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술라웨시 동굴벽화, 인류 회화의 기원지인가?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34>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동굴 벽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순다 열도(Sunda Islands)의 열대우림 섬들. 최근 이곳에서 새로운 고고학 유적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세계 고고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이 지역은 19세기 말 ‘자바 직립원인’(Java 直立猿人)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21세기 발견된 유적ㆍ유물 중 인류 진화 연구에 가장 중요한 것이 ‘호빗’이라고 불리는 호모 플로렌시스(Homo florensisㆍ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 화석이라면, 문화 고고학 분야에선 단연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동굴 벽화다. 이 벽화들은 유럽의 동굴 벽화보다 제작 연대가 훨씬 앞선다는 분석이다. ‘세계 미술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이런 인류 초기 기록들이 어떻게 열대우림 속에 생생하게 남게 됐을까? 아시아적 시각에서, 현생 인류의 진화와 확산 과정을 밝힐 단서가 되진 않을까?
술라웨시섬으로
인도네시아 발리를 거쳐 술라웨시섬의 가장 큰 도시인 마카사르에 도착했다. 술라웨시섬은 바람개비처럼 생겼는데, 섬 면적(18만680.7㎢)이 한반도보다 조금 작은, 세계에서 11번째로 큰 섬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거울 같은 순다 바다에 반사되는 태양, 그리고 물에 떠 있는 치마폭 같은 섬들이 한데 어우러져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마카사르시(市)는 로테르담항구(Port Rotterdam)라고 불리던 17세기부터 네덜란드 상단이 있던 곳이다. 당시의 성(城)이 남아 있어서 고고학연구소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평생 이 지역 섬 문화를 연구한 재일 한국학자 가종수 교수와 함께 고고학연구소를 방문했는데, 모든 연구원이 호주 대학팀과 함께 다른 섬의 유적을 발굴하러 갔다고 했다. 이곳은 적도에 가까운 남반구여서 7~8월이 건조하고 비교적 시원해 고고학 발굴조사에 적기라고 한다. 발리 공항의 그 많은 관광객들은 모두 여행 최적 시기를 아는 모양이다.
동굴 벽화의 섬 술라웨시
술라웨시섬 남부 지역은 석회암 지대여서 동굴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이 중 벽화가 발견된 곳만 거의 400곳에 이른다 하니, 가히 ‘동굴 벽화의 섬’이라 할 만하다. 그동안 이곳은 ‘인류가 150만 년 전부터 들어와 살던 곳’으로 알려졌지만, 두드러진 고고학 유적들이 별로 없었던 데다 고고학 연구도 많지 않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호주의 브럼(Brumm) 교수와 오버트(Aubert) 교수가 연대 측정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이런 벽화들은 인류사를 새롭게 써야 할 중요한 자료다.
기대로 한껏 부푼 가슴을 안고 연구소를 출발해 동쪽으로 4시간을 달렸다. 새롭게 고고학계에 알려진 우할리에(Uhallie) 동굴 벽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유적에 가까운 랑기(Langi) 마을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 마을은 외딴 지역인 데다 주변에 고지대도 많아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머무는 숙소의 젊은 주인이 높은 산에 올라가 이 동굴 벽화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 전 세계에 알렸다고 한다. 한 젊은이의 열정과 사회 소통망의 위력이 새삼 놀랍다.
우할리에 동굴 벽화
우할리에 벽화는 발견 후 지금까지 답사한 사람이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답사지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감이 은근하게 일어나는 대목이다. 고고학 탐사의 길을 나서노라면, 뭔가 새로운 발견물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대심에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3시간을 넘게 걸은 뒤에야 8부 능선쯤 구멍이 뻥 뚫린 허연 암벽이 눈에 들어왔다. 얼기설기 임시로 만든 대나무 사다리를 오르니, 큼직한 방 천장에 불그레하게 색을 칠한 벽화들이 가득 보인다. 처음에는 선명하게 찍힌 손 그림들이 눈에 띄더니, 숨을 돌리고 찬찬히 보기 시작하자 큼직한 소 그림들도 독특한 집선문(集線紋)으로 이곳저곳에 그려져 있다.
그림이 위치한 곳의 동굴 바닥이 경사져서 똑바로 서기 어렵다. 겨우 균형을 잡고 그림을 살피니 이번엔 목이 뻣뻣하고 불편하다. 쳐다보기도 어려운 벽 천장에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평지 마을에서 한나절이나 걸리는 이 산꼭대기까지 와서 이 그림을 남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왜 그렸을까? 언제일까? 왜 손을? 왜 소를? 등등의 의문들이 금세 머릿속을 꽉 채운다.
손을 그린 그림은 세계 곳곳의 선사시대 동굴 벽화로 많이 남아 있다. 아마도 손은 개인의 존재와 정체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리라. 또한 신성한 장소에서 신과의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 소 그림은 몸집을 크게 부풀려 표현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다리는 작게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풍요로운 사냥감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다. 또 땅 위에 서 있는 소 그림을 둘러싼 손 그림들은 사냥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식일지도 모른다. 소는 평지의 풀밭 짐승인데, 이 산꼭대기에 와서 그림을 남긴 것을 보면, 분명 절절한 염원을 담은 풍요 의식으로도 추정된다. 비교적 먹을거리가 풍성한 열대 지역이라 하더라도 선사시대에는 하루하루 음식 장만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선사시대 그림은 바로 인류사의 극적 장면들
레앙-레앙 동굴벽화공원은 마카사르시 북으로 30여㎞ 떨어져 있는데, 석회암 괴석들이 보여주는 풍광이 일품이다. 수직 절벽 중간에 위치한 많은 동굴 속에 멧돼지와 손 그림이 남아 있다. 또 인근에는 이 지역 동굴 벽화들을 소개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특히 술라웨시 남부 동굴에는 놀랍게도 고래잡이 장면을 그린 것도 있어 눈길을 끈다. 고래 등에 작살을 박아서 육지로 끌고 오는 장면 역시 극적인 순간을 남긴 것이다. 또 불루 시퐁(Bulu Sipong) 동굴 중 하나에는 동물 가면을 쓴 사람이 멧돼지를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제작 연대가 4만3,900년 전으로 측정됐다. 또 최근 레앙 테동응에(Leang Tedongnge) 동굴에서 발견된 멧돼지 그림은 4만5,500년 전으로 확인되는 등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로 판명됐다. 이곳 동굴 그림들은 생활사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전 세계 곳곳에는 동굴이나 바위 그늘에 물감으로 그려진 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긁거나 파내서 그림을 새긴 암각화가 흔하다. 대표적인 것이 고래 사냥이 등장하는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울산 울주군)다.
선사시대든 역사 시대든 시대를 막론하고, 벽화는 인간 경험과 염원을 표현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생생한 역사책이다. 오래전 인간의 감성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선사 인류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 앞에 서게 되면 흥분되지 않을 수 없다.
벽화 제작 연대를 알아내는 단서
술라웨시의 수많은 동굴 벽화는 문자가 없던 시대의 기록이다. 사실 이곳의 동굴 벽화는 이미 19세기 저명한 영국 생물학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1823~1913)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언제 누가 그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선사시대 그림들의 연대를 알아내는 것은 고고학의 큰 숙제다. 동굴 속이나 인근 퇴적층을 근거로 연대를 추정하기도 하지만, 이런 퇴적층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림 속에 멸종 동물이 포함되어 있다면 추정이 가능했겠지만,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동물이면 쉽지 않다. 또 특정한 스토리가 있거나 특정한 모양의 유물을 그렸다면 문화 발전단계를 근거로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단서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아서 항상 논란이 불거졌다.
그런데 현대 과학의 발전은 동굴 벽화의 절대 연대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프랑스 구석기 동굴 벽화들의 경우, 그림 재료로 사용된 목탄이나 석회석의 연대를 측정해 시대적인 변화를 읽어냈다. 이곳 동굴벽화 연대는 벽화를 덮고 있는 석회석 동굴 팝콘(Cave popcorn)을 우라늄 연법(Uranium-鉛法)으로 측정했다. 이곳 레앙 팀푸셍(Leang Timpuseng) 동굴 벽화가 이 방법으로 ‘3만7,900년 전’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이후에도 속속 ‘더 오래된 벽화’가 확인되면서 최근엔 ‘4만5,000년 전’이란 기록도 나왔다. 유럽보다 최소 5,000년이나 앞서는 세계 최고(最古) 미술 작품인 것이다. 물론, 연대 측정에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여러 동굴 벽화의 연대가 일관성이 보인다는 점에서 상당히 믿을 만한 결과다. 그렇다면 우할리에 동굴 벽화는 얼마나 오래됐을까
탐사에서 만난 사람들
선사시대 동굴 벽화에 사람이 그려진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이번에 우할리에 동굴 탐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그림이 바로 ‘춤추는 사람’이다. 춤추는 모습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나 러시아 시베리아의 바위에도 보인다. 그려진 시기가 달랐고 그린 사람의 모습도 제각각이었겠지만, 비슷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은 역시 사람인 모양이다. 랑기 마을에서 머리 짐을 이고 산길을 올라 우할리에 동굴 앞에 우리 점심상을 펼치던 작은 체구의 여인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번지는 생글거리는 웃음에 ‘우리는 바로 다 같이 사는 현생 인류’라는 동질감이 솟는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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