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뭉치’ 슈퍼스타를 영입한 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 [경기장의 안과 밖]
올해 일본프로야구(NPB)에는 88년 역사에서 최대 거물로 꼽히는 외국인 선수가 뛰고 있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오른손 투수 트레버 바워(32)다. 2012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2021년까지 통산 84승에 평균자책점 3.79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팀당 60경기 단축 시즌이던 2020년 11경기 평균자책점 1.73으로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양대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투수에게 각각 주어지는 상이다.
NPB는 원년인 1936년부터 외국인 선수 제도를 뒀다. 이후 숱한 선수가 거쳐갔지만 바워 같은 거물은 없었다. 버블 경제가 한창이던 1980~1990년대 거물급 메이저리그 스타가 일본 땅을 밟기는 했지만 사이영상 경력 ‘투수’는 없었다. 1956년 초대 사이영상 수상자 돈 뉴컴이 바워에 앞서 NPB에서 뛰기는 했다. 하지만 뉴컴은 1962년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할 때 투수가 아닌 야수로 계약했다. 투수로는 딱 한 경기에 등판했을 뿐이다. 기량 면에서 이미 전성기가 끝난 선수였다.
뉴컴과 달리 바워는 30대 야구선수도 전성기 기량을 유지하는 스포츠 과학의 시대에 뛰고 있다. 올해 NPB에서 바워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시속 151.9㎞다. 2021년 메이저리그에서보다 더 빠르다. 그럼에도 일본 무대를 택한 이유는 메이저리그에서 더 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워는 2021년 LA 다저스와 3년 1억200만 달러(약 1300억원) 거액 계약을 했다. 하지만 여성 폭행 문제가 불거지며 6월까지만 뛰었다. 검찰 조사에서 최종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중징계를 했고 다저스는 올해 1월 바워를 방출해버렸다. ‘사고뭉치’로 낙인찍힌 그에게 관심을 보인 메이저리그 구단은 없었다.
그런데 요코하마는 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킨 바워를 영입한다는 결정을 내렸을까. 최근 요코하마 구단과 접촉한 인사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모기업인 DeNA에서 “바워가 팀에 긍정적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구단 스태프는 “그렇다”는 답을 했다고 한다. 성적에 대한 기대 이상의 것이 있었다.
바워는 괴짜로 악명이 높았지만 야구에 있어서만은 진지하다. 그는 UCLA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당시 미국 야구에 보편화된 투구 데이터와 생체역학에 능통했다. 자기의 투구폼에서 타자를 상대하는 최적의 투구 조합을 찾고, 이를 잘 소화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온 게 상대적으로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바워가 야구선수로 성공한 길이었다. 요코하마 구단 사람들은 이 점을 높이 샀다.
2000년대 이후 메이저리그는 투구 및 타구 트래킹 데이터의 확산과 생체역학의 발달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투수 영역에선 구속의 향상과 효과적인 투구 레퍼토리를 찾는 피치 디자인의 발달, 스위퍼 등 신구종의 개발 등 진보가 이뤄졌다. NPB도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IT 기업 DeNA가 모기업인 요코하마는 센트럴리그에서 가장 혁신친화적인 구단으로 꼽힌다.
요코하마는 2021년 2군 캠프에 ‘옵티트랙‘이라는 동작 해석 장치를 도입했다. 센서 39개가 달린 슈트를 입고 투수가 투구를 하면 모션 캡처로 분석이 이뤄진다. 신체 어떤 부위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 시각화할 수 있다. 전해인 2020년엔 공 회전수 등을 계측하는 트래킹 장비 랩소도와 초당 700프레임을 촬영하는 고속카메라 에저트로닉을 도입했다. 이와 함께 2군 경기장과 훈련장에 카메라 41대를 설치해 플레이 영상을 촬영하고 분석한 뒤 선수에게 피드백한다.
바워는 이런 장비를 활용하는 데 누구보다 익숙하다. 변형 슬라이더인 ‘스위퍼’는 지금 메이저리그의 대세 구종이다. 오타니 쇼헤이가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에서 마지막 삼진아웃을 잡아낸 공이 크게 휘어지는 스위퍼였다. 한국에서도 NC 다이노스의 메이저리거 출신 에릭 페디가 이 공으로 KBO리그를 호령하고 있다. 바워는 2018년 스위퍼를 완성하며 커리어 첫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스위퍼를 완성할 때 도움받은 장비가 투구 그립과 회전 간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는 에저트로닉이었다.
요코하마 구단 관계자는 “젊은 투수 사이에서 장비와 데이터를 이용해 야구 실력을 끌어올리고 싶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워가 이들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다”라고 밝혔다. 실제 이런 관계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타자에게 유리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쓰는 요코하마는 전통적으로 타고투저가 팀 컬러였다. 올시즌 8월2일 현재 요코하마는 평균자책점 3.23을 기록하고 있다. 1972년 이후 가장 좋은 기록이다. 바워도 5월 NPB에 데뷔해 평균자책점 6.86으로 부진했지만 6월 이후 9경기에선 2.16으로 호투 중이다.
다르빗슈와 이치로의 논쟁
프로야구 선수는 전문가다. 그만큼 자기 분야에 자부심이 강하다. 성적이 곧 연봉으로 이어지는 만큼 실험보다는 검증된 기존 방법을 선호한다. 일본 야구는 특히 보수성이 강한 리그로 알려져 있다. 이런 환경에서 혁신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롤모델이 돼줄 스타 선수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요코하마 구단은 바워가 그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이미 일본 야구에는 이런 롤모델이 있다. NPB에서 통산 93승과 평균자책점 1.99, 메이저리그에서 103승/3.57을 기록 중인 투수 다르빗슈 유다. 이란계인 다르빗슈는 일본 야구에서 ‘반골’로 통한다. 2012년 메이저리그 진출 뒤부터 일본 야구의 낡은 훈련 방식을 비판해왔다. 2010년대 중반 스즈키 이치로와의 ‘웨이트트레이닝 논쟁’이 대표적이다. NPB는 전통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에 소극적이었다. 이 분야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뒤졌다. 하지만 다르빗슈가 웨이트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인식이 달라졌다. 피칭과 트레이닝 이론 전문가인 우치다 세이토는 올해 3월 한 인터뷰에서 “당시 논쟁을 계기로 웨이트트레이닝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라고 밝혔다. 그 결과 투수 구속이 상승했고, 올해 WBC 우승으로 이어졌다는 견해다.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사무라이재팬’ 관계자는 “대표팀 투수들이 다르빗슈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다르빗슈도 기꺼이 후배들에게 답을 줬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56홈런을 때린 무라카미 무네타카 등 NPB 간판 타자들은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에게 근력 트레이닝에 대한 의견을 자주 질문했다고 한다. 오타니는 다르빗슈처럼 직설적 발언은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 야구가 보다 과학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르빗슈와 뜻을 같이한다.
KBO리그는 하드웨어 면에서는 NPB에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 삼성 라이온즈는 2018년 트랙맨이라는 트래킹시스템을 라이온즈파크에 설치했다. NPB에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2015년 이 시스템을 설치한 게 처음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2019년 요코하마의 옵티트랙과 비슷한 장비를 도입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지난해 각 구단이 개별 계약해온 트래킹시스템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고교야구 전국대회가 열리는 목동구장에도 트랙맨 장비가 깔려 있다. 하지만 아직 KBO리그에서는 NPB와 같은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차명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 이사는 이에 대해 “결국 중요한 건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했다. 바워, 다르빗슈, 오타니의 사례는 프로야구 혁신에서 슈퍼스타의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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