비판했다. "나는 갈수록 좋은 그림을 그릴 자신이 있다. 내월(月)에는 또 새 정신으로 시작해보겠다." 환기는 그가 남긴 이 말처럼 좌절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미지의 땅에서 환기는 넥타이 공장에 오갔다. 향안은 백화점 판매원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무명의 환기가 가진 건 점, 선, 면뿐이었다.
환기는 그림을 처음 접한 사람인 양 이런 기본적인 요소들을 갖고 실험을 이어갔다. 그렇게 그는 점점 더 '점'에 천착했다. 환기는 이제 점을 찍었다. 하루에 열댓 시간씩 수백개, 수천개, 수만개의 점을 만들었다. 점은 분명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지긋이 보다 보면 이 점들은 분명 떨리고, 흔들리고, 흐느끼는 듯도 했다. 환기는 점 하나에 철학을 심었다. 점 하나에 사랑을 심고, 점 하나에 그리움을 심었다. 그렇게 자기 삶을 점에 쏟아부었다. 그 결과 그의 점은 고향 섬 하늘을 수놓은 별, 서울 한강에 뜬 윤슬, 부산 바다에 내려앉은 달빛처럼 은은했다.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 나를 돕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한 파리 동료들의 발자국처럼 절절했다. 환기는 비로소 진짜 추상화가가 될 수 있었다. 남들 같은 추상화가 아닌, 자기만의 추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환기는 더 완전해졌다. NYT 또한 환기의 각성을 감지했다. NYT는 환기의 1971년 개인전을 놓고 이렇게 평가했다. "불규칙한 둥그스름한 점들을 둘러싼 작은 사각형들을 다루는 그만의 기발함(ingenuity)은 무궁무진해보인다. (…) 가장 매력적인 전시였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환기는 맨해튼의 밤하늘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깊이 존경한 선배 예술가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떠올렸다. 그는 조용히 입술을 떼 구절을 읊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는 마지막 구절을 곱씹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갑자기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우리네 삶은 왜 이렇게 그리워할 게 많아야 하는가. 나이가 찰수록 함께 차오르는 건 사모와 동경뿐이었다. 환기는 죽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옛 동료들을 곱씹었다. 그중 병원비 독촉장만 남긴 채 비참하게 죽은 중섭을 추억했다. 때마침 광섭이 죽었다는 보도를 접했다는 말도 있다(그것은 오보였다). 그리고 향안을 생각했다. 팔자가 사납기로는 자기도 밀리지 않는다던 향안을 생각하다보니,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졌다. 퉁퉁 부은 손과 발을 보니 사무침은 끝이 없었다. 환기는 붓을 쥐었다. 다채로운 '환기 블루'에 붓을 푹 찍은 채 눈물겹게 점을 찍었다. 너와 나, 우리는…'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는 그림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이 그림은 1970년 한국일보 주최의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죽어간 사람, 살아있는 사람, 흐르는 강, 내가 오르던 산, 돌, 풀 포기, 꽃잎…. 실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점을 찍어간다." 환기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환기의 담대한 도전들은 필시 그리움을 낳았다. 그 그리움은, 밤새 뒤척일 만큼 깊은 통증을 부르곤 했다.
환기는 열정적이었다. "낮에는 햇빛이 아까워 붓을 안 들 수가 없고, 밤에는 전깃불이 아까워 그림을 안 그릴 수 없다." 이렇듯 환기는 생이 아까워 그리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화가였다. 평생 목 디스크를 앓고도 쪼그려 붓질하지 않으면 배길 수 없는 화가였다. 그런 환기에게 어느새 흰 눈 같은 흰 머리가 소복이 쌓였다. 뉴욕에 온 후부터 그의 늙음은 더욱 가팔라졌다. 밖에서는 육체노동, 안에서는 꼬박 점이나 찍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아무런 생각이 안 든다. 늘 졸리기만 하니 이거 늙은 거다. 노쇠(老衰)를 절감한다." 1974년 2월 18일 일기. "센트럴 파크에 간신히 나가다. 곧 쓰러질 것만 같다." 같은 해 4월 4일 일기. "새벽부터 비가 왔나 보다. 죽을 날도 가까워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같은 해 6월 16일 일기…. 환기도 자기 생이 마지막에 이르렀다는 걸 직감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검다. 온통 검은 점과 선이다. 이는 죽음 이후의 세계, 이를테면 우주 내지 심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도 환기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1974년, 목디스크 수술을 생각하고 병원에 간 환기는 이 과정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해가 환히 든다. 오늘 한 시에 수술. 내 침대에 'NOTHING BY MOUTH'가 붙어 있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같은 해 7월 12일 일기. 환기의 기록은 여기에서 끝이었다. 예순을 갓 넘긴 그는 그리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한 채 숨졌다. 수술 직전 환기에게 도덕경을 가져다준 향안이 끝을 지켰다. "7월 14일, 새벽. 환자가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다. 인텐시브 케어실(집중 치료실)에 옮겨져 인공호흡이 가해져 있었다. 스트로크. 뇌출혈이 일어난 것으로 진단. 의식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12일간 인공호흡으로 계속하다 1974년 7월25일 9시40분 운명하다." 향안의 기록이었다. 환기는 별이 잘 보이는 발할라(Valhalla) 산마루의 켄시코 묘지에 묻혔다. 향년 61세였다.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향안은 이렇게도 썼다.
이제 다시 향안이 나설 시간이었다.
향안은 뉴욕에 계속 있었다. 환기와 걷던 허드슨강 맞은편의 공원을 걸으며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향안은 환기가 남긴 작품들을 정리했다. 그 가치를 알리는 일에도 힘 쏟았다. 향안은 세계 유수 미술관이 환기의 그림을 소장할 수 있도록 손을 썼다. 1992년에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자비로 환기 미술관을 세웠다. "키만 껑충하고 촌스러운 남자였어." 노년의 향안은 환기를 이렇게 추억했다고 한다. 향안은 어린 환기에게 순수함을 본 것이었다. 위선도, 가식도 없는 젊은 환기의 촌스러운 모습에서 티없이 맑은 화혼을 본 것이었다. 이상. 잊을 수 없는 그 시인이 품던 예술정신을 또 한 번 본 것이었다. 환기에게 모든 것을 건넨 향안은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8세였다. 향안도 발할라 묘지에 묻혔다. 먼저 세상을 뜬 환기의 묘 옆에 나란히.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전통 소재를 놓지 않은 환기는 그 시절 가장 한국적인 화가였다. 서구 사조를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 없던 환기는 그 시절 한반도가 낳은 가장 세계적인 화가기도 했다. 향안은 그런 환기에게 돌과 꽃, 나무와 은하수 같은 존재였다. 변함 없이 굳건한, 예외 없이 아름다운, 틀림 없이 그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났을까.
〈참고 자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환기미술관
미술관 일기, 김향안, 환기미술관
월하의 마음, 김향안, 환기미술관
파리와 뉴욕에 살며, 김향안, 지식산업사
김환기, 마로니에북스 편집부, 마로니에북스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5)“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6)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7)“나나 네 엄마나 죽느냐 사느냐한다” 190㎝ 키다리 아저씨, 딸에게 한 고백[후암동 미술관-김환기 편] -붓을 든 시인(추상표현주의 특별편) (2023. 8. 19.)
8)“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9)“여자랑 사느니 맹수랑 살겠다” 아내앞서 폭언…‘전쟁같은 사랑’을 한 부부[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호퍼 편] 고독의 화가(불모지) (2023. 8. 5.)
10)“난 고깃덩어리, 죽으면 시궁창에 던져버려” 폭탄발언…그는 ‘인간중독’이었다[후암동 미술관-프랜시스 베이컨 편] 고통의 화가(외딴섬) (2023. 7. 29.)
11)“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12)“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
13)“엄마가 사라졌다, 속이 시원했다”던 그녀도 실종…1년뒤 ‘뜻밖’의 발견[후암동 미술관-아그네스 마틴 편] - 홀로 선 은둔자(미니멀리즘) (2023. 8. 12.)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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